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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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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 눈보라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내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사람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면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같은 위도 위에서 / 황지우 지금 신문사에 있거나 지금도 대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잘 들어라,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잘 먹음과 잘 삶이 다 혐의점이다 그렇다고 자학적으로 죄송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발 좀 그래라) 그 속죄를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도 나는, 간신히, 한다 간신히하는 이 말도 지금 대학에 있거나 지금도 신문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못 한다 안 한다 그래도 폴란드 사태는 신문에 난다. 바르샤바, 그다니스크, 크라코프, 포즈난 난 그 위도를 모른다 우리가 그래도 한 줄에 같이 있다는 생각, 그 한줄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마루벽의 수은주가 자꾸 추운 지방으로 더 내려간다. 자꾸 그곳으로 가라고 나에게 지시하는 것 같다 산다..
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아,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 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선(禪)적인 것이 신(神)적이고 시(詩)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 황지우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쳐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파묻는다 나의 증거 인멸을 위해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 - 황지우 시집 , 문학과지성사 눈에 밟힌다. 그 아이. 내가 살면서 본 뉴스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되었다. 우연히도 요 며칠 나의 화두는 ‘엄마’였다. 아는 선배가 엄마를 주제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해서, 화가 났던 참이다. 사진을 보고 말했다. “저 중에는 비혼이거나 자식 없는 중년 여성도 있을 거 같은데...” 사람들은 나이든 여자를 다 엄마로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어른 남자들이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애잔하고 죄송스러운 엄마를 호명..
논 / 황지우 '살고싶다 별안간' 큰비 물러간 다음, 논으로 나가 본다 창평 담양 일대의 범람이여 논은 목숨이다 농부님은 이 숨 넘친 水平에서 자신의 노동을 뺀 생산비 이하의 풀포기들을 일으켜, 그래도 어쩌야 쓰것냐 살어라 살어라 하신다 멀리 제비들이 그에게 경례 한다 아픈 내 몸이 안 아프다 왜 그러지 물 위로 간신히 밀고 나온 연둣빛을 보니 살고 싶다 별안간 - 황지우 시선, 민음사 고속버스 타고 가는 길.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사선으로 아슬아슬 달라붙어 있다가 점점 미끄러지더니 가차 없이 몰락한다. 고 여리고 투명한 것들의 맹렬한 몸부림의 경연장에 내 얼굴은 희미한 배경으로 설정돼 있었다. 머리를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난줄 몰라봤다. 유리창 안쪽에 간당간당 매달린 나. 빗방울처럼 혼자인 나 또한 언젠가 형체..
길 / 황지우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시집 < 게 눈 속의 연꽃> 밤길은 두렵다. 겨울밤은 어둡다. 헤매기 십상이다. 역시나 그랬다. 제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남편은 늦게라도 송년회에 가야한다고 먼저 따로 나갔다. 혼자서 뒷자리엔 애들을, 트렁크엔 김치를 싣고 출발했다. 시댁에서 집으로 가는 길, 수지에서 목동까지 수년간 수십 번을 지나갔는데 헤맸다. 판교IC 타는 곳을 놓쳤더니 영판 낯설다. 왕복 8차선 도로에 지나가는 차가..
11월의 나무 / 황지우 -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황지우시집 문학과지성사 인생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11월을 좋아했다. 외로운 나그네 둘이서 언덕을 넘어가는 쓸쓸한 형상이 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