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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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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샘 / 보들레르 이따금 나는 내 피가 철철 흘러감을 느낀다. 장단 맞추어 흐느끼는 샘물처럼. 긴 속삭임으로 흐르는 소리 분명 들리는데,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상처는 찾을 수 없다. 결투장에서처럼 도시를 가로질러 내 피는 흘러간다. 포석을 작은 섬으로 바꾸며, 또 모든 것의 갈증을 풀어주고, 도처에서 자연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취하게 하는 술에게 나를 파고드는 공포를 하루라도 잠재워달라고 나는 자주 하소연했건만; 술은 내 눈을 더욱 밝게 귀를 한층 예민하게 해줄 뿐! 사랑 속에 망각의 잠을 찾기도 했으나; 사랑이 내겐 오직 저 매정한 계집들이 내 피를 마시도록 만들어진 바늘방석일 뿐! - 보들레르 지난 가을 내가 월급생활자로 취직했을 때, 주위 반응이 대개 비슷했다. 어떻게 이렇게 취직이 빨리되느냐,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를..
시체 / 보들레르 기억해보아라,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풍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위대한 ‘자연’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고약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
나는 네가 쓴 번역투를 알고 있다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연구원들은 생계수단이 크게 두 가지다. 대학이나 학원에서 강의하기 그리고 책 쓰거나 번역하기. 나의 스승이자 동료인 박정수도 대학에 출강을 나가고 지젝이랑 라캉 책을 몇 권 번역했다. 처음에 그에게 배울 때 강의안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철학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문체의 꼬임이 거슬렸다. 한국어이지만 번역이 필요했다. 집에 와서 강의안을 ‘나의 언어’로 바꿔가며 정리하고 이해했다. 그는 국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명색이 국문학도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문체얘기가 나왔다. “내가 예전엔 김훈 글을 읽을 때는 김훈 문체처럼 됐는데 책 몇 권 번역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번역투로 문체가 변하더라고. 큰일이야~^^;” 다행히도 박정수는 '아빠가 쓰는 육..
<입속의 검은잎> 도시는 영혼을 잠식한다...2 # 보들레르와 기형도(1960-1989) 모든 대도시가 ‘불행’과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보들레르가 노래한 ‘파리의 우울’은 ‘서울의 우울’과도 들어맞는다. “1848년 이후의 유럽은 모든 인간적 관계의 외화(外化) 및 물화(物化), 분업, 분해, 엄격한 전문화, 사회적인 연결의 불투명화, 개인의 증대되는 소외와 반항 등의 모순들과 더불어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세계로 진입하였다.” 6.25 이후 한국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 바람과 개발지상주의 속에서 노동착취와 인간소외의 시동이 걸리던 시기에 기형도는 태어났다. 경제성장의 거센 회오리에 휘말려 함께 성장했고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 삶을 목도하며 어른이 되었다. 기형도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풍으로 누워..
<악의 꽃> 도시를 사랑한 자의 쓸쓸한 고백...1 # 그녀와 도시 (1971~) ‘도시는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곳’이라고 브레히트는 말했다. 그녀에게 서울이란 도시가 그렇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서울을 벗어난 삶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4년 전, 집안에 IMF가 닥쳤을 때도 채무를 정리하고 나니 네 식구의 서울살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주위에서는 서울 근교로 이사를 권했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살던 동네를 고수했다. 지금도 적은 평수에서 네 식구가 성냥갑 속 성냥처럼 끼어 산다. 일인당 할당 면적도 좁고, 도로는 엄청 막히고, 매연 심하고, 물가도 비싸고, 사교육 극성이고, 인심은 각박한 서울. 하지만 그녀는 도도한 한강은 물론 서울의 먼지마저도 사랑한다. 아니 싫은 만큼 좋아한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바라는 김씨에게, 이는 지극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