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체인가

[니체의답안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견디면서 누렸다.

자주색 하드커버의 무거운 책.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에 움찔했다.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근면이 도피책이고 도덕이 독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 같은 날들이 스쳤다. 정확한 뜻과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에게서 거대한 사유의 전복이 이뤄지고 있음을, 갈피마다 행간마다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멋스러운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념 과잉의 언어.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말들.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 삶을 위한 시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 이거였구나! 아이들 둘 키우고 집필 노동하면서 거기다가 공부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보니 등골이 휘는, 서른 후반 나의 존재론적 뒤척임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백 년 전 니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에 팍팍 꽂히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은, 살아있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힘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창안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규정했고 힘 관계로 생성을 설명했다.

니체는 하룻밤에 읽는혹은 ‘30분 만에 읽는으로 요약 불가능한,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처럼 순수와 영원을 탐구하고 개념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일상과 멀어지는 사유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 세속의 장을 특유의 문체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결을, 니체는 감히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또 얼마나 모던한가.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들을 추구해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니체는 진리의 노예이길 거부했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가 힘을 갖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것이 진리라고 했다. 삶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는 니체는 뼛속까지 삶의 철학자. 그래서 이 세계를 거부하고 저 세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비판하면서 신의 죽음을 고지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의 죽음은 중요했다. 니체가 말하는 은 그리스도교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에 복무하기보다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 등 이 시대의 모든 자명성을 으로 아우른다. 즉 니체에게 의 반대개념이다. “신이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신을 부정한 니체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친절히 안내한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

# 니체와 글쓰기

니체 철학을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구도로 접근하니 텍스트의 초점이 조금씩 맞춰졌다.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이것.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래서 삶은 질병이고,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니체는 비판하면서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하나의 병증일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나의 본능, 나의 욕망, 나의 충동에 관심이 쏠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고급한 충동으로 고귀한 욕망으로 신체를 잘 가꾸어야 건강한 삶이 가능함을 배웠다. 이러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무지, 나의 삶의 무능을 통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일찍이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나부터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일들에 휩쓸리다보면 내 정신은 뒷전이다. 주위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으로 살기보다 사장님 정신, 학원장 정신, 목사님 정신, 연예인 정신, 보험설계사 정신 등 각종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계획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처방.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은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들. 헛된 열망들. 오랜 집착들.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삶이 불만스러울 때, 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때, 니체의 표현대로 과거라는 돌덩이를 굴릴 수 없어 답답할 때, 나는 글을 썼다. 니체가 일러준 두 가지 가치평가의 척도. 자기보존인가, 자기초극인가. “그냥 살지?” “한번 해봐?” 두 마음의 난투극을 지켜보았다. 쓰면서 물었고 쓰면서 버렸다.

어쨌든 쓰고 나면 삶에서 집중해야할 문제들이 선명해졌다. 니체에게 훔친 아름다운 표현 하나, 문장 한 줄 벽돌처럼 끼워 넣고 싶어서 사유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니체와의 글쓰기는 파괴-창조의 유희를 선사했다.

 # 철학적 오페라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즉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했다. 어떤 우월한 사람이 구현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를 돌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로 말이다. 니체는, 그리고 글쓰기는 짧은 보폭이라도 나를 넘어서는 과정에 기여했고 삶의 벡터를 조금씩 틀어주었다. 내가 니체라는 연료를 넣지 않았더라면, 글쓰기라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장은 텅 비었으면서도 짭짤한 연봉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공부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일, 번듯한 학위도 내세울 경력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일, 니체를 읽고 글 쓰니까 좋더라며 손 내민 일...그렇게 용기 내어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면,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임러)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본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처음 <차라>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뿐이거늘이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진하게 그어두었다. 그 문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유행가 가사에 기대듯이 나는 니체의 말에 위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니체가 죽음의 설교자들에게비난하는 말이었다.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고 조롱한다. 나중에서야 그 뜻이 보였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른 게 보인다. 그것이 묘미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선과 대화와 감성이 어우러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가, 들뢰즈 말대로 철학적 오페라가 되리라 기대한다.

 

* 어쩌다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니체가 어떻게 나의 글쓰기를 자극했는가에 관한 고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을 시작하며 써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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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구마구 [2013.04.18 2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학자의 저서를 읽으려면 머리가 많이 부지런해야 되잔아요. 철학책을 읽으면 쉽게 피로해져요.ㅋㅋ. 몇장 못읽고 덮게되더군요. 아마도 그 대표작이 차라투스트라씨 얘기.ㅋㅋ. 고전은 누구나 내용을 알고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던데.ㅋㅋ. 차라투스트라는 내용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던데. 아마도 은유씨는 차라투스트라와 딱 맞는 인연이 작용했나봐요^^

    • 은-유 [2013.04.20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책이라기보다 문학책이기도 해요. 그 부분 때문에 저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칸트나 헤겔처럼 순수관념론자 책은 읽다가 포기했어요. ㅋ

  2. [2013.04.19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3.04.20 0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간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책보다 모순과 비루함과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게 좋은 책이죠. 필로폰네소스 전생사 사무실에도 있던데, 선생님 글 읽으니 저도 보고싶네요. ^^ 늘 지적 자극을 주시는 ^^

  3. 천마산 [2013.04.22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우며 가르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이 '삶'에서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는군요. 나이를 먹어가나봅니다. 근데 니체 너무 어려워요^^

    • 은-유 [2013.04.23 08: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자님이랑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다니 나이를 먹어가는 걸 느끼네요. 세월의 힘이 무섭;; ㅎㅎ 니체가 어려워보이는데 초점만 맞추면 의외로 단순한 측면이 있더라고요. 뭐 저도 헤매지만 ^^;

  4. 프루시안 [2013.04.23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체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반가우네요.^^ 치열하게 파고들때가 생각이나고 그로인해 맑았다 흐렸다하기도 했던..ㅎ ㅎ 처음엔 어려워서 둘러갔어요 지브란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를 통해 그리고 나이미의 미르다드를 거치면서 짜라투스트라에 접근했더니 용이하더군요.. 늘 이 곳에 계셔서 감사한 마음 놓고 갑니다. 건강하시구요~!

  5. 까탈 [2014.01.04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천국은 다른 곳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삶의 방식의 변화라는 말이 가슴에 꽂히네요. 혹시 짜라투스트라 추천해주시고 싶은 버젼 있으신가요? 옮긴이가 몇 명이라서요.

  6. 온화한 사람 [2015.11.10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체, 너무 큰 나무라서 올라기보다 바라보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가끔 그늘 아래에서 쉴 수만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7. [2017.06.16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니체와 함께 한 11월

[니체의답안지]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것인가, 과연...가을강좌 모집도 끝나고 연말이 다가오는 어수선한 11. 개강시점으로 참 애매한 때다. 근데 공부를 꼭 3월이나 9월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나의 준비가 그때서야 완료됐으므로 공지를 띄웠다 

참 이상한 기다림. 연애할 때 전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한다. 내가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이 얄궂음을 당하는지, 며칠 동안 후회했다. 나를 외부에 개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폭풍마감은 아니고 가랑비에 젖듯이 열다섯 명이 찼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 글쓰기의 최전선 12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강의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위안, 계속 헛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허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차라투스트라 말고도 두꺼운 니체저서를 다시 뒤적여야했고 난해한 니체의 언어에 짓눌릴 때,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또 번뇌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난리인가. 대충 살지, 나도 참 애쓴다... 근데 그 터널만 지나고 나면 또 반짝 살만했다. 빈대떡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 대범함과 심약함의 진자운동.  

흔들리는 소리가 학인들 사이에서도 들린다. “, 이렇게 써도 되나요?” “이게 맞나요?” “니체 원전을 더 읽고 차라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요?”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을 강요해온 교육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니체를, 니체의 위험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론적 정합성을 따지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모델을 찾으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 니체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단아다. 불친절함의 최고봉은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러니 문학적 감수성과 독해력이 없으면 삶의 경험치가 적으면 읽기가 힘들다. 니체도 말했다. “차라투스트라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삶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몇몇 문장에 도취되지 말고 반드시 자기의 사유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차라를 읽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제안했다. 나는 이 수업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과 지식이 어우러지는 철학적 오페라를 기대한다고 

거창한 출사표. 과한 의미부여가 때로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지식-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삶에 대한 나의 선호. 다른 세상에 대한 나의 눈물겨운 동경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어떤 책을 읽든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앎이어야하는가’ ‘나는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보학 관련해서 푸코 책을 뒤적이다가 나의 원초적 물음에 응하는 빼어난 문장을 만났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성의역사2>







Chopin's Waltz Brilliante Op. 34, No. 1 in A Flat Major by Lang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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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초록 [2011.11.18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유너머에서 고병권 선생이 스피노자를 불어로 읽었다고 인용하는 구절에서, 정말 그는 불어로 스피노자를

    읽는가 순간 의심했고, 그렇다고 3개월 죽도록 읽고 나니 글이 보였다는 말에 촉발되어 시작한 불어, 그는

    그 말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촉발시켰는지 몰랐겠지만 그렇게 시작한 불어 공부가 이제는 사전을 찾으면서

    동화를 읽기도 하고 분노하라를 더듬거리면서 읽기도 하고 야수파에 관한 논의를 더듬거리면서 따라가게

    되었네요. 물론 더디고 더딘 걸음이지만, 금요일 오페라 모임에 가기엔 하루가 너무 복잡해서 못 간다고

    연락하고 마일즈 데이이스를 틀어놓고 월요일치 예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앗, 여기까지 그러고 조금은 쉬고

    싶다는 생각에 원두커피 티 백을 하나 꺼내 커피 마시면서 놀고 있던 중에 들어와보니 니체 강의 이야기가

    올라와있네요.

    신문보기가 겁나는 시간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매일이 새롭고 신선하다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하루 하루를

    살기도 하는 분열하는 존재, 그래도 역시 살아가야 한다면 생생하게 하루 하루를 느끼면서 살고 싶다고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면 폐교에 방을 하나 구해서 운동장에서

    여럿이 어울려서 운동도 하고, 방안에 작업실을 꾸면서 못하지만 하고 싶은 그림도 그리고 어울려서 악기도

    연습하고,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재미를 나누어주고 싶기도

    하다고 요즘 꿈을 꾸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요?

    • 은-유 [2011.11.19 0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폐교계획 근사해요~말씀하고 다니세요. ㅎㅎ 신문에서 매일 심란한 기사만 보다가 오늘은 로펌변호사에서 참여연대 간사로 간 분 인터뷰기사 보고 모처럼 마음이 좋았네요. 화폐축적욕망에서 벗어나 자기의 좋은 삶을 가꾸다보면 세상도 좋아질 것 같아요. ^^

  2. 마구마구 [2011.11.19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해도 나빠질게 없는 자유라... 좋네요.ㅋ. 축하합니다. 일신우일신 하시네요. 난 어제밤에 드디어 뜨개질 목도리 완성! ㅋㅋ. 눈감고도 뜰 수 있을때까지!!!

  3. 천마산 [2011.11.22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전 마누라 손에 이끌려서 '모래사원'이라는 이탈리아 밴드의 공연을 보러갔었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45분짜리 곡이 연주되었는데 그 감흥이 다시 생각나네요. 나이를 먹어가나봐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이제 머리의 생각보다는 가슴이 먼저 느끼네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삶과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연습이 더 많이 필요한가 봐요. 당신의 글을 보면 늘 내가 초라해짐을 느낍니다.^^. 공부해야지...^^

    • 은-유 [2011.11.22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자님 음악회도 보러가시고 멋진 걸요~ 차라투스트라라니 궁금하네요. 공부해서 열심히 실어나르겠습니다. 뭐라도 나눌 게 있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ㅎㅎ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썼다"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의 글은 시적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특유의 운율에 녹아있습니다. 짧은 경구와 비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니체가 독자를 선별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 시적인 니체의 글은 내가 원한다고 읽을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물음을 가졌을 때만, 그 절실함의 강도만큼 문장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힐 것입니다. ‘나는 니체를 읽었다가 아니라 니체가 나를 습격해왔다! " 니체와의 만남은 내가 낯설어지는 체험이고 삶을 창조하는 실험입니다.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좋은 글쓰기 교과서입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메시지, 치밀한 비유와 유려한 문체는 폭풍과도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실제로 출간 당시 고도의 문체연습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인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내려온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니체철학을 살펴보고 나를 찾는 글쓰기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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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삶의 입구

[글쓰기의 최전선]



시 낭독회 풍경을 기사로 써보세요.” 지난시간 돌발과제를 내주었다. 그랬더니 수업시간에 엄청 조용했다. 한 사람이 시를 낭독하고 소감을 발표할 때면 사각사각 볼펜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을 깨는 말말말. 그렇게 생각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당신에게 여행은 무엇이냐. 중저음으로 깔리는 물음들. 잔뜩 긴장한 표정들. 지금 청문회 아니니까 편하게 대화하라고 말하는데 웃음이 났다. 처음엔 다들 토시 하나 안 놓치고 열심히 적더니 나중엔 손놀림이 점점 느려졌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무척이나 기운 빠지는 일. 듣기도 어렵고 쓰기도 고되다. 나는 조심스레 예측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의 편집은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반만 맞았다. 의외로 대동소이한 글들. 예비작가들은 자기 육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일에 서툴렀다. 여행, 죽음, 학창시절 추억 등 스토리가 강렬한 에피소드, 즉 기억하기 쉬운 사례는 모두의 글에 빠짐없이 등재됐다. 시에 대한 인식변화 역시 공통으로 언급했다. 대학시절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를 읽었으나 해석하기 급급했고 기형도는 지적 허영같아 멀리했다는 정연씨. “처음 해 본 낭독회는 내가 미처 놓친 시들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감정의 다른 결을 가진 사람들이 들려주는 고유한 풍경에 흠뻑 취해도 보고, 한편 스스로에게 감정을 이렇게 드러내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그런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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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구마구 [2011.05.30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형도의 시가 '지적 허영'같았다니...정말 사람마다 다르게 시를 읽고 시인을 받아들이는 것 같네요.^^ 그런 차이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좋은 수업이네요.

  2. gaon1981 [2011.05.30 1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해 주신 시집들, 모으고 싶네요. ㅎㅎ
    전 최승자 언니의 최근 시집<쓸쓸해서 머나먼>도 잘 보고 있어요. :)

    • 은-유 [2011.05.30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 판단이니 너무 믿지 마시길;;; 훑어보고 사셔요. 최승자 시집. 제목도 멋져요. 쓸쓸해서 머나먼.. 미쳐나가는 세상 미친년으로 늙어가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는 일이 왜 이리도 쓸쓸한지..

  3. [2011.05.30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1.05.30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심보선과 문태준. 두 70년산 오빠들을 빼야해서 안 그래도 섭섭했어요.ㅎㅎ 나한테 없는 시들 찾아읽어볼게요. 고마워요. 힘들어마시고. 제가 선택적 기억술을 활용할게요..

  4. [2011.05.30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2011.05.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연초록 [2011.05.30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달에 그렇게 많은 책을 사는 내가 그러고보니 이상하게 시집을 사지 않는군요.

    늘 시는 누군가가 올려주는 시를 읽는 선에서 만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시적인 인간이 아니야, 역시 나는 산문적인 인간인 모양이다라는 자학적?인 생각이 배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새롭게 생각하게 되네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으려고 퍼갑니다.

    • 은-유 [2011.05.30 2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청난 분량의 책을 습득하는 선생님에게 시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될 듯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외국어 공부를 못하는 이유랑 비슷하지 않을까요?ㅎㅎ 시는, 읽으나 안 읽으나 별 차이가 없기도 하거든요. 진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요..쓸데없는 짓 좋아하는 저한테 딱이에요.ㅋ

  7. 삐삐 [2011.05.31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는 진정 취향인가봐요.ㅎ 저는 산문시를 좋아하고 하이쿠 같은 시들은 시들해요. 그리고 그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들도 고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잘 들어오지 않고요.ㅎ 그런데 저는 박인환의 시구는 잘 들어오거든요, 특히 그의 한국전 이전의 시들이 좋고요, 백석의 시들도 좋고요, 뭔가 순진하고 맑은 사람들의 쉽고 정직한 시라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지우의 시는 무엇이 좋냐고 한국의 유명한 시인에게 물었던 적도 있어요.ㅎㅎ 그랬더니 대답이 잘 쓰는 시인이란 답을 들었습니다.ㅎ 시에 대한 저의 무지를 동정하는 듯 했습니다.ㅎ 최승자 시인의 시는 그대로 꽂히고요, 김혜순 시인과 유사성과 차이가 나죠. 한몸에서 실험되는 것들이 갈라져 나가는 현상이라 할까요. 그리고 제게 시는 언제나 수학단련 같이 언어, 사고, 감성을 훈련시켜주는 말그대로 문, 들어가는 문의 상징이 돼요. 너무 수단적으로 시를 대하는 걸까요. 좋은 시인들에게 늘 빚지고 미안한 맘 있고요. 저도 시 수업을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한 시간일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아라공의 엘사 시집을 매일 조금씩 읽고 있어요.ㅎ 소설 쓰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읽기는 최고의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은-유 [2011.06.01 0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는 취향이죠. 베스트놀이하는 게 죄송스러울 뿐. 열권 가려내고 나니까 속상해요. 저기에 빠진 시집을 더 안 좋아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제 생각에도 김현, 김수영, 황지우는 글 잘 쓰는 사람 같아요. 뱃심으로 글을 쓴달까? 맑스 읽을 때 드는 느낌이기도 하죠. 그런 글 쓰는 사람 부럽고 고맙고. 큰 위안이 돼요. 엘사시집도 궁금해지네요^^

  8. 마구마구 [2011.06.01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성주의자 내 친구. 김수영, 황지우 시의 여성관을 질색하죠.^^;; 여자는 창녀와 엄마밖에 모른다나. 김훈의 책을 읽고있었더니, 공격적인 면박! '넌 아주 마초 작가들 마니아네' 네가 여자란걸 생각좀해라' 아. 진짜~ 취향 다양해요.ㅜㅜ

중력의 악령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때,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표현을 쓴다. 세상의 짐을 혼자 걸머진 듯한 절망감에 휘청댄다. 이렇게 나를 자꾸 주저앉게 만드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중력의 악령’의 소행이라고 한다. ‘날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삶이 무겁고 고된 이유는 “우리가 요람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지참물로 넣어준 이것” 때문이다. 바로, 선과 악이라는 지참물. 정확히 말하면, 선악을 척도로 하는 가치관 - 도덕이다. 어려서부터 공기처럼 받아들여 온 ‘착하게 살자’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나날들. 아이 때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착한 자식으로,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한 착한 학생으로, 사회로 나가면 조직의 룰과 상사에 복종하는 착한 직원으로, 결혼해서는 착한 며느리로, 돈 잘 버는 착한 아빠로 살아간다. 나보다는 ‘남’의 도덕과 평판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낡아 빠진 자부심’, 선악이라는 지참물이 삶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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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별이 [2009.08.05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글이네요. 나이가 먹고 나서야 왜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었을가요..

  2. 이상식 [2012.05.17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생각이네요...도덕교과서를 차라투스트라로 한다는 것..^^

고통의 구원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우리는 살면서 시간이 역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해한다. 실연, 실패, 사고, 암 등 나에게 닥친 끔찍한 우연,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질질 끌고 다니며 부여안고 운다. 그렇게 고통은 과거에서 오고, 또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온다. 자식이 나중에 밥 굶을까봐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식과 불화하며 현재를 고통으로 몰아간다. 

이는 인간의 한계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살이는 다 그랬던 가보다. 현존의 의미, 즉 ‘산다는 것’이란 근본물음에 천착했던 철학자들은 사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이 고통이란 놈에 나름대로 고민하고 해법을 제시한다. 농부철학자 피에르라비는 ‘이전에 나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억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내 삶을 방해했다.’고 고백하면서 ‘영원한 순간’을 긍정하는 것에서 고통의 해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나는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시간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과거나 미래 속으로 내던집니다. 거기에서 고통이 오며, 그 고통은 우리가 현재 속에 살 때만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영원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 <농부철학자 피에르라비> 42쪽

니체 또한 ‘순간=우연=창조’를 구원의 키워드로 제시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지난날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것, 내게는 비로소 그것이 구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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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몸은 관념에 비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령 “당신만을 사랑할 테야”라는 사적 고백의 그 빛나는 초월도 끝내 비루한 안일의 체계 속으로 내재화하고 만다. 일상은 무엇보다 몸이고, 그 모든 고백과 의도는 잠시의 부유를 끝내면서 그 몸속으로 가라앉는다. 결심은 잦고 의도는 선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 김영민<동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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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가 없는 이에게 말하는 건 위험하다

[니체의답안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작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제목은 거의 다 아는 ‘고전’이다. 그런데 니체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다면 당황하기 십상이다. 니체에 대한 예비적 이해가 없을 경우 <차라>는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보임러A.Baeumler는 말했다. 이는 <차라>가 니체철학의 입문서가 아니라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마지막에 읽어야 좋을 작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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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인문학자 - 니체적인, 너무나 니체적인

[행복한인터뷰]

이른 아침, ‘연구공간 수유+너머’ 카페는 텅 비어 있다. 음악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곳은 얼핏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첫 장면처럼 스산했다. 커다란 창문만이 초여름 흐린 공기와 서울풍경을 덤덤히 담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왔다. 주인 없는 카페. 그래서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카페에서 그는 서툰 솜씨로 커피를 갈고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커피를 잘 내리는 사람이 해준 맛있는 커피를 먹고는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직접 해 먹기도 합니다. 뭐든지 그런 거 같아요. 잘 하는 사람을 통해 진짜 맛을 느끼고 좋아하게 되잖아요.”

어쩌면 그는 커피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커피’ 대신 ‘니체’를 넣으면 고스란히 고병권이 설명된다. 니체라는 쓰디 쓴 원액을 특유의 손맛으로 우려내 ‘니체의 참맛’을 선보인 장본인이 바로 그다. 고병권은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쓴 최고의 ‘유쾌한’ 니체주의자다. 저작 및 강연활동을 통해 철학책 속 니체를 ‘커피처럼’ 일상으로 불러왔고, 까칠한 니체를 ‘커피처럼’ 향기롭게 뽑아 숱한 나른한 영혼들을 일깨웠다. 그는 손수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곧 생애 첫 기억부터 내밀한 시간의 자락을 들추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마술처럼, 카페에 웃음이 솟고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골아이 고병권
“어린아이는 신성한 긍정, 순진무구한 망각,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다.” 

그는 열 살 이전까지 흙길을 밟으며 자랐다.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까맣고 평평한 땅, 신작로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던 깡촌 아이였다. 때문에 “MT를 가면 살아난다”. 나무 해오고 장작불 떼고 풀피리 불고 등등 자연을 무대로 활보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아서 앞에서 세 번째였지만 5학년 때 광주로 전학가기 전까지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의 전권을 쥘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숙제도 안 해오고 능청스럽게 자기공책에 ‘참 잘했어요’를 쾅 찍었다. “거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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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ppy [2008.12.01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장님 만나서 이야기듣고 있는 것 처럼 느껴져요.... 시도때도 없이 눈 퀭해지면서 눈물 나려고 해서 큰일이예요. 이글..... 남들이 읽어도 눈물 나는 글인가? ㅡㅡ;; 하지만 기분 좋은 눈물.... 고마워요~!! ^^*

  2. 쿨한인생 [2008.12.04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의 끝문장을 읽으면서 지금 이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추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여!!
    어느 누가 한 사람의 살아온 길을 이리도 맑은 유리알처럼 정리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개인소장용 원고로..
    고병권님!! 넘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