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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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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장례식 “엄마, 오늘 하리 죽은 지 24일째야.” 딸아이가 무심히 말했다. 하리는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다. 아니다. 키웠다고 말하기엔 해준 게 없다. 심지어 나는 얼굴도 몇 번 못 보았고 쓰다듬어 보지도 못했으니까. 나는 그간 애완동물을 키우자는 아이들의 집요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키우는 건 너네로 족하다’고 공언했다. 집에 화초 한 포기 갖다 놓고 물주는 일도 내키질 않았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우주를 떠받드는 일과 다르지 않았기에 개나 고양이 털 한 올이라도 더해진다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들의 친구가 기르던 고양이가 왔다. “생후 10개월 밖에 안 됐는데 두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고양이가 딱하다”는 말에 나도 맘이 흔들렸다. 아들은 용돈을 아껴 사료비를 대고 대소변을 치우는 등 정서적..
비 / 황인숙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 황인숙 시집, 문학과지성사 일요일에 성묘를 갔다왔다. 집에 두고 간 핸드폰에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뭔가 봤더니 추장 부친상 소식이다. 가슴이 덜컹했다. 며칠 전까지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기위해 일산 근처로 이사해야할 것 같다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뭐 그런 얘길했었다. 아버지가 오래 아프셨다. 27년 정도. 예전에 추장 인터뷰할 때, 아버지 얘길 꽤 길게 했었다. 아버지가 막내인 그를 유독 예뻐했고 아버지에게 업혔던 따뜻한 등을 기억하고, 중3때부터 아팠던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한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화학과를 지원했고 등등. 그 나눠가진 기억 때문인지 마음이 아팠다. 여러가지 이유로 심란했다. 작년 언제인지는 모르겠..
해방촌, 나의 언덕길 / 황인숙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됫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 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급. 경사길.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해방촌과 이별했다. 짐차를 보내고 정수샘 차로 비탈길을 털털털 오르면서 친히 호명했다. (구)정일학원 안녕. 용왕정김치찌개집..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 황인숙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 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이십대는 아름다운 나이다.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에서 느낀다. 내가 이십대를 지날 때는 ‘이십대’에 관심이 없었다. 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니 이제야 이십대가 보인다. 나의 이십대 막바지부터 연을 맺어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태지매니아 친구들. 불 같았다.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몰랐다. 어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