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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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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의 고통 동대문 노동을 떠올리면 눈물이 찬다. 발원지는 동대문이다. 2005년, 남편의 투자실패로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살림을 줄였다. 나의 형편을 딱하게 여긴 시숙부가 어떻게든 돕고 싶어 했다. 나를 부르시더니 당신이 운영하는 섬유회사의 정규직 자리를 권하셨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아이들이 학교 끝나서 돌아오면 집에 있는 엄마이고 싶다”며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하는 파트타이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시숙부는 바로 아르바이트자리를 만들어주셨다. 동대문종합시장 매장에서 매일 전표를 가져다가 계산하고 다음날 다시 가져오는 일이다. 집에서 동대문까지 왕복 2시간, 업무처리에 1시간 정도 소요됐다. 월급으로 100만원을 받았다. 후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지게꾼 그즈음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낯선 존재와 소통하기 # 1. 코뮨은 다양체 매주 화요일에 R식구들끼리 회의를 한다. 이번 주는 금요일 쥐 그래피티 선고 공판, 그 이후 국면 대책을 논의했다. 기소자 2명이 입장이 달랐다. ‘나는 즐겁다 끝까지 싸우겠다’와 ‘나는 피곤하다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당사자를 비롯해 남녀로 편이 갈렸다. 그래피티 사건이 법과 예술의 대결구도가 됐고 우리가 잘못한 게 없으니 현장정치 공부도 할 겸 끝까지 가자는 남자들, 지금까지 싸운 것으로 충분하니 지리멸렬하게 끌지 말고 한 명이라도 원하지 않으면 다 같이 끝내자는 여자들. 둘 다 일리 있다. 필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묘했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남자의 무한정복욕망과 여성의 정서공감능력이 확연히 드러났다. 지난주 일이다. 난 회의시간이 다 되어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장의 배치가 ..
친구와 동무 쓰던 번호 그대로. 십년이 넘었다. 핸드폰 개통 당시 번호를 지금껏 쓴다. 딱히 바꿀 기회가 없었다. 얼마 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때 친구다. 혹시나 해서 연락했다면서 대뜸 타박이다. “야! 아직도 016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옛날 애인한테 전화 올까봐 번호 못 바꾸고 있냐?” “흐흐.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 그런 낭만적인 일이 생기면 참 좋겠구나.” 모처럼 이년저년 해가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말이 씨가 된 걸까. 며칠 후. 옛날 애인은 아니고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선배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내친 김에 만남까지 성사됐다. 3년만의 재회. 우리는 방금 전화 끊고 만난 사람처럼 따끈따끈한 대화를 이어갔다. 좋아하는 선배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떨어져 지내면 잊어버린다. 문득 보고 ..
남을 이해하고 내 자유를 복원하는 '생존형 독서' 가끔씩 아침 일찍 책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지나 내린다. 내가 즐겨 찾는 콩다방은 H사 건물 1층에 자리했다. 집 앞에 별다방 맥다방 다 두고 굳이 버스까지 타고 출장을 가는 이유는 한적함이 좋아서다. 로비 구석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고 규모도 아담하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고 쏟아져 들어오는 12시 반 전까지는 절간처럼 조용하다. 삼면이 커다란 통유리다. 살구빛 볕이 들어차고 포근한 음악이 융단처럼 깔리고 거의 사약 농도의 까만 커피의 짙은 향이 번지는 지복의 환경에서 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등을 굽혀 책장을 넘기곤 한다. 그날도 들기름 발라 김을 굽듯 한 장 한 장 햇살에 책장을 굽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영화 보러 갈래요?’ ‘아, 무슨 장르인가요?’ ‘코미디요.’ ..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니까 거리, 도서관, 모텔, 버스, 술집...기억에 남는 장소다. 남편과의 연애는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 주말마다 집회에 같이 나가고 술 마시는 자리나 공부할 때나 항상 옆에 있었다. 사노맹에서 하는 무슨 강좌에도 손잡고 다녔다. 종로 어디쯤 골목길 같은데 장소와 배운 내용이 하얗게 지워졌다. 낡은 책상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랑 옆자리 남편의 착한 웃음만 흐릿하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했다. 잉꼬 같은 동지였다. 그 시절엔 그랬다. 며칠 전 다퉜다. 이과지망생 아들한테 남편이 ‘너 카이스트 가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다. 세 명이 자살했을 시점이다. 나는 순간 발끈했다. (물론 성적도 안 되지만) 그 죽음의 소굴에 왜 아들을 넣으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남편이 자살은 어느 대학이나 있는데 한겨레가 부풀려 보도했고 ..
글쓰기의 최전선, 만남의 최전선 글쓰기 수업을 두 번 마쳤다. 그 사이 시아버님이 ‘일과성뇌허혈’로 쓰러졌다가 열흘 만에 퇴원했다. 뇌경색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마비는 없다. 가슴이 철렁했다. 존재를 고민했다. 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병원 몇 번 드나드는 것쯤이야. 헌데 그냥 서글펐다. 나는 기차시간표처럼은 살 수 없는 인생인 거 같아서다. 예외상태가 정상상태인 그런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잔잔하다가 휩쓸리다가 가라앉다가 떠내려간다. 바다가 집이다. 글쓰기 수업은 재밌다. 사람 만나는 일은 비슷한가 보다. 집단 인터뷰하는 느낌이다. 귀 쫑긋. 토끼처럼 듣고 참새처럼 떠들고 애인처럼 교감한다. 에너지가 엄청 쓰인다. 일 하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나면 봉인이 풀리는 듯 피로가 확 몰려오는 증상까지 인터뷰랑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