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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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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읽다 - 남해금산 서울 강남역, 정오의 해를 받아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들이 산처럼 우뚝하다. 마천루의 도시라도 온 양 감탄사를 연발하던 딸아이는 급기야 스마트폰을 꺼내 찰칵찰칵. “엄마, 여기가 강남이야?” 내 대답을 듣기도 전, 아이는 가장 기세 좋은 건물을 가리키며 어디냐고 묻는다. 저 일대가 삼성타운이라고 했다. 아이가 흠칫한다. 우리 집은 수년 전부터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자기는 저런 ‘화려한 건물’에서 일하고 싶다며 나를 힐끗 본다. 입사도 어렵지만 갈 곳이 못 된다고 난 일축했다. 아이가 재차 묻는다. “내가 삼성 안 가면 백수로 산다고 해도 반대할 거야?” 그때서야 빌딩 아래 비닐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반올림’ 농성장. 몇 번 지지 방문을 갔을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이성복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은 말 속에 갇힘 천국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홀례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지리멸렬한 행동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나는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가 되는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재색 담벽 나는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내 시에는 종지부가 없다 당대의 폐품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제가 나는 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자연 / 이성복 1 내가 자연! 하고 처음 불렀을 때 먼 데서 무슨 둔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전체가 鍾이야 내가 자연! 하고 더 작게 불렀을 때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내려왔다 네가 山이야 내가 자연! 하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 샘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나는 바싹 땅에 엎디어 남은 말들을, 조용히, 게워냈다 2 안개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모양도 지워지고 손짓만이...... 떨리는 손가락,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돌아서 무언가를 밀어젖혔고 그건 門이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천천히, 쓰러져 갔다 굴러 떨어지며 그가 일으키는, 나는, 물결이었다 - 이성복 시집 엄마 요즘 왜 시집 안 읽어? 딸이 묻는다. 내가 시를 안 읽는 줄도 몰랐는데 딸이 일깨워 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책상 위에 시집이 없단다..
역전易傳 1 / 이성복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습니다 그날 아 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 를 씹고 있었습니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시장을 봤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동안 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에 밥 먹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장바구니를 챙겼다. 사실 좀 덜먹을 참이었다. 부산을 댕겨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강건너 불구경을 한 것 같았다. 그동안 돼지처럼 꼬박꼬박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기름진 육체에서 나태한 사고가 나온다. 비대해진 몸으로는 세상의 외침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나름의 위..
또 비가오면 / 이성복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아침에 눈 뜨면 내가 오늘은 또 왜 깨어났나 싶다. 밥만 축내기 위해서 사는 거 같고. 이대로 가면 좋겠는데...” 어머님 대사다. 지난해부터 부쩍 심약해지셨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연세가 칠십 중반이시다. 그 나이는 누구에게도 예정에 없던 나이일..
숨길 수 없는 노래2 / 이성복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이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 이성복 시집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 너무 순박해서 익살스러운 이것은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처음 보고 건넸다는 유명한 인사말이다. 38세의 니체는 21세의 루에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청혼했다가 묵사발이 된다. ..
이성복 시인을 만나다 좋아하는 시인을 만난다는 건 참 어색하다. 그가 낳은 자식과 연애하다 부모님 뵈러 가는 길처럼, 부담되는 자리다. 오래 편지를 주고받던 소울메이트와 만나는 자리 같기도 하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궁금한, 보고 싶으면서 도망가고 싶은 수줍은 이중감정. 피고름 같은 시를 온몸으로 짜내는 그가 너무 반듯해도 이상할 거고 너무 헝클어진 모습이어도 서운할 거 같았다. 교수다운 노신사 분위기도 섭섭하다. 시인다우면서 시인의 모습을 배반하길 기대했다. 욕심도 많지. 이번 자리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에서 '내가 쓴 시 내가 쓸 시'라는 단기강좌다.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최승호 시인이 매주 초대된다. 첫 시간에 이성복 선생님이 오신 거다. 어울리게도, 가장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고통의 날. 나는 ..
사랑일기 / 이성복 입동이 지났는데도 딸아이는 여름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다른 운동화나 구두는 신지 않는다. 자기 발에 맞게 편안히 늘어난 것이 좋은가보다 싶어 그냥 두었다. 이번주부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지난 일요일에 부추를 사러갔다. 다행히 맘에 드는 부추를 사서 집으로 가는 길. 우리모녀는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는 낙엽이 뒹구는 창밖을 구경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서형아. 집에가면 엄마 원고 써야 하거든. 내일까지 써야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한테 자꾸 말시키지 말고 혼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아야 해. 부추도 샀으니까 엄마가 부탁할게." 31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딸아이에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