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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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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도 / 이희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
박정훈 사진전 - 시가 흐르는 얼굴들 간밤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사진전을 아직도 안 간 것은 의리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입이 헐고 피곤에 쩔어도 이럴 순 없다. 다음주 평일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당기기로 맘먹었다. 아침에 눈 떠 친구한테 전화했다. "박작가오빠께서 첫 개인전을 하는데 같이 가자." "그래? 니가 좋아하는 그 박작가 오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수십명이 넘는 사진가들과 취재를 다녔는데 친한 동료는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그 중에 사진가로서 존경을 보내는 이들은 둘 정도다. 그중 일인. 내가 장난삼아 박작가오빠라고 부르는 박정훈 선배다. 인물사진이 탁월하다. 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둘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 맞물려 사진이 깊고 아름답다. 김기택 시인이 '삶의 진액'이라고 표현해서 끄덕끄덕 공감했다. 그 사람의 정..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고작 열흘 만이건만 그새 거리에는 봄기운이 파다했다. 햇살이 눈부시고 바람이 간지럽고 피로에 눌린 탓에 원래 크지도 않은 눈이, 마치 열리다 만 셔터처럼 반쯤밖에 안 떠졌다. 그 작은 눈으로 노선 번호를 잘 알아보고 버스를 탔는데 그만 내리는 곳을 두 정거장이나 놓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내려 건너편에서 다시 버스를 집어타고 거슬러 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좁혀오는 버스 문틈사이로 겨우 발을 빼냈다. 내 손바닥 같은 활동구역에서 이렇게 해맬 줄이야. 아마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전지훈련 같았던 스위스여행에 익숙해진 몸의 소행이리라. 길을 취재하러 가는 길. 이번 테마는 경복궁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직진하면 나오는 통인시장 부근 한옥길이었다. 시내에서 약속을 잡을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