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론- 자연권

[스피노자맑스]

<홉스와 스피노자- ‘자연’을 보는 차이>

스피노자에게 끌리는 점. 위계가 없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벗어났다. (홉스를 잘 모르는 관계로 고병권의 글을 참조했다. 스피노자와 홉스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점이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설명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이 도달해야할 본연의 모습이라면 홉스는 자연을 극복해야할 나약한 상태로 본다. 홉스는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처럼 취급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가정을 내놓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들은 비슷한 본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개인을 환원불가능한 단위로 설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개체는 항상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이뤄진 조성체다. 고정된 원자는 없다. 스피노자에게는 항상 이것이나 저것이 문제되지 일반적인 어떤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양도의 문제.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로 자연권의 양도를 제시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영구적 전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제3자인 국가에게 양도하고 국가의 가공할 위력 아래서 계약을 맺고 그 이행을 보장받는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므로 양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들이 연합하여 사회체나 정치체를 구성할 때 권리의 변화가 나타난다. 개인은 개인적 변용이 아닌 집합적 변용을 수행한다. 양도가 있다면 제3자에 대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부분으로 참여하는 전체에 대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부를 만하다. 당대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기독교는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는데 그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감히’ 동일선상에 놓았으니 말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조작하지 않는 것’ - 자기 본성을 다 펼치고 사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악도 없다. 항상 ‘외부’(악마)의 유혹에 따른 죄와 타락이라는 기독교적 이해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외부의 유혹,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지 않은 개인의 무능이라는 스피노자의 지적질에 동감한다.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아무것이나 임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가 도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속이다. 그에겐 도박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이처럼 정념에 종속된 인간은 무능력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이성이 아니라 욕망에 끌린다.”  

우리의 목표는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전환이어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식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육식욕을 채식욕으로 바꾸듯이 말이다. 암 환자가 자기 몸 상태를 ‘인식’하고 술과 담배 끊는 것처럼 정신 상태의 건강을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무지하고 정신이 허약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법에 대해서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몸이 약한 사람이 몸의 건강에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까. 인식의 확장이 자유의 증대다. 인간은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이성적인 삶을 복종이라고 말할 수 없고...스스로를 거슬러서 명하는 정신의 자유를...노예상태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일까? 아니다. 금욕, 고행을 희생을 주장하는 사상들을 비난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 굴욕스러워하는 지성, 자기 자신을 마비시키는 행동과 같은 것들은 거짓이며 오류이고 부조일 뿐이다.  

정리하자. 도박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도박으로 인한 힘의 약화가 악이다. 더 많이 종속될수록 힘은 약화된다. 고로, 절제도 나름이다. 어떤 절제인가. 힘의 증대를 가져오나, 강화를 가져오나. 자기파괴와 자기배려의 차이이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행위 속에 내재한다. 행한 만큼이 인식의 정도다. 지행합일. 앎과 삶의 일치. 이성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행할 수도 있는데 안 한 게 아니다. “우리 애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 안 나오”는 건 스피노자 사전에 없다. 공부의 필요성을 알지만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거다.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해진 만큼이 인식의 정도라는 것.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서로 도움 없이 인간은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하여 그들이 세력을 합친다면, 그들은 연합하여 더욱더 많은 세력을 갖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의존과 독립의 조화 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고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기적인 것은 자기파괴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고 독립적인 개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행한 악은 자신에게 행한 것이다.”  

자연법을 통해 ‘도덕적 형이상학’을 구축하지 않으려는 스피노자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도덕법칙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정서의 증감이라는 물리법칙으로 사유한다. 다수가 배부르고 기쁨의 정서가 증가하면 그게 정의이고 좋은 정치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의는 관념이 아니다 물질적이다.

알수록 사랑스러운 스피노자 오빠~  (나이든 남자를 좋아하는 나의 연상취향의 극한이 아닐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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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초록 [2010.10.21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쯤은 스니카즈 정리가 올라왔으려나 짐작하고 들어왔더니, 아니 쪽집게 도사가 되었나?

    혼자 웃었습니다. 스피노자,요즘 여기저기서 철학책 읽다보면 불쑥 튀어나와서 루니의 위력을 느끼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틍간 폭발했다는 리플을 읽고 그녀는 사는 방법에 중간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나는 요즘 새벽에 덜 폭발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더 평화롭게 보이는 것일까요?

    • 은-유 [2010.10.22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초록샘 리플이려나 하고 클릭했더니 맞습니다. 저도 족집게~ ㅎㅎ 제가 중간이 없긴 해요. 아직 철이 안 든거 같아요. 흐..

  2. 봉급생활자 [2010.10.21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모르는 내용이라 이해하기 어렵긴하지만. 여기있는 내용으로 보면, 홉스와 스피노자의 사상이 왜 비교되는지.. 완전히 다른 내용인거 같아서요. 개인들의 연합이나 정치체라는게 어떤 이름을 갖든(국가든 아니든) '제도'를 필요로 하죠. 살인, 강간, 절도, 폭행등이 (동물의 왕국같은)자연의 섭리아니라 개인(타인)의 신체와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로 규정하는 어떤 절차가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잔아요. 그게 '터부'나 도덕, 윤리, 종교를 통해 규율할 수도 있겠고. 근대국가 이후에는 주로 '법'으로 했다고 하지만. 다수가 배부르고 기쁨이 증가하는 좋은공동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론은 언뜻보면 공리주의와 같은 맥락인듯하고..그게 공산주의가 밟고선 거인의 어깨 중에 하나라고 보면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피노자의 정의는 상당히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주관적 성격'을 갖는것 같네요. 홉스의 정의는 질서나 제도라는 측면에서 객관적 성격이 강하지 않나요?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오래된 명제(아마도 플라톤인가?^^;;)가 있는데, 한편으로 같다라든가 다르다라는 판단은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기도 하겠죠. *써놓고 보니, 이거 뭔소린지 원..ㅋㅋ

    • 은-유 [2010.10.22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피노자랑 공리주의는 완전 상극이여요. 공리주의가 GNP를 증진을 위해 개발 논리로 새만금을 개발하고 소수의 피해를 강요하는 거라면,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철학은 개체의 본성을 잃지 않고 가져가면서 더 큰 개체화를 이룹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성립불가능하다는것~ 홉스의 국가론은 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사적소유를 지키는 사회적 안전을 위한 계약이죠. 스피노자 국가론이랑은 좀 달라요. 담에 또 쓸게요..

  3. 천마산 [2010.10.22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읽고 느낌을 쓰시는 거예요? 나니면 요약정리하시는거예요? ㅎㅎ 암튼 어려운 내용을 잘 정리하셨네요. 나중에 얼굴보면서 이런 주제로 토론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고3 수업만 하다보니 매일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기만 했지 기다려주는 수업을 해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ㅠ. 요즘 면접보러 가는 아이들 특별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일대일 지도를 해보니까 '정말 교육은 이렇게 해야하는데'하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집에서라도 식사시간이나 여유가 있을 때 아들 딸이랑 함께 앉아 신문기사나 철학적 논쟁이 될 수 있는 구체적 사례를 던져주고 생각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7살은 7살대로, 11살은 11살대로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범위에서 주장의 근거를 설명하고 절대자(ㅋㅋ)인 아빠에게 동의를 구하려고 애를 쓰더군요.
    학교에서도 이런방식으로 수업을 했으면 좋을텐데 게으름과 안일함이 교육여건이 어렵다는 방패 뒤로 숨고 싶어 한답니다.
    생각하고,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육인데 정말 아이들 가르치면서도 답답하고 한심스러울 때가 너무 많아요. 정말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ㅠㅠ

    • 은-유 [2010.10.22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약정리와 느낌이 섞였답니당^^ 위에 홉스 얘긴 고병권 글 인용이고요. 감자님은 좋은 선생님, 좋은 아빠세요.^^ 애들과 생각-표현-소통하는 좋은 방법. 틈틈이 시도하면서 생각해봐야하는 문제에요. 청소년기는 인생에서 너무 귀한 시간인데 기계처럼 암기만하다니. 생각없는 어른으로 길러내는 것이 저들의 목적일지도. 자본주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정치론: 서론 - 인간본성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기획

[스피노자맑스]

왜 읽는가.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내게 왔다. 아니 내가 찾아갔다. <에티카>를 읽고 나니 스피노자에게 욕심이 생겼다. ‘이 오빠, 뭐 있다’는 촉이 왔다. 체내 당분이 부족할 때 케이크만 봐도 군침이 돌듯이 그는 내 사유에 필요한 영양소를 담뿍 함유하고 있는 철학자였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나만 아니라 자식, 친구 그리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고귀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책장을 넘길수록 방법이 아주 없지 않다는 희망이 보인다. 다 같이 잘사는 법이란 결국 정치문제로 귀착된다. 현실의 정당정치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정치. 삶을 다스리는 측면에서 볼 때 <정치론>은 맞춤한 책이다.


왜 스피노자인가. 스피노자는 16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서구는 오랫동안 지켜오던 것들이 흔들리며 새로운 방향을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대이다. 격동의 시대를 통과하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의 현실에 연결시켜 보았다. 체제에 안주하지 않았고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계획했다. 그의 책은 이단으로 몰려서 출판조차 불가능했다. 그만큼 불온했다. 그렇다고 스피노자를 17-18세기에 가두고 시대적 맥락에서만 본다면 텍스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없다. 2010년 신자유주의의 독소가 뿌리처럼 넓게 퍼진 대한민국에서 ‘반시대적 사상가’의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쓰임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읽는 자의 몫이다.

왜 윤리학=정치학인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다. 자기 삶의 좋음과 나쁨을 분간하는 법이 윤리학이라면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힘의 증대를 도모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정치학이다. 신즉자연을 주창한 스피노자의 자연학=윤리학=정치학 등식이 성립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유리하다며 본성이 같은 개체가 결합했을 때 두 배의 힘이 생긴다고 말해왔다. 스피노자에게는 개체가 이미 하나의 복합체다. 우리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개체도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오장육부와 팔다리 등등의 복합체다. 정치체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에게 국가라는 공동체 형성은 코나투스(존재확장노력)라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연유한다.   자연에서 개체를 다루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룬다. 국가는 더 큰 개체화를 이루며 모든 사람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다. 이는 고립된 인간으로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서의 국가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개인도 국가도 모두 개체지만 그 능력과 본성은 완전히 다르다.


왜 인간본성에서 시작하는가. 스피노자가 이단인 이유는 모든 철학자가 인간의 고매함을 들먹이고 도덕적 통치를 말할 때 스피노자는 인간의 밑바닥을 들추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학>첫 문장을 보라.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정념? 악덕 아니다. 본성 맞다.  철학자가 꿈꾸듯이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극히 정념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철학자보다 정치가를 높이 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이유에서보다 두려움에 따라 행동함”을 알고 인간의 악덕 방지를 연구하는 정치가가 철학자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정념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본 스토아학파를 비난한다. 

“나는 인간의 행동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신중을 더 했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인간 본성’에서 출발한다.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이상이 아닌, 경험과 현실을 참고해서 정치학을 구상한다. "
사랑, 증오, 질투, 야망 등등의 정념을 인간 본성에 있는 악한 빛이 아니라 본성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한다. 더위, 추위, 폭풍, 천둥처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연만물은 긍정이고 필연이다. 상어가 정어리를 잡아먹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다. 해충/익충을 가르는 것은 인간의 목적론적 시각이다.) 이러한 정념들,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곧 그에겐 '이성'이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은..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의 신체, 사회체에 집중시키는 확실한 수단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왜 힘이 권리인가. "국가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고, 국가의 신체와 정신은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행복이 다른 누군가의 선한 믿음에 의지하여" 성사된다고 보지 않는다. 덕성을 갖춘 지도자의 출현과 인도로 세상은 좋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에 반대한다. 그렇기에 "국가의 영원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불충실하거나 비열한 행동에 이끌리지 않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고 말한다. 여기서 '법'은 처벌과 심판체계로 이루어진 실정법이 아니라 만물조응의 원리 즉, 운동과 정지, 조성과 해체가 이루어지는 물리적 법칙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국가를 도덕이나 정의같은 형이상학으로 설명하지않고 힘의 증가와 축소를 가져오는 배치의 구성, 즉 물리학으로 분석한다.

힘과 권리의 관계. 스피노자 <정치학>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상당부분 기댄다. “얼마만큼 힘이냐에 따라 오직 그만큼의 권리를!”  군주론의 이 표어는 스피노자 철학의 원리를 잘 설명한다. 개체는 능력만큼의 권리가 주어진다. 하늘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는 도덕, 천부인권 그런 것은 없다. 힘만큼 확대된 권리가 있을 뿐이다. 정치체가 하나의 신체라면 자신이 표현하는 능력만큼 권리를 가지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을 따른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정치적 공동체, 즉 정치적 개체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과 능력의 확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기술이다.

* 매주 월요일 7시 수유너머R  <스니카즈> 세미나 합니다. 스피노자, 니체, 카프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하룻밤에 읽는 철학사> 같은 지루한 철학공부도 하룻밤에 끝장내는 공부도 아닙니다. 튜터 박정수와 좋은 동료들과 함께 강도높게 공부합니다. 쉽다고는 말못하지만 고통이 쾌락이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 좋은 사람과 좋은 가을 보내실 분 언제든 환영합니다. 스피노자 <정치론>으로 지난주에 시작했고 보조교재로 네그리의 <전복적스피노자>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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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초록 [2010.10.13 0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니카즈에 참석할 수 없어서 애석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정리된 글을 읽으니

    지난 세미나가 생각납니다. 저는 요즘 길담에서 파스칼, 데카르트에 관한 짧은 인용구를 읽고 있는데

    (철학자들의 말을 편집한 책, 머리에 쥐가 나고 있지만 계속 복습하고 있자니 조금씩 힘이 생기고 있네요.

    오늘 아침 신문읽다가 프랑스 파업이야기 읽고 나서 retrait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게 되는 ,그런 변화가

    재미있기도 하고요 )감질나서 덕분에 철학책을 다시 읽게 되기도 하고요.

    이렇게 따라가다가 어느 날 다시 수유너머에서 공부할 날이 오겠지요?

  2. [2010.10.13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0.10.13 1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마워요. 고쳤어요. 정치론이 <에티카> 개념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가서 정리가 어렵네요. 헥~ ㅋㅋ (참, 어제 백년만에 오마이갔다가 책소개 글 쓰신 거 잘 봤어요^^)

  3. hyde [2010.10.15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요즘 너무 공부하고 싶어요 ㅠㅠ 저기너무너무 가고싶다 힝 ㅠㅠ

  4. [2010.10.20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엄마의 윤리학3 - 공통개념 형성에서 자유인으로

[스피노자맑스]


4. 공통개념 만들기

정서에 휩싸인 혼란된 관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스피노자는 ‘공통개념’ 형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물에 대한 공포를 벗는 길은 나와 물의 공통리듬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은 물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외적 일치가 아니라 내적 일치. “신체들의 운동과 정지 또는 신체들 간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를 그 내부로부터 찾아내는 일” 이것이 수영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고 수영을 할 줄 알면 물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공통개념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가 상상의 바다에서 벗어나 분명하고 뚜렷한 관념, 적합한 관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공통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기쁨의 변용, 능력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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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봉급생활자 [2010.07.14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마' 지위에 대한 흥미진진한 글이네요.^^; 대단하심!! 저는 사실 스피노자님은^^;; 이름만 들어본듯하고 에티카는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이 무식함^^;;) 철학을 공부하시니까 저와는 다르게 접근하시는거라 생각합니다만, 법학을 하는 저는 윤리, 도덕, 법의 개념을 가끔(?) 고민하게 됩니다. 윤리는 주관적이지만 도덕과 법은 객관적이고 그래서 (작든 크든) 공동체, 사회, 국가라는 관념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인간이 조직을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한도에서는 윤리와 달리 도덕은 배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ㅋㅋ. 쓰다보니 글의 주제와는 별상관없는 거네요.^^ 어제부터 정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서ㅋㅋ.

    • 은-유 [2010.07.14 2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법 공부하셨군요^^ 저는 모든 공부를 야매로 해서 체계는 없지만 삶의 도구로 그냥 제방식대로 해석하면서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재밌네요. 윤리와 도덕이 어떻게 다른지도 배우고^^; 윤리, 도덕, 법, 공동체.. 내 삶을 이루는 것들인데 너무 몰랐구나 이런 생각해요. '정의'에 관한 책이라니 궁금한걸요? 좋은 얘기 들려주세요~ ㅎㅎ

  2. [2010.07.14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0.07.14 2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선 버스용 소설로 '카스테라' 추천하고. (박민규소설이 다 재밌음) 박노자, 우석훈이 쓴 책은 뭐든지 골라서 읽으면 세상이 더 환히 보일 테고. 임지현의 세계사편지도 좋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도 괜찮고. 김영민 <영화인문학>도 좋고. 푸코의 <감시와처벌>은 좀 어려운데 강추. 이년전에 사놓고 초벌구이로 읽고 지금 다시 보니 좀 읽히네. 겁나게 훌륭한 책이니 장 담그듯이 집에 묵혀뒀다가 보길 바래..ㅎㅎ

  3. [2010.07.15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0.07.16 2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러명 글 모은 것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도 괜찮은 듯. <리얼진보>는 내가 안 읽어봤는데..괜찮다는 사람도 있고 별 영양가 없을수도 있음~ 학벌사회 철폐를 위해 애쓰시는 김상봉 교수님 책도 믿을만하고^^

  4. 봉급생활자 [2010.07.16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매로 공부하다' 멋진 표현인걸요.^^ 어떻게 공부하시는지 모르지만요. 공부를 이렇게 즐기고 실천하고 주위 사람한테 널리 알리는 은유님이 부러울 뿐이예요. 난 수단으로 선택한 공부라서 전공을 싫어해요. 공부하면 할수록 내안에 심성이 마른 낙엽처럼 부석거리는 느낌이죠.학교에서 배운것 보다는 20대때 함께했던 분들께 배우고 거리에서 몸으로 느꼈던 부정의에 대한 분노.. 그걸로 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할 수 있었던거 같아요. 지금은 인생 공부 좀 해보려고 이거저거 기웃거리고만 있답니다.^^;; 여기서 많이 자극을 받아요.ㅋ. 박민규 소설 재밌죠..^^

    • 은-유 [2010.07.16 2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부라고 하기엔 부끄~ 괜히 가방 들고 왔다갔다하는 거 같은데..숲을 드나들면서 꼭 뭘 하지않아도 몸과 맘이 가벼워지듯이 그런 느낌이랄까? 언제 수유너머에 와서 강의한번 들어요. 어렵지만 재밌다우~ ㅋㅋ 법을 포기하지 않고 배워둔 게 쓸모있을 거에요. 공부는 다 통하니까~

  5. hyde [2010.07.16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연재 잘 읽었습니다 언니! ㅎㅎ 저 엄마들 모이는 작은 카페가 있는데 거기 퍼가도 될런지요? 퍼갈래요 크크크 엄마들이 많이 고민하는 것들이 있죠. 내 자유가 중요하고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알면서도 이뤄지지 않는 데에 대한 좌절감...이랄까. 어떻게 보면 그걸 이루려고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알게모르게 계속 되온 교육적 무의식의 압력이랄까.. 전 일하는 엄마이다보니 물론 다른 걸 하지는 못해도 애한테서 떨어지긴 하잖아요. 그렇다고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숨통은 트이죠....

    • 은-유 [2010.07.16 2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 고마워. 엄마들의 생각이 바뀌는게 참 중요하지. 아이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으로..아이들을 자본의 부속품으로 충실히 키워내는 것도 엄마들이고. 인생에 정답은 없는데 그래서 답을 찾으면서 살아야하는 거 같아. 이 글 같이 읽고 이야기도 나눠보고 질문있으면 받아오렴^^

엄마의 윤리학2 - 양태로서의 자식

[스피노자맑스]

2. 양태로서의 자식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식은 나의 분신이 아니라 신을 분유한 존재다. 여기서 신이란 세상을 임의로 만들고 심판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필연적으로 양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체”로서의 신이다. 스피노자의 신개념은 수염 휘날리고 때로 인자하고 때로 근엄한 인격신이 아니다. 신은 모든 자연만물들을 산출하는 ‘능력’에 가깝다. 참 매력적인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이 나는 신을 믿는다면 스피노자의 신만 믿겠다고 했단다. 암튼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신의 능력’이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내재적 존재로서의 신. 이것이 그 유명한 ‘신즉자연’이란 언명이다. 그러니까, 내 몸을 빌려서 잠시 세상에 떨어진 양태로서의 자식도 ‘신의 능력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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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정아 [2010.07.12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0년만에 내린 폭설을 뚫고 4시간에 걸쳐 대치동으로 간 엄마이야기를 읽으니 얼마전 어떤 외고 학생이
    "이젠 됐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투신했다는 기사가 떠오르네여. 엄마가 원하는 성적을 얻고 난 후라는데...
    우리 부모들부터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것,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행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할텐데..그래야 아이와 좋은 마주침을 할 수 있을텐데.. 매순간 내자신의 무오류를 점검합니다.

    • 은-유 [2010.07.13 0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젠 됐어? 물음표가 있었죠. 엄마한테 묻는 거니까. 저도 김규항칼럼 보고 씁쓸했네요. 근데 자식과 거리두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특히 평소에 훈련이 안 되고 다른 삶을 접하지 못하는 엄마들은 자연히 자식에게 리비도가 향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저도 매일밤 갈등하고 한숨쉬어요. 내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 건지 괴롭고 답답하고 ㅠㅠ 엄마로 사는 일이 가장 큰 수행같아요.

  2. 봉급생활자 [2010.07.14 1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한 개인이 가족관계에서 엄마라는 지위를 부여받으면 자식이 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되는거 같아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극대화되고 집중되죠. 사실 다른 관계에 비해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데에 이성의 노력이 거의 안들죠. 본능에 의한 관계니까. 그냥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요.^^;;

    • 은-유 [2010.07.14 2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포함해서 인간은 자식이 타자라는 걸 망각하고 대부분 자식에 대해선 다른 논리를 내세워요. 이중잣대죠. 그래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식키우는 걸 보면 정확하더라고요. 자식키우는 데서도 앎과 삶을 일치시킬 수 있는게 가장 높은 경지^^ 같아요.

  3. 연초록 [2010.07.15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경우는 두 아이가 제가 생각한 모든 플랜?을 뛰어 넘어버려서 제 쪽에서 항복한 경우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서로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 자신보다 강한 자식이 나오길 바라야 하나? 아니면 ?

    참 정답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그러니 이 영역은 어쩔 수 없다고 밀쳐두면 점점 눈사태처럼

    커가겠지요?

    수요일 모임을 하던 중 어제 한 멤버가 말을 하더군요. 부부의 생일날, 일정정도의 돈으로 술을 사마시면서

    생일을 보냈는데 다른 식으로 생일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게 되니 우리도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축하를 하기로 했다고요.

    그렇게 주변을 보는 노력을 하다보면 내가 혹은 내 주위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란

    것에 눈뜨게 되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한없이 이어지는 고민은 있겠지만 그 고민을 부모가 한다고 해도 영원할 수 없으니

    어느 선에서 물러서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그것이 정답이란 것을 느끼게 되네요.

    그러기엔 은유님의 아이들이 너무 어린가?

  4. 연초록 [2010.07.15 1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고보니 이건 아니구나, 은유님은 그래도 어느 정도 스스로 균형을 잡고 잘 살아가고 있어서

    보기에 좋은 모델이거든요.제겐

    그래서 오늘 목요일 수업시간에 대중문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은유님 불로그에서 본 서태지 관련 글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아 그러고보니 내겐 대중문화의 마지막은 강산에였나? 서태지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날이기도 했어요.

    매일 도장찍듯이 들어오는 이 블로그에 대해 이야기하니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이 촉발되어 그 반응도

    재미가 있는 시간이었답니다.

    • 은-유 [2010.07.16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심을 잘 잡긴요. 얼마나 버둥대는지..ㅎㅎ 평생 이러는게 부모노릇같아요.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는 일이요. 그나저나 도장찍듯이 들어와주시고 홍보까지 해주시니 ㅋㅋ 고마워요 ^^

엄마의 윤리학1 - 제 정신으로 살기위해

[스피노자맑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작년에 봤을 때 먹물 활자를 눈으로 훑는 거 같았다. 그런 책은 처음이었다. 공리. 정의. 정리. 주석. 보충 등등 번호를 매겨가며 논의를 전개하는, 철학책이라기보다 수학책에 가까웠다. 이과적 두뇌도 아니고 전자제품 사용설명서 1,2,3..만 봐도 판단중지가 일어나는 나로서는 현기증 나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섹시한 문장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었다. 끌림이겠지. 또 스피노자는 나의 사랑 니체오빠가 애정해마지 않는 철학자다. 고병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철학자는 니체를 좋아하는데 니체의 모든 저서랑 에티카랑 놓고 최고의 책을 한권 고르라고 하면 ‘에티카’를 택하겠어요.” 그의 꼬심에 넘어가서 에티카에 다시 도전했다. 7주에 걸쳐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단 훨씬 보이는 문장이 많아졌다. 흐릿하게나마 대략의 밑그림은 그려진다. 아래 인용해 놓은 김수영의 글을 보는 순간, 이건 에티카를 다섯줄로 요약한 것이라며 무릎을 쳤다. 에티카에 나온 개념으로 '엄마의 윤리학'에 대해 사유해보았다.

<제 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도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것이 <제 정신을 가진> 비평의 객체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생활(넓은 의미의 창조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 생활은 유동적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의 양심이다.

- 김수영전집2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0.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한 때는 이런저런 '직업'을 꿈꾸기도 했지만 살수록 바람이 소박해진다. 직업군을 택하기보다 삶에 임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느낀다. 남에게 멋져 보이는 직업을 고르고 거기에 성실히 복무하며 사는 게 아니라, 나의 ‘좋음’을 성찰하고 몰두한 결과물로 나에게 맞는 직업이 찾아지는 거 같다. 이미 선택지가 주어진 익숙한 세계에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나만의 고유한 삶의 창조. 여기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필요하다. 그것을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에 따라 증명했다. 운명에 휩싸이지 않고 자유인으로 사는 법을 촘촘히 엮어 <에티카>로 정리했다. 또 다른 한 사람. 약동하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의심했고 안주를 거부했던 김수영은 시를 썼다. 유독 몸과 육체가 많이 등장하는 김수영의 시편은 그의 ‘에티카’였던 것이다. 

나의 에티카는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아이를 낳는 순간, 나의 에티카는 엄마의 에티카가 됐다. 결혼/출산 전에는 나의 선택에 따른 (불행한) 책임을 나 혼자 지면 그만이다. 그런데 엄마가 되니까 식구들의 삶이 밀접하게 맞닿아 나의 좋음이 식구들의 나쁨(불편)이 되기도 한다. 항시 2-3인분의 인생을 합해 총체적 좋음을 고려하며 삶의 순간순간 크고 작은 결단을 내려야한다. 6개월짜리 루니 강의 듣는 것, 소소한 친교활동까지. 나의 선택이 차곡차곡 쌓여 아이들의 인생의 향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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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yde [2010.07.09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절실히 필요해요. 엄마의 윤리학...이젠 공포에 휘둘려 애를 여기저기 보내게 되기 싶상이고 그런 현실이 뜨악해요. 일제고사니 뭐니 해서 초등학교 0교시 수업이 생기고 7교시 보충수업이 있다면서요. 아이들은 처음엔 왜 해야하냐고 묻지만 그다음해가 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수 밖에 없게 된대요. 나중엔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다고 교사가 써놓은 글을 봤어요. 저는 정말 애 낳고 이런 현실이 공포 그 자체에요. 귀신보다 더 무서워요.

  2. 봉급생활자 [2010.07.09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들 교육때문에 강남으로 이사가는 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생각없어 보여서 싫다면서, 목동은 그런 이미지가 좀덜하면서 교육환경이 좋다고 하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소문데로 대단한가보네요. 근데요. 얼마전에 만난 친구는 요즘은 초등학교 5학년에 모든게 결판난다는거예요. 그래서, 그럼 난 좀 시간이있군했더니, 중학생 아들이 전교1,2등을 오가는 다른 친구 왈, 무슨소리야 너도 지금 부터 **유치원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어디로 보낼지 애의 '캐리어 패스'를 쫘놔야되 하는거예요. 우리 이제 태어난지 7개월인데요ㅜ.ㅜ 그 얘기듣고 숨도막히고 그 친구가 좀 무섭더라고요. 세상이 원.

  3. 은-유 [2010.07.10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yde랑 봉급생활자님^^ 초보엄마들 너무 겁에 질려하지 마시고요.ㅎㅎ 한글학습지나 영어교육 등등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정신 안 차리면 그 흐름에 '나도모르게' 포획되니까 걷잡을 수 없죠. 그것들을 육아에 활용해야지 종속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가장 위험한게 '지금은 힘들어도 이익은 나중에 온다'는 생각임. 행복은 유예불가능 해요. 아이도 엄마도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무효^^ 5시간 공부시키고 포상하듯 1시간 놀게 해주는 엄마들 많은데 내가 봤을 때 5시간 놀리고 1시간 공부시키는게 훨씬 나음.. ㅋㅋ

  4. 연초록 [2010.07.10 2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everymonth 5주년 생일잔치가 있었습니다. 강남에서 역사모임 끝나고 점심먹고 자리를 옮겨 커피숖에셔

    또 이야기가 이어졌지요. 그런데 고 3 엄마가 한 명 있어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그녀가 말하더군요.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이와 함께 이 시기에 영화 한 편 보는 일도 마음 편지 않았을 것이라거요

    아이와 영화보고 이야기나누고 그리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니 새벽 1시 반, 둘 다 깨어나는 바람에

    그 때 자리에 앉는 아이를 보면서 이래도 되는가? 고민하지 않게 된 힘에 대해서요.

    지난 목요일에는 책이 한 권 끝나고 한 집에서 모여서 히피 문화에 대한 동영상을 보다가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더군요. 내가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내 아이가 이런 정신으로 산다고 하면

    나는 과연 허용이 될까? 그렇다면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내 정신적인 허영인가?

    그리고 돌아오는 길 차속에서 초등학생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일산에서 5년 사는 동안 늘 아이들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아이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살 것 같다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다면 먼저 다른 이야기하면 되지 않나요?

    그것이 힘이 든다고 하더군요. 힘이 든다와 불가능하다는 참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도 혼자는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쓸데없는 정서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아니 그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니

    덜 휘둘리려면 그런 배치속에 들어가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 은-유 [2010.07.1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혼자면 부적합한 관념에 휩싸이기 쉽겠죠. 스피노자도 공통개념을 형성할수록 적합한 관념에 도달한다고 했고 저도 좋은 동료들 없었으면 양육기간 내내 무척 힘들었을 걱 같아요.엄마들사이에 연초록샘 모임같은 공동체가 많이 생기면 좋겠네요.^^

  5. 연초록 [2010.07.14 1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이 에세이로 쓴 글이라고 듣고, 내가 쓴 에세이의 어설픔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노력하지 않고 그냥 마음에 촉발된 형태의 마음을 쏟아낸 글이었구나 한편 반성을 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몸으로 바뀐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으랴, 공동체를 찾으러 남산에 갔다가

    다시 동네에서 씨앗을 뿌리고 가지가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을 찾은 것을 한편 그렇게 위로하면서요.

    내게 에티카는 무엇으로 진화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아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2학기 에세이 쓸 때는 그런 변화를 조금 더 치밀하게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은유님, 루니끝나면 어디선가 함께 공부하는 그런 인연이 있길 기대하게 되네요.

    꼭 루니가 아니더라도,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좋은 마주침과 나쁜 마주침

[비포선셋책방]


우리는 살면서 대수롭지 않게 선악을 판단한다. 좋은 날씨, 나쁜 날씨. 좋은 학생, 나쁜 학생. 좋은 노래, 나쁜 노래. 하지만 이것은 사물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눈 오는 날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겐 나쁜 날씨이고, 눈싸움을 학수고대하는 꼬마들에겐 좋은 날씨일 것이다. 치매 걸린 시부모를 봉양하는 며느리는 시댁 식구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며느리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들이고,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유용한지 여부에만 관심을 두고 판단할 뿐,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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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내 [2009.09.06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작위적인 마주침으로 보이지만 실은 케이스바이케이스의 굉장히 정교한 프로그래밍에 가까운 것 같다.
    나쁜 마주침이 선택될때 그 마주침은 계속 반복이 되고 좋은 마주침이 선택될때 더 멋진 마주침이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고. 내 생각에는 나쁜 마주침과 좋은 마주침을 선별하는 안목은 직관을 키우는 것이다. 직관을 키우면 좋은마주침인지 아닌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느낄 수 있게 되어 편리하다.
    단점은 의식적인 훈련기간이 필요하고 집중력을 상당히 요한다는 점이다. ㅎㅎ ^^

  2. [2009.09.09 1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에티카> 능력이 곧 자유다

[비포선셋책방]

니체는 자기보다 300년 전에 태어난 스피노자를 벗으로 삼는다. 니체는 한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선구자이며 그로 인해 이제 자기 혼자의 고독은 두 사람의 고독이 되었다고 열띤 어조로 고백했다고 한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스피노자는 신을 긍정했는데, 공통적으로 삶을 사랑했다. 스피노자 철학 역시 삶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을 전개했다. 니체가 우레와 같은 호통과 아름다운 은유의 방식으로 역설한다면 스피노자는 점잖고 집요하고 치밀한 학자스타일이다. 주석달고 증명하고 정리한다.


“자연(신)은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를 구분하고, 해충과 익충을 가른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돼야하는 ‘미’성년이다. 이처럼 하나의 목적에 갇히면 사물은 언제나 고정된 하나의 본질만을 갖고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존재가 된다. 목적론적 사고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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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13 1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8.15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09.08.16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티카 읽으면 성질 나빠진다고들 해요..^^ 저도 첨에 무지 당황했어요. 너무 어렵게 쓰여졌거든요.3장부터는 좀 낫더라고요.ㅎㅎ 1장 마지막에 '보충' 읽으시고..3장부터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에요 ^^

  3. R [2009.08.16 1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속 '~이다'체로 쓰시다가 마지막 문단에 갑자기 '~입니다'를 쓰셨네요. 수정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4. 연초록 [2010.05.22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생 누군가에게 의탁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 말이 가슴에 확 와닿아서 죽비가 되어 내리치고 있군요.

    이 고민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그것이 요즘 저의

    생각거리입니다.조금씩 변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들이 신기해합니다.엄마,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동안

    음식을 하지 않았어? 사실 지금 하는 것도 제대로 된 음식이라고 할 수 없고 거의 일품요리수준이지만

    몇 가지 레서피가 생기니 일주일에 삼 일 돕는 아주머니가 오시지 않는 날도 조금은 자유롭게 된 느낌이 들어서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음식을 한다고 해도 아직 청소나 빨래, 그것의 뒷처리 이런 산너머 산이 있지만

    그래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사람의 활기가 생겼다고 할까요?

    나를 아는 주변사람들은 선생님 그것마저 잘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웃곤 하는데요, 글쎄요 그렇게 되려면( 내가 여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그녀들이 모두 나의 선생이라고)

    앞으로 살아가는 전생애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과정에서 늙는다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즐거움을

    여럿이 함께 누리면서 살아갈 것 같네요. 역시 능력은 자유를 준다는 것,

    어제 간송미술관을 나와서 함께 밥을 먹으면서 함께 간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여자들이 집집마다

    가족만을 위해서 밥을 하고 가족끼리만 먹는 것은 참 소모적인 것 같지 않아요? 물론 가족의 애정이란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집이 각자 밥을 해먹는 것을 생각하면 ..

    그랫더니 상대방이 놀라서 묻습니다.그렇다면 무슨 다른 방식이 있나요?

    남산에서 밥을 먹으면서 든 생각인데 아파트라면 한 단지안에 공동취사장이 있어서 그 곳에서 함께 해서 먹거나

    낮 시간에 돌아가면서 밥을 해서 함께 먹는 방법이라든가 (물론 매일은 힘들겠지만) 다양한 방식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을 했지요. 그래요? 아직 야릇한 반응이지만 이렇게 새로운 씨앗을 자꾸 뿌리는 일은

    필요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찬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제 안에 억누르고 있던 공동체에의

    열망이 조금씩 구체적인 씨앗을 뿌리고 있는 셈일까요?

    • 은-유 [2010.05.22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공동체가 좋은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초록선생님이 하루하루 씨를 뿌리고 또 변해가는 모습 보는 것이 저도 즐겁습니다. (근데 정말로 요리까지 잘하시면 못하는 게 넘 없으신거 아닌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