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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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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성의 탄생 여성들의 글쓰기에 관심이 갔다. 자본주의 역사보다 20배가 더 긴 모성의 역사.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살아온 여성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했다. 세상을 바꿔야할 이유가 없는 남성의 언어로 여성의 삶은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 삶을 이해하기도 설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여성의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네 카페에 가면 머리 맑은 아침부터 엄마들이 둘러앉아 답도 없고 끝도 없는 학원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저 모임이 주부들 독서토론 모임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자식을 향한 일방통행로에서 자기에게로 삶의 물길을 돌리면 엄마와 아이가 더 행복해질 텐데 생각했다. 때마침 여성민우회생협에서 일하는 후배가 글쓰기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문제는 거리가 ..
쉬운 글이 멋진 글이다 학교나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글 쓸 일이 종종 생긴다. 새 학기에 어떤 담임선생님은 자녀에 대해 참고할 사항을 써달라며 백지를 보낸다. 하얀 종이를 앞에 두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나도 순간 난감하다. 다른 엄마들은 어떨지 괜히 염려스럽다. 글쓰기가 확실히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여러 생각이 붓을 가로막는다.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 ‘뭘 쓸까’하는 막막함이 가장 크다. 왜 글을 잘 쓰고 싶을까. 아니, 글을 잘 써야한다는 건 누구의 생각일까. 내 생각에 영어광풍, 외모지상주의와 비슷한 과열현상이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에서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글에 부과된 권위는 지나치게 크다. 글이 곧 인격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고 자기표현이 서툴면 지적인 능력을 의심받는 분위기다. 그러니 ..
단어를 채집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아름다운 문장 한 줄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빼어난 문장이다. 독창적인 글쓰기의 묘미가 한껏 드러난다. 사랑한다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야 문학작품에서 늘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새롭다. 덤덤하면서도 절절하다. 나는 읽으면서 내가 그가 된 것처럼 어색해서 고개 숙이고 입술을 비틀었다 폈다 했다. 저 문장의 핵심단어는 ‘국어’같다. 흔해 빠진 말인데 사랑, 어색과 배치되니까 신선하다. 색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더군다나 하나도 꾸미지 아니한 담백하고 솔직한 아이 같은 표현의 어른스러움이라니. 좋은 문장은 어려운 단어나 고급한 개념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평범한..
주어와 서술어는 연인이다 一文一思 (one sentense one idea) 글쓰기 말고 글 고치는 일을 했었다. 원고 리라이팅. 교정과는 조금 다르다. 읽히지 않는 글을 읽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탈자 수정은 물론 단어 교체, 문장 삽입, 문단 위치 변경 등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가 이뤄진다. 사보 기획자의 부탁으로 시작했다. 사보에 넣을 임직원 원고를 고치는 일이었다. 대부분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인데 상태가 심각했다. 딱딱한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문장이 엉켜서 주어가 실종되기 일쑤였다. 앞에 한 말 뒤에 또 하고 중구난방에다가 결론도 모호했다. 견적이 안 나와서 울고 싶은 적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새로 쓰고 말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할지 막막했다. 계속 하다 보니 나중에는 요령이 생겼다.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문..
같은 표현을 두 번 쓰지 마라 접속어 12매 분량을 써야하는 원고가 13매 써졌다. 원고 1매를 줄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두 세 문장을 덜어내는 것도 있지만 글의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접속사’와 ‘반복어휘’ 걷어내기다. 그냥 보면 안 보이는데 고르자고 작정하면 여기저기 박혀있는 접속어가 눈에 띈다 . 접속어가 많으면 글이 딱딱해지고 논리적, 설명적이 된다. 철학책을 생각해보라. 접속어에 자꾸 걸려서 글이 매끄럽지가 않다. 논조를 따라가기 어렵다. 나는 철학책에 한 줄 걸러 등장하는 접속어가 거슬려서 - 안 그래도 내용도 어려운데- 몰입에 곤란을 겪곤 했다. - 이상은 현실을 견디는 진통제다. (그러므로) 이상이 크고 높을수록 어지간한 통증은 다 녹아들어 간다. -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군살을 제거하라 글의 목적이 과시가 아니라 소통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간소한 글이 좋은 글이란 얘길 했다. 글쓰기 실력은 필요 없는 것을 얼마나 걷어낼 수 있느냐에 비례한다. 이것을 안(못)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뭐가 불필요한 요소인지 ‘무지해서’이고 나중에는 ‘귀찮아서’이다. 아. 찔려 -.-; 일단 습관을 들여놓아야 한다. 나도 한 1년 동안은 글을 쓰고 인쇄해서 모나미 적색볼펜으로 고쳐 버릇했다. 다 걷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나중에 인쇄물을 보면 또 거슬리는 단어들이 있었다. 아무쪼록 꾸준히 하면 문장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다. 첨삭지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괄호 치기를 권한다. 글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든 요소에 괄호를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따로) 틈을 내서 -> 틈을 내서 ..
소통인가 과시인가 “나 글쓰기 좀 가르쳐 주라.” “그러고 싶은데.......어느 시인이 그랬거든. 효모에게 술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시 쓰기를 가르칠 수 없다고. 난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더군다나 내가 야매로 글쓰기를 배웠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가르쳐줘야할지 모르겠어.” “그런 거 말고!” “그래. 뭐 기본적인 기사작성법 같은 건 알려줄 수 있지. 가르쳐줘? -.-;;” 얼마 전 친구와 나눈 대화내용이다. 요즘 들어 글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잦다. 그럴 때면 두 마음이 다툰다. 하나는 “진정 온갖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고 싶다”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 가르쳐줄 처지인가” 이다. 그러던 중 이 딜레마의 해결방법을 찾았다. ‘가르친다’ 대신 ‘나눈다’로 의미를 재규정하는 것이다..
<왕필의 노자주> '상선약수, 물처럼 써라' 본디 성인의 말씀이야 이롭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삶의 한 능선을 넘는 즈음, 마흔 목전에 접한 노자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노자는 에서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무위사상을 펼친다. 행하지 않으면서 행하고 爲無爲, 무사의 마음으로 일하며 事無事, 무미의 마음으로 맛을 보라고 말한다 味無味. 자연이 그러하듯 ‘검박하게 순리대로’ 살라는 말일 게다. 를 공부한 기념으로 (글써서 밥 벌어 먹는 사람으로서 심기일전 차원에서) 노자의 가르침을 ‘글 쓰는 태도’에도 적용해 보았다.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우러나온다. 그 순환구도를 생각하면 '잘 사는 법은 곧 잘 쓰는 법'이기도 하다. 무위를 행한 글쓰기. 쓰지 않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낮은 곳까지 스며라 노자는 ‘세상에서 가장 최상의 선은 물로 형용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