그에게는 ‘식물성의 저항’이 느껴진다. 마르고 꼿꼿한 몸에선 소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분자분 절도 있는 몸짓에선 청량한 대숲소리가 난다. 세상을 향한 말걸기는 호기롭고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애달프다. 뼈마디를 울리는 칼칼한 목소리는 얼마나 진국인가. “밥 잘 먹고 똥 잘 누면 행복이지 별거여~” 호탕한 일갈로 담박한 행복론을 펴는 장사익. 마흔 여섯에 가수가 된 그는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 특유의 절절한 울림으로 장사익만의 ‘소리’를 길러내고 있다. 지난 2월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하늘 가는 길’ ‘찔레꽃’ ‘허허바다’ ‘봄날은 간다’... 장사익의 노래를 듣다 보면 한줌 흙이 만져진다. 촉촉한 땅의 기운. 자연과 살 맞닿음의 확인. 콘크리트에서 나온 음악이 아니다. 필시 그는 자연 속에 거주하리라 추측했다. 예상대로다. 홍지문 부근, 앞으로는 인왕산 뒤로는 북한산 자락에 그의 집이 놓여있다. 남으로 창을 냈다. 벽면 전체가 유리다. 거실에는 둘레의 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하늘의 기운이 직통으로 쏟아진다.
“햇살이 참 좋은 날이죠. 여기 앉아 있으면 겨울에 불 안 때도 뜨듯해. 햇살 한 자락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꽃피는 것. 아기들 살이 포동포동한 것. 이게 다 행복이야. 이따 밤엔 정월대보름이 뜨겠죠. 휘영청 달 보고 감동도 하고 그래야지. 요즘 사람들 바쁘게 땅만 보고 사는데 조금만 고개를 들면 행복이 천지야.”
주변의 것들, 무심코 보아 넘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행복으로 엮는 장사익. 그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자세가 바로 행복이라고 말했다. 한참을 하늘에 시선을 두더니 연주가 끝난 악기처럼 잔잔히 읊조린다. “행복은 마음이여, 마음 같어. 가만히 보니 그러네.”
하고픈 일 하고 살아야 행복하다
마흔 여섯에 노래를 시작한 장사익은 삶의 통한이 절절이 묻어나는 음색과 열창 덕분에 가수보다 소리꾼으로 통한다. 가요계뿐만 아니라 예술 쪽에서 그와 같은 늦깎이 데뷔와 성공은 전무후무한 경우다. 그러나 그에게 나이는 무기였다.
“사회생활 25년을 하면서 넘어지고 얻어터진”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을 살렸다. 한 곡 한 곡 노래에 담아 불렀다. 판소리 같기도 하고 시 낭송 같기도 한 ‘장사익스러움’은 기존 가요의 틀을 파괴했고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이땅에서 저땅으로 바람처럼 떠돌았다. 누가 내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한 반가운 공감과 뭉클한 희망은 물결처럼 퍼졌고 ‘장사익 붐’을 일으켰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 세상에 왜 나왔을까 생각이 들더라고. 요만한 풀씨 하나도 꽃을 한번 피우지. 세상 만물은 다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어. 내가 세상에 나와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하다가 노래를 찾았을 때 ‘야, 바로 이거구나!’ 싶었지.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행복해.”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때 진짜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이 자신처럼 늦게 올수도 있고 빨리 찾을 수도 있지만 ‘나만의 길’을 찾는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 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는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죽을힘을 다해 노래를 하면 관객도 죽을힘을 다해서 노래를 들어줘. 마찬가지로 10%만 부르면 10%만 들어주고. 아주 정직해. 노래는 다 쏟아내고 개운하게 해야 해. 그래야 살아나. 확 쏟아내지 않고 건성으로 하면 똥 누다가 만 것처럼 아주 찝찝한 거여.”
‘행복 한 단에 얼마래유?’ 삶을 노래하는 가수
죽을힘을 다해 노래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 충전이라는 장사익. 그는 자동차도 반쯤 시동 걸어놓고 있으면 방전이 되지만 시동 걸고 쌩쌩 달리면 충전이 되는 이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집착과 다르다. 운동도 너무 죽기 살기로 하면 외려 몸이 망가지고 “못 쓰”듯이 집착하진 않는다. 다만 내면의 열정에,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삶은 고해라고 하잖여. 열 명이면 아홉 명은 억지로 하기 싫은 일 하면서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 유행가가 뭐야 고단한 세상에 위로주가 되어주는 노래지. 노랫말 한 소절에 눈물 흘리고 같이 따라 부르면서 아픔을 개운하게 다 잊을 수 있지. 내 노래가 그렇다고들 해. 나는 기생이야. 일어날 기, 날 생. 기운을 넣어주는 사람.”
충남 홍성군 광천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서울로 올라갈 때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받자와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탁기가 없다. 두 번 우려낸 녹차처럼 맑은 웃음이 시시 때때로 주름을 타고 번진다.
“내 노래 중에 희망 한단이란 노래가 있어.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 본다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나도 몰라요. 희망유? 채소나 한단 사가시유 선생님....’그 아주머니에겐 그게 희망이여. 행복도 희망도 멀리 있지 않아. 도 닦는 건 또 뭐여. 길 도(道)자거든. 길이 뭐여. 한 발자국 내딛으면 거기부터가 길이여. 외국 나가고 굳이 산속으로 들어 갈 것도 없어. 한발 한발 내딛으면서 열심히 사는 거지.”
도톰한 햇살의 마중을 받고 나오는 길, 그가 말한 행복의 리스트를 되짚어 본다. 똥 누듯이 개운하게, 맨밥처럼 덤덤하게, 4월 봄꽃처럼 예쁘게, 대보름처럼 창창하게, 죽음을 듯이 처절하게 그렇게 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