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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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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도 될까 '불행에 몰두하세요' “그럼,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어느 날 이메일 말미에 붙어 있는 저 인사말에 눈길이 머물렀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구문인데 그날따라 아리송했다. 왜 행복해야 되지? 꼭 행복해야 하는 건가? ‘행복해라’는 말은 ‘부자 돼라’는 말보다 덜 속되고 선해 보이지만 도달 확률이 낮다는 점에선 더 잔인한 당부이기도 했다. 아무리 용쓰고 살아도 불행이 속수무책 벌어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행복하라는 건지 의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안 행복하니까 심통이 나서 삐딱해졌으며 ‘덕담’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불만분자가 됐는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검열했다. 은 그즈음 눈에 들어왔다. 나의 책에도 인용했는데,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이란 명제를 발견하고 (행복은 단념하고) 행복 없이 사는 훈련에 임하면서 조석으로 시를..
글쓰기 강좌에 여성이 몰리는 이유 25명 중 3명이 남자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강좌의 성비다. 여대남소의 성비는 수년째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일회성 강연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거의 여탕 수준이다. 지난번 개강 때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도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요. 남자들은 다 어디 간 거죠?” 이에 60대 여성 한 분이 말하기를, 여기만이 아니라 어느 강좌를 가도 그렇단다. “수강생은 다 여자인데 강사는 또 거의 남자예요.”영국도 상황이 비슷한가. 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총장으로 있는 런던 예술대학교에서는 시각예술을 공부하는 1만8000명의 학생 중 70%가 여성이다.” 저자는 이유를 분석한다. “남자아이들은 가정의 부양자로 길러질 뿐 아니라, 의사소통에도 서툴고 자신의 감정에 무관심하도록 조건화되기 때문에, 예술은 자신들에..
은유 읽다 - 나의 두 사람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생아 용품 매장에 갔다. 손바닥만 한 턱받이부터 팔뚝만 한 배내옷까지 크기가 앙증맞고, 순백색부터 복숭아 색까지 색감마저 보드라워 넋을 잃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야? 평생 한 번인데 하루도 못 빼? (…) 오빠 회사 사람만 그렇겠지. 내 주변엔 교육 안 듣는 사람 없어.” 만삭의 임신부였다. 아마도 예비 부모 출산교육 프로그램에 남편과 함께 가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각이 달라서 남편이 남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고통의 출구를 찾는 방법 강원도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6월에 ‘평화’를 주제로 독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를 읽는다며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강연을 앞두고 담당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께 드리는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었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억울하게 잡힌 분들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토록 엉뚱한 질문이라니, 과연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핵심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소는 개인의 사회적 좌표다. 그 학생은 폭력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이 어떻게 공적 발언의 장을 확보해 ‘나 여기 있음’ ‘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절차와 경로의 시작점을 묻..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원더플 비혼,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 전주에는 친구 봄봄이 산다. 봄봄은 5년 전 전주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내가 하는 글쓰기 강좌 16주 과정에 참여했다. 비혼 여성 공동체 ‘비비’를 운영하는데 강의료와 교통비를 동료들이 지원해주어 자기가 ‘대표’로 유학 오는 거라 했다. 그녀의 자기소개는 멋지고 대단하게 들렸다. 수업에 오는 기혼 여성 중 일부는 (자격증도 나오지 않는) 자기 공부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쓴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갖거나 배우자를 설득하기 곤란하다는 고민을 터놓곤 했다. 그렇기에 봄봄이 들려주는 고만고만한 일상을 넘어선 삶, 결혼 제도 바깥에서 이뤄지는 존중의 반려 관계는 듣는 것만으로도 숨통을 틔워주었다. 봄봄은 멀리서 오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가장 먼저 강의실에 와 있었다. 늘 수줍게 웃었고 성실히 글을 써냈다. 십년지기 네댓..
여자들은 왜 늘 반성할까 북토크 자리에서 한 20대 여성이 질문했다. 친구들과 수다 떨다 보면 남자들 외모 평가를 하게 되는데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지 양심에 찔린다는 거다. 나는 우선 드는 생각을 얘기했다. “이렇게 자기 행동을 객관화하는 분이라면 타인을 대상화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는데요.” 이성애자가 이성에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는 행위는 자연스럽다. 다만 허벅지, 가슴, 허리, 다리, 입술 등 ‘신체 부위별’로 쪼개서 사람을 보다 보면 ‘통합적 인격’으로 보지 못하고 사물화하게 된다. 단톡방에서, 술자리에서, 컴퓨터 앞에서 외모 평가를 일삼다가 실제로 만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성)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것이 문제다. 쟁점은 외모 평가 자체라기보다 ‘누가 외모 평가를 하..
눈물의 목격자, 스물두살 자동차를 보내며 '열일곱 살 자동차'라는 그림책이 있다.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와 자동차가 17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하는 이야기다. 따뜻한 그림과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으쓱했다. 우리 집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자동차가 있다. 무려 스물두 살! 사람으로 치면 백 살쯤 될 거 같은데, 그림책이랑 상황이 비슷하다. 첫아이가 태어난 해에 구입했다. 짙은 녹색의 성능 좋은 자동차는 아이를 돌잔치에도, 할머니댁에도,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데려다주었고 성인이 되어 군에 입대하는 날까지 동행했다. 아이를 신병 훈련소에 보내놓고 눈물 훌쩍이며 집으로 오는 길 새삼 쇳덩이인 자동차가 둘도 없는 살붙이처럼 느껴졌다.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자동차가 아이와 생애 주기를 같이한 동년배라면, 내게는 구질구질한 눈물콧물 다 받아준 속 깊고 품 넓은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