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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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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저녁식사 모처럼의 불금. 친구 넷이 만나 밥과 술을 먹었다. 밤 9시가 넘자 “엄마 언제 오냐”는 전화가 번갈아 걸려오는 애 있는 여자들이다. 우리는 무더위를 어떻게 났는지 여름 안부를 주고받았다. A는 반바지 일화를 꺼냈다. 하루는 너무 더워 사무실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타부서 선배가 지나가며 한마디 하더란다. “그렇게 짧게 입고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A는 이혼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라서 대충 웃고 넘기려다 그냥 말했다고 한다. “저 남편 없는데요?” B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절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B는 지난주말에도 태백의 절로 떠났다. 옆방에는 60대 중년부부가 묵었고 오며가며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부인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묻더란다. “이렇게 혼자 다..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시집 , 문학과지성사 시 ..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여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시집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
사랑의 감옥 / 오규원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