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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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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미나 4-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오후 6시. 세미나실에 사람들 들고 나는 시간. 문학세미나가 끝나고 시세미나가 열린다. 방에서 나오던 가연이 카페 테이블 위 시집을 쥐어든다. “와, 이거 멋지다.” 제목을 적겠다고 볼펜을 꺼내려다가 스마트폰으로 찍기로 했다. 옆에 있던 유정과 나는 얼결에 모델대오로 포즈를 취했다. 시집팔이소녀. 매혹적인 언어의 조합을 팝니다. 장석남의 것. 시세미나 시즌1 ‘올드걸의 시집’ 열권을 선별하면서 끝까지 망설인 시집이다. 넣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단 한 편의 시가 너무 아름다운데, 나머지는 미궁이다. 사실 그가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아주 빼어나거나 통찰이 남다르지는 않다. 근데 시집 전체에 긴장이 흐른다. 낡은 풍경을 심상하게 그리는데 이론상 쉬워야하는데, 의미가 모아지지 않고 미끄러진다. 바늘귀에 들어가..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 내 품에서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시집 , 문학과지성사 삼사십대 남녀 다섯이 인사동에서 모였다. 전시를 끝낸 지인의 뒤풀이 자리다. 조곤조곤 수다 떨며 와인 한잔 마시는데 마흔 지난 남자가 물었다. “내 나이에 사랑을 하는 게 좋은 거야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여자들이 개구리합창처럼 답했다. “당근 하는 게 좋지..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마음 그늘 빌려서 잠시 살다가는' 국화꽃 가을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 장석남 시집 문학동네 겨울하고도 흐린 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살얼음 낀 바람이 불지 않았고 쌀쌀하지도 않았으나 이제 가을비라고 말하지 않는다. 포털화면에 뜬 ‘겨울비’ 뉴스 자막을 보고 가을이 홀연 떠났음을 알아차렸다. 11월 가기 전에 가을 먼저 갔다. 그래서 그랬나. 거리에 낙엽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길 때는 봄처녀 가슴 부풀어 오르듯 안절부절 못하겠더니 요 며칠은 마음 없이 산 거 같다. 세상과 연결된 코드를 빼버린 것처럼 적막했다. 몸에서 가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