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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아픈 몸을 살다

마흔 이후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 특별히 약을 챙겨먹어야 할 질환이 없어서였는데, 그랬더니 몸에 무심해졌고, 무심하다가 와르르 망가지겠다는 신호가 왔다. 종종 숨이 가쁘고 골이 띵하고 몸이 꺼졌다. 7년 만에 검진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리 마치고 1~2주 후에 오라기에 날짜에 맞춰 예약을 했는데, 검진을 앞두고 또 생리를 하는 게 아닌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혐의는 하나였다. 갱년기, 생리불순. 두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는 손가락은 더디었다. 갱년기라는 말이 내 삶에 최초로 기입되는 순간, 속옷에 묻은 생리혈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나는 저 홀로 수치스러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13쪽).”

ⓒ시사IN 신선영


<아픈 몸을 살다>는 심장마비와 암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을 사유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대인이 자기 몸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빈곤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 생리불순 같은 일시적 증상부터 심각한 질병까지 아픈 얘기는 궁상이나 엄살, 약점이나 결핍으로 치부됐기에 너나없이 쉬쉬한다. 그럴수록 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 몸은 ‘의학의 식민지’가 된다.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 나는 앞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의심을 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기에 생리불순 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목소리는 목소리를 불렀다. 또래나 선배 여성들이 원래 그런다, 더한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수년 내 폐경이 온다는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배울 기회를 챙겼다. 인체의 신비는 여전히 모르겠어도 늙어가는 자궁의 변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번 검진에서 수면 내시경도 처음 받았다. 손등에 주사 바늘을 꽂고 위 운동 억제제, 목 마취제라는 야릇한 맛의 시럽을 삼키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커튼으로 칸칸이 구획된 곳으로 내시경 받을 사람, 받은 사람, 마취 깬 사람의 침대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 질서정연한 사람의 흐름에 나 또한 이름이 불려 끼어들어갔고, 눈을 떴을 때는 검사가 끝난 뒤였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봄날의책 펴냄

수면유도제 기운 탓인지 기분 탓인지 몽롱한 가운데 말소리가 들렸다. 옆 칸 침대의 남자 어르신은 혼자 갈 수 있다며 몸을 일으키고, 간호사는 연세가 있어서 위험하며 보호자가 와야 나갈 수 있고 혼자 가려면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비용이 1만원 든다고 했다. 실랑이가 길어졌다. 저 어르신은 보호자가 없는 걸까, 1만원이 없는 걸까. 둘 다 없는 걸까, 둘 다 있지만 의료 체계에 저항하시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로 보호자를 대동할 수 없는 환자가 분명 있을 텐데 어쩌란 말인가. 

질병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다

아프거나 아팠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두 노인네 밥 먹고 병원 다니는 게 일이라고 한탄하는 시부모님,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받은 아버지, 전신 마취하고 디스크 수술을 한 남편. 큰 수술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병원 침대에서 느꼈을 고립감과 “더는 젊지 않은 자신과 헤어지는 일(148쪽)”의 처연함을 너무 몰랐다. 나의 반성과는 별개로, 아픈 사람을 “가족의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존재(197쪽)”로 만들고 질병을 개인의 성격이나 건강관리 부주의로 돌리는 사회 현실에는 분개한다. 

“질병이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202쪽)”고 하니 감내할 건 감내하고 싸울 건 싸우면서 몸의 일기를 기록해야겠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생리가 규칙적일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김훈이 쓴 산문집 <풍경과 상처>의 첫 문장,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의 패러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