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체인가

[니체의답안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견디면서 누렸다.

자주색 하드커버의 무거운 책.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에 움찔했다.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근면이 도피책이고 도덕이 독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 같은 날들이 스쳤다. 정확한 뜻과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에게서 거대한 사유의 전복이 이뤄지고 있음을, 갈피마다 행간마다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멋스러운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념 과잉의 언어.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말들.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 삶을 위한 시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 이거였구나! 아이들 둘 키우고 집필 노동하면서 거기다가 공부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보니 등골이 휘는, 서른 후반 나의 존재론적 뒤척임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백 년 전 니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에 팍팍 꽂히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은, 살아있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힘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창안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규정했고 힘 관계로 생성을 설명했다.

니체는 하룻밤에 읽는혹은 ‘30분 만에 읽는으로 요약 불가능한,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처럼 순수와 영원을 탐구하고 개념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일상과 멀어지는 사유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 세속의 장을 특유의 문체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결을, 니체는 감히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또 얼마나 모던한가.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들을 추구해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니체는 진리의 노예이길 거부했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가 힘을 갖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것이 진리라고 했다. 삶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는 니체는 뼛속까지 삶의 철학자. 그래서 이 세계를 거부하고 저 세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비판하면서 신의 죽음을 고지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의 죽음은 중요했다. 니체가 말하는 은 그리스도교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에 복무하기보다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 등 이 시대의 모든 자명성을 으로 아우른다. 즉 니체에게 의 반대개념이다. “신이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신을 부정한 니체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친절히 안내한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

# 니체와 글쓰기

니체 철학을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구도로 접근하니 텍스트의 초점이 조금씩 맞춰졌다.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이것.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래서 삶은 질병이고,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니체는 비판하면서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하나의 병증일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나의 본능, 나의 욕망, 나의 충동에 관심이 쏠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고급한 충동으로 고귀한 욕망으로 신체를 잘 가꾸어야 건강한 삶이 가능함을 배웠다. 이러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무지, 나의 삶의 무능을 통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일찍이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나부터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일들에 휩쓸리다보면 내 정신은 뒷전이다. 주위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으로 살기보다 사장님 정신, 학원장 정신, 목사님 정신, 연예인 정신, 보험설계사 정신 등 각종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계획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처방.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은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들. 헛된 열망들. 오랜 집착들.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삶이 불만스러울 때, 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때, 니체의 표현대로 과거라는 돌덩이를 굴릴 수 없어 답답할 때, 나는 글을 썼다. 니체가 일러준 두 가지 가치평가의 척도. 자기보존인가, 자기초극인가. “그냥 살지?” “한번 해봐?” 두 마음의 난투극을 지켜보았다. 쓰면서 물었고 쓰면서 버렸다.

어쨌든 쓰고 나면 삶에서 집중해야할 문제들이 선명해졌다. 니체에게 훔친 아름다운 표현 하나, 문장 한 줄 벽돌처럼 끼워 넣고 싶어서 사유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니체와의 글쓰기는 파괴-창조의 유희를 선사했다.

 # 철학적 오페라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즉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했다. 어떤 우월한 사람이 구현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를 돌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로 말이다. 니체는, 그리고 글쓰기는 짧은 보폭이라도 나를 넘어서는 과정에 기여했고 삶의 벡터를 조금씩 틀어주었다. 내가 니체라는 연료를 넣지 않았더라면, 글쓰기라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장은 텅 비었으면서도 짭짤한 연봉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공부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일, 번듯한 학위도 내세울 경력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일, 니체를 읽고 글 쓰니까 좋더라며 손 내민 일...그렇게 용기 내어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면,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임러)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본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처음 <차라>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뿐이거늘이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진하게 그어두었다. 그 문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유행가 가사에 기대듯이 나는 니체의 말에 위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니체가 죽음의 설교자들에게비난하는 말이었다.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고 조롱한다. 나중에서야 그 뜻이 보였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른 게 보인다. 그것이 묘미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선과 대화와 감성이 어우러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가, 들뢰즈 말대로 철학적 오페라가 되리라 기대한다.

 

* 어쩌다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니체가 어떻게 나의 글쓰기를 자극했는가에 관한 고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을 시작하며 써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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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구마구 [2013.04.18 2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학자의 저서를 읽으려면 머리가 많이 부지런해야 되잔아요. 철학책을 읽으면 쉽게 피로해져요.ㅋㅋ. 몇장 못읽고 덮게되더군요. 아마도 그 대표작이 차라투스트라씨 얘기.ㅋㅋ. 고전은 누구나 내용을 알고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던데.ㅋㅋ. 차라투스트라는 내용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던데. 아마도 은유씨는 차라투스트라와 딱 맞는 인연이 작용했나봐요^^

    • 은-유 [2013.04.20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책이라기보다 문학책이기도 해요. 그 부분 때문에 저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칸트나 헤겔처럼 순수관념론자 책은 읽다가 포기했어요. ㅋ

  2. [2013.04.19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3.04.20 0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간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책보다 모순과 비루함과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게 좋은 책이죠. 필로폰네소스 전생사 사무실에도 있던데, 선생님 글 읽으니 저도 보고싶네요. ^^ 늘 지적 자극을 주시는 ^^

  3. 천마산 [2013.04.22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우며 가르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이 '삶'에서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는군요. 나이를 먹어가나봅니다. 근데 니체 너무 어려워요^^

    • 은-유 [2013.04.23 08: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자님이랑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다니 나이를 먹어가는 걸 느끼네요. 세월의 힘이 무섭;; ㅎㅎ 니체가 어려워보이는데 초점만 맞추면 의외로 단순한 측면이 있더라고요. 뭐 저도 헤매지만 ^^;

  4. 프루시안 [2013.04.23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체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반가우네요.^^ 치열하게 파고들때가 생각이나고 그로인해 맑았다 흐렸다하기도 했던..ㅎ ㅎ 처음엔 어려워서 둘러갔어요 지브란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를 통해 그리고 나이미의 미르다드를 거치면서 짜라투스트라에 접근했더니 용이하더군요.. 늘 이 곳에 계셔서 감사한 마음 놓고 갑니다. 건강하시구요~!

  5. 까탈 [2014.01.04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천국은 다른 곳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삶의 방식의 변화라는 말이 가슴에 꽂히네요. 혹시 짜라투스트라 추천해주시고 싶은 버젼 있으신가요? 옮긴이가 몇 명이라서요.

  6. 온화한 사람 [2015.11.10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체, 너무 큰 나무라서 올라기보다 바라보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가끔 그늘 아래에서 쉴 수만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7. [2017.06.16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시집> 말라르메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비포선셋책방]

나는 의미란 게 정말로 시에 덧붙여진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의심했다. 나는 우리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베껴놓은 문장이다. 어떤 글을 읽고 뜻도 모른 채 압도당할 때 가장 행복하다. 사고하지 않는 그 바보같은 상태에 빠지는 게 좋다.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그것은 절정 체험이랄까 -.-; 머리가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거다. 황현산의 문장들은, 나를 종종 찰나에서 심연으로 이끈다. 말라르메 <시집>을 읽는데 황현산이 5년간 고심했다는 번역과 해설이, 말라르메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다. (말라르메 시도 물론 정이 들려는 중이다. 더 여러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처음엔 공부하듯이 무슨 시를 읽는가 싶기도 하지만, 잡지 보듯이 한 번에 쓱쓱 이해하면서 시를 읽는 것이 이젠 더 이상할 지경이다.)

 

좋은 책은 반드시 서문이 훌륭하다. <시집> 역시 시적이다. 책에 대한 안내, 말라르메에 대한 이해에 도움 받았다. 아주 어렴풋이.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 정리해보았다. 발췌 요약은 예전에 자주하던 짓인데 올만에 해봤다. 쓰는 순간 휘발될 것이 분명하지만 쓰는 동안이라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아 좋다. 내가 쓸 수 없는 문장, 쓰다듬고 만질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말라르메의 시 쓰기는 실존의 고행이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다음은 황현산의 글을 정리한 것.

 

 

* 말라르메의 자리

말라르메는 프랑스 시 역사에서 가장 난해하고 형식적으로 가장 완벽한 시를 쓴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시는 말라르메의 절대적인 목표였고 생애의 사건 전체이기도 했다. “그는 시간 밖에서 시를 썼다.”(시트롱) 현재의 인간이건 미래의 인간이건 인간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 그 자체의 논리에만 의지하여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편집적으로 몰두했다. 36년 동안 완성한 시 작품이 70편을 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볼 때 말라르메는 보통 환멸의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인이다. 낭만파 문인들은 신과 우주의 섭리에 역사적 진보의 원리를 대입하여, 인류 해방의 이상을 전파하는 일이 시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고결한 이상을 품고 비천한 사회에 등을 돌리도록 저주받은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시는 현실을 부정하는 독백이 되었다. 말라르메는 이 환멸의 부정적 효과에서 언어 소통의 새로운 힘을 발견해내고, 독백과 그 표현법인 은유를 시의 운명이자 사명으로 여기는 가운데 새로운 시어를 창출했다고 흔히 평가된다.

 

* 무의 발견과 말의 소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자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근대 사회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역시 문제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의 실상이 우연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한 그 우연은 섭리의 한 과정이고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건강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병든 나무도 어떤 높은 의지의 표현이며, 활기찬 짐승과 죽어가는 짐승이 모두 제가 있을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 초월적 의지라는 것이 애초에 부재하는 것이라면 저 벌레 먹은 꽃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는 짐승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서구의 문화 전통에서, 시는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그 영감을 얻고 그 의지와 섭리를 옮겨 적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서 시인의 직업적 자부심이 비롯됐다. 신이 추방된 자리에 일반 물리학과 방불한 이성적 원리를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섬세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인격신이 보장해주던 서정의 영감을 거기서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특권적 물질이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진정한 것이라는 보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라르메가 허무라고 일컫는 것은 신의 결여, 곧 말의 진정성을 보증해줄 장치의 결여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리라. 결여는 진리와 미에 대한 확신 아래서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의 결여다.

 

그는 비천한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고 우연의 중첩일 뿐인 거친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시를 쓰려 하지만, 시의 언어는 존재의 필연적이고 고결한 양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잡다한 감정의 결합에서 울려나오는 빈말이 되어버릴 위험에 더 많이 직면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말라르메는 지금 모든 낱말에서 그 경험의 침전물을 제거하고, 그 여유 공간을 삭제하여, 말이 그 지시체와 충만하고 순결한 관계를 맺게 될 어떤 지점까지 시구를 파들어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실망스럽고 비루한 기억으로부터 그 사물을 최초의 순결한 모습으로 구출한다는 뜻이다.

 

이라는 말이 한 번 발음되고 소멸할 때, 우연하게 꽃의 모습을 둘러쓴 모든 물질의 꽃, 다시 말해서 현실의 꽃에 대한 모든 실망스런 기억이 함께 소멸하고 꽃이라는 생각만이 솟아올라야 한다. 꽃이면서 동시에 꽃의 부재인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데아는 순수 지성의 산물이지만 말라르메의 관념 그 자체는 우리의 물질 감각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순수관념은 끝없이 지성화 하려는 감성과 매 순간마다 감성화하려는 지성을 투명하게 결합하려는 열망이 있다. 말라르메의 시어가 노리는 순수 관념은 최소한의 육체적 계기,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유지한다.

 

* 순수 지성과 시인의 소멸

난해어법은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어법, 다시 말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다르게 말하더라도 그 역시 아니다라고 말하는 어법이다. 말라르메가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불교적 에 도달했다는 말은 필경 반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승들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언어의 논리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어법이 아닐까. 말라르메에게 중요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 부정되는 그 말들의 효과에 있다.

 

네가 꽃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의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서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상태에 놓인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운문의 위기)

 

*대문자의 책과 시집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책. 오직 내부의 질서가 존재할 뿐 바깥이 없는 책이다. 말라르메만큼 자신이 쓴 책으로보다 쓰지 않은 책으로 더 유명해진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에 신념을 걸고 백지에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발견된다. 불가능한 기획이 마침내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기획에의 천착이 자신의 시 쓰기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깊이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념이다.

 

실현이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책의 개념은 그의 시 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열망을 실현된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이기 이전에 포기될 수 없는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시는, 패배를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

들뢰즈가 쓴 <니체와 철학>에도 말라르메와 주사위가 나와 찾아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말라르메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현실부정적인 태도가 니체랑 반대되는 것은 알겠다. 말라르메는 부정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시인.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하는 긍정과 생성의 철학자니까. 다음은 알듯말듯 심오한 들뢰즈의 말.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를 우연과 필연이 두 항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식으로, 후자가 전자를 부인해야만 하는 식으로, 전자가 후자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라르메의 시가 세계의 이원성이라는 낡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연은 부인되어야만 하는 현존과 같고, 필연은 순수 관념 혹은 영원한 본질의 특징과 같다.

 

그러므로, 주사위 던지기의 마지막 희망은 어떤 성좌가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필연을 책임질 때,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 속에서 그것의 이해 가능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성좌는 주사위 던지기의 결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로의 이행, 혹은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그와 반대로 니체가 현존의 미적 정의에 대해 말했을 때 삶의 자극제로서의 예술과 관련되었다. 즉 예술이 삶을 긍정하고, 삶이 예술 속에서 긍정된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고,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주사위 던지기는,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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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촉촉핸드 [2014.11.29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다가 주인공인 내가 좋아해서 가지고 다니던 말라르메의 시집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찾아보니 검색되어서 잘 보고 갑니다.

상처의 철학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비포선셋책방]




# 무감각성, 무갈등성

한나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부제와 달리 내용은 재판에 관한 취재기사에 가깝다. 조금 지루하게 장대하게 묘사되며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한다. 악과 평범함을 조합시킨 이 강렬한 표현은 당시 큰 파장과 논쟁을 일으켰다. 요점은 이렇다. 한나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치전범 아이히만은 사악함이 전신에 흐르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평범성banality은 진부하고 익숙하여 일상화되었다는 시간적 혹은 강도성의 의미가 아니라,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악의 편재성을 뜻한다. 

'악의 평범성'은 고병권이 쓴 <생각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사유하지 않음의 풍조와 그로 인한 폐단을 언급할 때 여기저기 꽤 자주 인용된다. 심보선 시인도 영화 <화차> 리뷰에서 인용했더라. 김민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깊은 성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자기와 같이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악이란 망각의 선택이고, 그 망각의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일 것이라는 얘기로 마무리했다. 좋은 글이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무감각성보다 '무갈등성'에 가깝다. 악의 평범성은, 자기의 도덕적 감각과 살해행위라는 반도덕적 행위 사이에서 아무런 마음의 갈등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두 사실을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르게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도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무사하고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악의 평범함은 무감각성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심리적 무갈등성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탈개인화와 언어문제다. 아렌트에게 도덕은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치전범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탈개인화한다. 그들은 자기를 '기계'로 바꾸고자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개인성이라는 일말의 요소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마지막에는 무개인이 아니라 비개인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어떤 개인을 전제로 하는 도덕적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제 오늘 보니 이정희도 자신을 탈개인화하더라. 정당조직정치의 한계겠지만)

또한 그들은 암호화된 특수언어와 일상언어를 구별해 사용했다
. 그들에게 언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감정이나 생각이 임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검열을 했다. 그들은 암호언어와 더불어 유대인 문제를 일상영역과 무관한 특별한 영역으로 대할 수 있었고 감정의 흔들림으로부터 임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가령 유대인학살의 암호명은 최종해결책이었다. 이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는 인간 자신이다. 삶을 살고 그것을 언어로 직조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삶을 지시한다. 우리는 말로 이뤄져있다.

# 도덕과 합리성의 문제 

아렌트의 칸트 비판지점. 칸트에 따르면 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은 그 행동원칙이 보편법칙을 따를 때 실현된다. 하지만 이 도덕적 절대명제는 아이히만에게서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파괴된다. 아이히만은 주장한다. 나는 보편법칙(국가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 사실은 말해준다. 보편법칙의 합법성만으로는 도덕성이 구현될 수 없음을보편법칙이 절대명제가 될 때 개인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는 칸트의 도덕적 주체를 수정하고 소크라테스 이론을 따른다. 아렌트에게 도덕적 감각은 양심 같은 사적감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서적 도덕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것. 자기안에 들려오는 내적 정언명령을 따르는 도덕적 주체라는 얘기다. 이 주장은 아렌트 도덕철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개인의 도덕적 감각이 돌파구가될 때 아우슈비츠같은 역사적인 악은 양심 투철한 영웅의 출현으로 뚫어야하는  문제가 된다.

김진영 선생님은 도덕은 합리성과 무관하다. 합리적 도덕성은 보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했다. 도덕의 극점에는 연민이 있다고. (이때 연민은 니체가 비판하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고귀한 감성이다) 그 예로 니체의 토리노의 말을 든다. 니체는 말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뛰어들어 눈물을 흘린 뒤로 광기에 빠진다. 이전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렇게 10년을 앓다가 죽는다. 우리가 연민을 느낄 때 그것이 단순한 정서일까. 어떤 대상을 보고 슬픔을 느낄 때는 이미 사유가 작동한다. 독일은 철학의 나라다. 독일민족은 합리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민이 없어서 아우슈비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 보아도 합리적인 사람이 연민적인 사람보다 더 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니체가 그토록 독일민족, 독일적인 것을 비방하고 비판한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내가 니체에게 끌리는 이유도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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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구마구 [2012.03.23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네요.^^ 몇년 전인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처음 접한 뒤로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책은 거의 수집했죠. 사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은 잘 이해 못해요. 다만, 그녀의 학문하는 사고와 분석적이고 집요한 방법이 좋더라고요. 한나 아렌트 입장에서 보면 아이히만 같은 인간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수 있는데도 감정적 거리를 두고 분석했다는게 놀라웠죠. 워낙 타고난 천재이다보니 그녀를 따르긴 쉽지 않죠. ㅋ

    • 은-유 [2012.03.24 0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학문하는 태도가 남다르죠. 집요하고 분석적이고 날카로워요. 모든 훌륭한 철학자, 작가의 공통점이겠지만. 아렌트책을 온전히 다 읽은 건 처음인데 그 엄밀함에 놀랐어요; 마구마구님이 좋아하는구나^^;

  2. 삐삐 [2012.03.25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복잡한 사안이라 간단한 댓글을 쓰기 어렵지만 최소한 몇자를 남겨봐요. 하나 아렌트 컨츠로버시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우선 악의 평범함이란 유명한 말이 말 자체이상 분석적인 결론을 피하고 만 문제가 있지묘. 그리고 아이히만을 추적하면 조금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투철한 나찌였고 끝까지 유태인 사냥을 개인적인 신념에서 집요하게 했던 개인적 신념이 있었던 전범이고요. 아렌트의 왜곡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죠. 재판과정에 면밀한 분석에 대한 방법론적인 실수도 많이 지적되고요.

    아렌트의 저작에서 그가 독일 나찌 역사가들의 저서를 그대로 내면화한 나머지 반유태인적 문구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요. 그가 독일의 학계에 푹젖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런 독일적 훈련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는 지적도 많고요. 그가 피해자인 유태인들을 비판했다는 비판도 많고요. 벤야민의 절친인 숄렘과도 이 문제로 절교가 되었지요.

    저는 사실 아렌트 문제로 댓글을 쓰기에 자신은 없습니다. 그의 책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보기 전에 컨트로버시에 노출되어서 다른 급한 것들에 계속 밀리게 된 이유도 있겠고 여성주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렌트를 이해할 수 없어했던 것 같아요. 하이데거와 18살의 학생으로 사랑했던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이 드러난 후에도 평생 하이데거를 감싸고 그의 복권을 도왔던 것 같아요.
    이해가 좀 힘들지요. 아주 오랜된, 티비에서 토론하는 그의 클립을 본 적이 있는데 담배 줄창피우고 많이
    둔한 면도 있었어요. 이점은 저의 편견이겠지요.ㅎ 아마 이 모든 것보다도 가장 맘에 들지 않았던 점은
    그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과 미국 혁명에 대한 나은 평가등을 해가면 점점 미국식 리버랄리즘을 수용하는 그의 사고에 문제를 느꼈던 것 같아요

    과연 아렌트가 여성이 아니었던라면 이처럼 계속 회자가 될만한 학자일까?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사이에, 벤야미의 사촌과 결혼했고 그와 우정이 있었다는 유명한 지식인 남자들 사이의 여성으로 더욱 셀레브리티가 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한가지 개인적으로 궁금한것은 그와 메리 멕카시와의 우정인데요. 메리 멕카시는 괜찮은 미국 작가거든요. 그 둘간의 코드를 읽으면 아렌트가 좀 던 이해될 것도 같은데 그 편지글들을 읽기엔 급하게 읽어야 할 쌓여진 책들 때문에 궁금은 한데 제 인생의 시간이 다하기전에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ㅠ
    홀로코스트는 너무 방대한 주제이긴 해요. 유태인 내부의 논쟁이 엄청나니까요. 프리모 레비의 경우도 토리노의 유명한 유태인 작가, 나탈리 긴스버그와 갈등을 겪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둘다 켐프에서 생존한 극도의 드문 경우고 둘다 훌륭한 작가인데 유태인 문제에 대해서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에서 건건이 부딪혔어요. 결국 맥락을 좀 더 타고 들여다봐야 각각의 개인들의 위상이 잘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한국에서의 많은 관심은 미국족 뉴욕 인터렉츄얼에 대한 환타시 때문인가요? 이를테면 스잔 손테그와 같이 몇 몇 안되는 뉴욕 여성 지식인에 대한 매력 같은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ㅎ

    • 은-유 [2012.03.26 0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렌트는 유럽화된 유대인, 세속화된 유대인으로 '객관적 합리성'을 성찰의 뿌리로 갖고 있는 철학자였다고, 그 한계로 인해 홀로코스트 문제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들었어요.

      저야말로 아렌트는 하이데거 읽을 때 그와 연애한 제자로 이름을 접했답니다;; 꽤나 총명했다고, 오히려 하이데거에게 주요개념과 영감을 많이 제공한 여성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책을 처음 본 거라 호불호를 가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만 왠지 별 끌림은 없는 상태에요. 아무래도 여성지식인에 대한 희소성, 대가들과의 인맥 등이 그녀의 철학적 생명에 기여하는 점도 있어보입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한국에서는ㅋ

질병을 사랑한 니체, 운명애

[니체의답안지]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삶의 저주받고 비난받던 면 또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얼음과 사막을 더듬는 방랑이 내게 제공한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제를 전부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내가 체험한 이런 실험-철학은 시험적으로 근본적인 허무주의의 가능성마저 선취한다; 그렇다고 이 철학이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멈추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철학은 그 정반대에까지 이르기를, - 공제나 예외나 선택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 동일한 것,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삶에 디오니소스적으로 마주 선다는 것 -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니체전집 21. 16[32])



니체는 평생 질병에 시달렸다. 열두 살이던 1856년에 머리와 눈의 통증으로 김나지움을 휴학했다. 이후 내내 두통과 근시에 시달렸고 신체상의 통증이 없을 때는 자주 소화 장애와 우울증을 겪었다. 말년에는 발작 등 정신장애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날에는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1879년 편지)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나는 중병을 앓고 있던 때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저서를 위대한 건강의 표현물로 칭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건과 저서를 종합해보면, 니체는 질병을 변신의 기제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병 속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이 사람을 보라>

가장 큰 고통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남들한테도 몰락하고 생성하라, 파멸하고 창조하라고 말하는 걸까. “하늘에 이르는 환호를 배우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비애를 각오해야한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통기와 회복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 사유를 벼려가는 한 철학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니체는 스스로를 의사이면서 환자인 나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가 위대한 건강이라는 명명을 얻어내기까지 겪었을 엄청난 고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도 살아야할 삶.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가, 수시로 물었을 것 같다.

니체는 왜 살았을까. 인간을 허무적 위험에 빠뜨리는 그리스도교 이성중심주의 이천년 철학역사와 한판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이것은 사는 이유다. 저마다 사는 이유는 다르다.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등등 경험적인 영역이다. 이렇듯 사는 이유(reason)가 상대적이라면 사는 원인(cause)은 절대적이다. 심연의 철학자 니체의 탐구영역은 사는 원인에 가 닿는다. 인간은 무조건 살아야한다는 것. 아니,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살게 되어있다는 것. 내가 살고자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산다. 내 이성이 아니라 몸이나 감정이 사는 방향으로 나를 미는 힘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사유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며 신체적이고 본래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의 일이다.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체다. 금기와 원죄의 영토였던 몸의 재발견. 생에 대한 놀라운 복구본능의 체험. 니체가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긍정의 철학 나아가 운명애를 말하는 것은, 질병과 동고동락한 그의 삶의 조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증과 울증의 반복은 상승과 하강의 변화무쌍한 문체로도 드러났다. 사실 자체는 없으며 해석만 있다는 니체의 말대로, 삶에서 좋고 나쁨은 어떤 지평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질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그 경험에서 얻은 이익을 이렇게 규정한다. 

"오랫동안 끔찍할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흐려지지 않는 병자의 상태가 인식의 획득을 위해 가치가 없지는 않다. 깊은 고독과 모든 의무와 습관에서 갑자기 허용된 자유가 수반하는 지적인 이익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더라도,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내다본다. 그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저 보잘 것 없고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진다." <아침놀 114>

병을 통한 최고의 냉정함 회복한 니체는 또한 "수많은 종류의 건강상태를 거듭해서 통과하고 또 통과해야 하는 철학자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철학을 뚫고 지나가게 된다"고 자신한다니체에게 질병은 순전히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개체의 파괴적 고통은 세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신체를 탄생시킨다. 


.... 어느덧 내일이면 니체글쓰기 수업 9차시다. 두번 남았다. 시원섭섭증이 도진다. 운명애를 주제로 강의안을 쓰는 중에 앞장을 가져왔다. 글을 쓰면서 새삼 놀란다. 니체가 삶을 긍정하라는 것은 고통을 긍정하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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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오 [2012.01.09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업은 이제 한 번 남았네요. 글을 써야 하는데... 으악~~

    • 은-유 [2012.01.10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힘내. 지오씨. 완벽하게 쓰려고하지 말고 일단 써보자는 심정으로 초고를 쓰고 고쳐야겠지?^^ 나도 뭔가 정리하는 글을 쓰고 있는데 무척이나 꾀가 나네. 아흑 -.-;;

  2. [2012.01.10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2.01.1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질병이나 재난 등 같은 일을 겪어도 대응하는 자세는 저마다 다르지요. 그 분 사연 마음 짠하네요. 흔한 일이기도 하고.. 선생님과 다른 측면에서 저도 하는 고민이에요. 경제적 능력;;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없으면 저혼자서는 문화적 향유와 밥벌이가 불가능하거든요. 요즘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이들면서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일이 절실해집니다.

  3. 욱구 [2015.07.13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니체는 삶의 근원적 사실이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힘에의 의지 인지 규정할 수 없습니다. 삶은 생성으로서, 파토스로서, 하고자 함으로서, 힘들의 복수형으로서 현실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철학함 이라는 것이 새로운 세계 해석이고 구상이라 근거가 없을 수 밖에 없지만요.

    위버멘쉬(Ubermensch)역시 마찬가지 국면입니다.

    무엇이 위버멘쉬인지 규정할 수 없어요. 그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한다,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시도이며 몰락이요 과정이다, 번갯불이자 위대한 정오로 체험되어질 뿐이다, 나폴레옹의 경우가 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그저 이렇게 느끼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한다고 합니다. 동일한 것이 영원히 되돌아 오는게 생성이라는 거에요. 이때 동일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없어요. 규정될 수 없어요.

    순환의 유희이자 카오스로서 불가피하게 이 순간 혹은 이 삶이자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다시한번 영원을 의지하는 운명애를 지니라는 겁니다. 이로써 이 순간에 이어진 모든것이 필연적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경험만이 그리스도교적 도덕 대신에 최고의 경험인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근거없는 자기 주장이고 개인적 취향일 뿐입니다.

    니체 그는 독단적 망상가 입니다.



    ps:우주는 지금 빅뱅에서 시작하여 가속팽창 중에 있습니다.

니체와 장정일 사이에서, 보다 먼 이웃사랑

[니체의답안지]

목요일은 니체의 날. 토요일은 시의 날. 금요일은 괄호의 날. 육신을 가로로 뉘이고 이 괄호 끝에서 저 괄호 끝으로 빈둥거리면 하루가 저문다. 그러는 사이 니체는 나고 시는 들고 그런다. 오늘은 장소를 바꿨다. 영하9도의 바람을 가르며 도심 이끝에서 저끝으로 배회했다. 교보문고에 가서는 시집 코너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어떤 시집 제목이 눈에 달겨들었다. 이름하여 <아니리> 이제 저런 장단에 감전되는 걸 보니 국악프로 좋아하던 엄마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싶어 야릇. 그래도 입에 감기는 어감과 가슴을 떠미는 듯한 회오의 정서가 좋아서 아니리, 아니리, 세번 말하여 아니리. 하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영화 보기 전 예상치도 않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햄버거를 먹게됐는데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으려고 그랬나 보다. 일년에 햄버거 먹는 경우가 한 두번인데. 장정일 '찌찌뽕~'

"쏟아지는 햇살 가운데 하얀 십자가 하나
롯이 세워질 때 나는 생각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벽돌이 아무리 높아진들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이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과 근접한 구절.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좋구나. 니체를 읽어도 반니체적인 인간이 있듯이 니체를 읽지 않고도 니체를 사는 이들은 많다. 니체를 통과한 신체가 햄버거를 섭취하고 나니 장정일 시의 맛이 또 다르다. 맛있게도 냠냠. 

 -이상-의욕하지 않기, -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 이들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어제 수업에서 논의가 됐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생명은 힘에의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창조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닌 것. 무기력증이 얼마나 '크나큰 피로'인가를 얘기하는 대목이다. 그런 얘길 하는데 '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말. 평소에 행복해야지~ 나는 잘 살거야! 다짐을 일삼고 그리 살아보려다가 등골 휘었기에, 니체가 "너무 의욕부리지 말아라"는 뜻인줄 알았다고. 크게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고 했다.

창조적 오독이지만 분명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행복하라'는 지상명령에 심신을 혹사시키곤 하니까. 행복에 대한 강박만 있지 어떤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만의 욕망과 능력을 알고 나만의 행복을 만들어가지 못한다. 스펙 쌓고 배낭여행 가고 어학실력 쌓고 명품백 사고...행복이라고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하는 행위를 따르고, 외부인증에 의한 삶을 살다보면 정말 크나큰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노예적 의욕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없고 '자격증'만 남고 허탈하다. 이같은 반동적 허무주의에 휩싸여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것이 헛되다"며 삶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얘기를 니체는 하는 거다.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빗댄 구절.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이웃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의 표출이라는 것.  나를 가꾸기보다 이웃을 돕는 일이 더 표나고 쉬우니까 그리하는데 그 '타인지향적 헌신'의 정체는 알고보면 자기로부터의 도피 아니냐 니체가 묻는다. 이 구절도 오해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초롱샘은 '이웃사랑이 왜 나쁜가' 물었다. 니체가 옆집에 떡돌리지 말고 등돌리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고, 조카 수학도 가르쳐야 한다. 다만 자기자장에만 맴돌기보다 조금씩 시야와 관심을 넓혀가면서 망원렌즈로 세상을 보자는 것. 수학 잘하는 이모를 두지 못한 아이들도 공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궁리해보자는 거라고 설명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 교육문제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생님들.이런 활동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대형로펌에서 기업인수합병에 관한 일을 하던 변호사가 참여연대 간사로 들어간 것도 자기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는 예를 들어주었다. 초롱샘이 물었다. "그분이 나갔다고 로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다. 맑스가 자본론 써도 자본주의 건재하고, 안티조선 운동해도 조선일보 영향력 1위는 변함없고, 김진숙 고공농성승리해도 비정규문제는 남고, 한비야가 몇 십년 구호천사로 활약해도 빈곤아동은 여전하다. 그나마 그 미련한 사람들이 버둥거렸기에 99%는 저항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거다.

우리 수업에서 아아님이 돌쟁이 애기 데리고 수업을 받는다. 강의신청 전에 묻길래 "된다. 해보자"고 했다. 니체수업이니까, 니체식으로 창조적인 우리만의 수업방식을 만들자고 했다. 공부는 원래 하고 싶은 사람들이 '길'에서 모여서 했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게 민주주의 학습이고 우연을 필연으로 삼는 법이니 다른 학인들에게도 좋겠지. 물론 수업시간에 아이가 떼써서 산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아님으로 인해 다른 아기엄마, 예비주부 학인들에게 공부의 물꼬를 터준 셈이 되니까, 그 또한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는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알고보면 소박한 남자;인데 잘난척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온갖 허무적 인간유형, 천민근성 쩌는 사람들, 니체의 페르소나로 나는 읽힌다. 그 충동들, 거친 열정들을 크나큰 덕으로 가꾸어 멋진 책으로 엮어냈으니 그 질긴 엉덩이의 힘이 부러울 뿐이다. 

학인들이 써온 과제 읽으면서 세상 살아가는 다양한 얘기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애정행위의 근간이 된다. 고3담임 학인이 쓴 어느 학생이야기. 소위 노는 아이이고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집안형편이 어려운데도 1학기에 야자를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생 오빠 학비 마련 등을 이유로 2학기부터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는 안 하면서도 '등교'와 '야자'에 충실한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뭘까, 왜일까. 한준샘의 해석으로 우린 그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외롭고, 가족들 다 일하는데 나만 놀고 있으면 미안한데 일하기도 싫고, 그래도 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해도 친구는 있잖아요. 나 같아도 야자 할 거 같아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으면서 니체바깥에도 눈 돌리라는 것. 장정일 버전으로 이거다.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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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구마구 [2011.12.17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읽고보니 니체 어르신이 구체적인 얘기 하신거군요. 그 어르신 이름만 알고있으니 뭐라고 글을 썼는지 모르는데, 왜 이해못하게 어려울거라는 편견을 갖고있는지 모르겠네요.^^;; 시읽고, 니체 공부하시고, 진정한 선비의 삶이 아닙니까.ㅋㅋ. 몇일전에 정명훈의 연봉과 막말을 두고 진중권과 목수정이 설전을 벌이던데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예술가, 20억을 연봉으로 줘도 아깝지 않다는 견해를 어떻게 생각해요? 계속 그게 머리속을 떠나지 않네요.

    • 은-유 [2011.12.18 2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수업에서 복습민원 들어오는 중ㅎㅎ 니체랑 감성이 안 맞는 사람들은 어려워하더라고요. 맞는 사람은 좋아라하고. 양분됩니다. 마구마구님도 읽어보셔요. 궁합이 맞는지. ^^
      /논쟁은 몰랐네요. 요새 진중권 왜그러심?ㅋ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어법이 강한 이데올로기죠. 정명훈이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20억 독식하는 체제가 속터집니다. 오케스트라단원들은 해고당해서 길에서 싸우는데..

  2. 연초록 [2011.12.18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밤 우리집에서 스페인어 교실 송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어 수업에 참석하는 5학년 여학생 두 명의

    3학년 남동생들을 포함하여 (그 아이들은 둘이 친한 친구랍니다.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은 동네가

    달라졌는데도 너무나 친한 누나들, 남동생들, 그래서 짝꿍으로 모임에도 나오고요 ) 리코더에서 시작하여

    하모니카, 클래식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등장한 음악회, 가장 압권인 것은 첼로를 오랫동안 배운

    6학년 아이가 5학년 아이에게 재능기부로 한 달 동안 가르친 것으로 그 아이 둘이서 합주도 하고, 독주도

    한 것인데요, 그것을 신호로 서로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는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입니다.

    스페인어 반은 아니지만 다른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말하자면 행복한 왕자의 피아노 지존이라는 6학년

    남학생이 특별 찬조 출연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중 받은 한 통의 전화, 오래 전 함께 공부하고 지금은

    예고에서 작곡을 공부하는 한 남학생이 여동생을 통해서 이 음악회 소식을 듣고는 백건우 피아노 독주회가

    끝나고는 (그 표를 미리 구해서 전체 음악회에 다 참여할 수 없었노라고 ) 지금 가도 되냐고 묻습니다.

    물론 대환영이었지요. 자신의 작곡과정을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꿩이라는 한 작품을 다 연주하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조리있게 늘어놓아서 함께 한 자리, 오히려 어른들은 몰입해서

    이야기를 듣고 지루해진 아이들은 다른 방에 들어가서 신나게 노는 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저는 장소만 제공하고 어른들이 각자 준비해온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오늘까지 저는 일용할 양식이

    넘치고 있네요. 원래 10시 예정이던 음악회가 밤 11시 30분에 끝났습니다.

    내년에는 군대에서 돌아오는 성악하는 남학생이 있어서 아마 다 풍성한 음악회가 될 것 같은데

    제가 어른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함께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년에는 강남 역사 모임에서 단 한 곡이라도 일년 정도 준비해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작곡 전공인

    멤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박치, 음치 몸치라고 주장하는 몇 몇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서요. 집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도 나와서 가능할 것 같아요.

    5년 이상 다닌 음악회에서 숱하게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들었지만 서툴지만 참가자 한 명 한 명을 다 아는

    이런 음악회의 매력이란 정말 비교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를 포괄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씩 실천할 수 있었던 2011년은 제게 가장 충실한

    한 해가 아니었을까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은 해이기도 했답니다.

    • 은-유 [2011.12.18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우! 멋진 풍경이 그려지네요. 연초록샘 꿈 이뤄가는 나날들이네요. 제 가슴이 다 설렙니다!!! 아이들도 얼마나 좋았을까..꿈과 지식과 좋은 추억 심어주는 좋은 일 하고 계십니다.^^

  3. [2011.12.18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1.12.18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귀한 인연이 될 것입니다. 자주 만나면 그런 선입견은 봄눈처럼 녹아버리니 걱정마셔요. 낯선 힘과 만나면서 내 안에 새로운 힘이 생성되고 그렇게 서로 멋진 변화를 이뤄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 같아요. 선생님은 잘 하실 거에요. 그 아이와의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의 물꼬를 터줄 거 같네요..요즘 제 주력관심사가 그쪽이라서..언제 만나서 얘기나누고 싶네요. 여행 다녀오심 한번 봬요^^

  4. 마구마구 [2011.12.19 0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긴하죠. 어후. 판단을 못하겠네요. 뭔가 왜 이리 복잡한지.^^

  5. 삐삐 [2011.12.19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반도 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녔던 음악가, 윤이상님의 음악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씨디중의 하나는 알렉산더 라이브레히의 지휘로 윤이상의 쳄임버 심포니 일번이 있어요. 2008년 녹음인데 지휘자가 불과 40대 중반정도의 젊은 독일인 지휘자인데 윤이상 선생의 삶과 음악을 훌륭하게 이해하고 감동적으로 녹음한 씨디입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좀 위험한 쥐향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같아 가급적 피해왔는데 정씨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연루할 수 밖에 없네요.ㅠ

    간단히 말해, 재계약이 너무 가슴 아프더군요. 별기대하지 않았지만 새 시장의 그것이 최선이 었을까, 왜 스켄달이 있는 전 지휘자의 계약이 자연스레 끝났다면, 해고의 부담없이 훌륭한 새 지휮자를 찾으면 좋은데, 이미 지난 6년간 천 이백만불에 가까운 천문학적 숫자의 서울 시민의 세금을 챙긴 인물에게 또 거금의 재계약, 3년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점검을 하는 기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다는 사살이 가슴을 치게 만드는 거지요. 서울시민들은 어디로 증발한 것입니까?

    첫번째 간단하게 서울의 미디아는 정씨의 정규직, 프랑스 라디오 오케스트라 지휘자 계약금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알려진다면 서울에 상주하지도 않으면서 과연 일년에 몇시간의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보수에 엄청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그런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고요. 일단 상식적인 계약은 몇 몇 직장 광고가 나가고 지원자중 몇 명 최고의 사람들을 정한 뒤 그들을 초대해서 음악을 지휘하게 해보고 교향악단원들과 인터뷰, 그들의 평가, 어떤 방향으로 문제를 개선하고 그들이 갖는 개성을 찾아내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최선의 후보를 선정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한국인으로 이름이 난 지휘자를 어떤 식으로든 고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근원적인 문제인거지요.

    진중권씨는 반성해야겠지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나요. 19세기적 조악한 진화주의 입장도 보이고, 예술에 대한 읽기에선 본인의 읽기는 없고 남들의 읽기만 단편적으로 가져와 이야기하는 식인데 큰 한계죠.. 마찬가지로 그가 영화읽기를 쓰는데 영화읽기를 잘 하지 못하고 있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고요. 그가 곽노현씨가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논지는 맞는 논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를 정씨의 계약에서 서울시와 정씨간의 시민세금을 갖고 벌인 거래에 대해선 예술계, 그대로 자유롭게 놔두어야 한다는 그의 논지는 상식이하의 한심한 논리인 거지요. 그가 진보당 회원이면서 재벌 조찬에 강연했다던가, 환경운동가들이 에너지 문제, 지구온난화의 문제에 대해서 아픈 가슴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혼자 비행기 타는 취미를 누렸던 것은 이미 상식을 가진 사람이란면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런가 하면 한겨레 신문의 문제가 너무 큰 것도 같고, 이런 진보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니체의 과제였다고 봅니다. 지적인 인테그리티를 최대로 추구해얗 한다는 지향점을 실천한 글쓰기와 삶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짜라.. 에서 나오는 각각의 퍼스나를 그가 극복해야했던 자신의 배경이었다는 것은 저도 그렇게 했어요. 심지어는 그의 여동생과 공유하는 그의 모든 정신 문화적 헤리티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직하게 투쟁해온 그를 배워햐 하는 겁니다. 니체는 절대로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오역을 하려고 든다면 한없이 위험할 수 있기도 하죠. 로쟈라는 분이 짜라..는 니체의 가장 어려운 텍스트인데... 뭐 어떤 이야기를 매체에 썼던데 그 분은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해요. 짜라... 는 니체의 저작중에 그의 철학에 배경이 없이도 가장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에요. 로쟈라는 사람도 한국의 인문계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올라오는 같던데 이미 진중권씨와 같이 문제가 보여요. 심지어 제가 확인해본 것도 아주 적은데요.ㅎ 여성들이, 정상적인 여성들이 좀 더 글을 적극적으로 쓰고 이들과 경합을 좀 벌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여성들이 다 사라지니까, 모든게 독점화하는 사회에서 문화정객, 진중권, 로쟈 이런 분들이 자유무대를 갖고 있는 것도 같고요. 그리고 한겨레, 경향과 같은 진보의 글쓰는 분들이라는 점이 우리사회의 힘든 부분인 겁니다. 어떻게 진보에서 제대로 된 글쓴이를 찾을 수 있나, 최소한 도정일 선생 정도의 젊은 글쓰는 자들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글이 준비된 젊은 사람들이 부재하는데는 인터넷 시대의 문제인지 개인의 문제인지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 은-유 [2011.12.21 0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리가 되네요. 지휘자는 그와 함께 음악할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등 어떤 절차를 밟아서 뽑아야하는 게 맞습니다. 세계적 명성이 있으니까 떠받들고 무사통과 되는 일은 뿌리깊은 우리나라의 엘리티즘 때문같아요.
      진중권은 본인이 계급적 한계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배웠다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계급적 혜택이고 기득권이죠. 어떤 형태로든 상위1%잖아요. 그 자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고요. 요즘 저는 회의하고 있어요.'나는 남자들과 불화하는 존재인가'를 화두로요. 괜찮다고 생각한 동료들도 궁극에는 남성적인 면모가 보일 때 절망합니다. 한판 붙으려면 힘을 키워야하는 건가요..ㅎㅎ

  6. 마구마구 [2011.12.20 0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삐삐님. 완전 전문가 의견이시네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머리와 가슴이 일치되질 않아요. 그게 언제나 문제죠. 10대 시절, 서정주가 친일파란 것을 알고 싫었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했고요. 반미, 반일감정 충만했지만 엑스제팬과 너바나 음악을 포기못해서 지인들 몰래 들으며 감동했죠.ㅋ.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 음악이 인간 심성에 필요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했었죠. 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요. 예술은 공공재니까 세금으로 지켜주는게 맞겠죠. 김연아나 박지성, 배용준이 수십억, 수백억씩 버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좋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이 벌면 안되는 것일까싶고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의 예술만 즐기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아. 예술가의 '똘끼'를 좋아라하는 저로서는 어떤 입장을 정하기 어려운 문제네요.^^

    • 은-유 [2011.12.21 0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연아, 박지성이 벌어서 정명훈도 괜찮다는 얘기에 넘어가지 맙시다. 삼성만 비리저지르나 현대도 엘지도 악덕기업아닌가..조선일보만 왜? 중앙일보나 동아일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말은 물타기에요. 문제를 느끼면 하나씩 그 자리에서 바꿔야죠. 정명훈 연봉계약을 통해 일과 돈에 대한 건전한 논쟁과 절차를 밟았으면 이를 계기로 스포츠,연예인 등 고소득층 소득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 있어요. 돈이 신이 되어버리는 세상의 상징적인 존재들이니 중요한 문제죠..

  7. 마구마구 [2011.12.21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유지되는 속에서 상업성없는 예술분야도 그 높은 질을 유지할 수있게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등등 뭐 복잡했네요.^^ 물타기 논리에 휩쓸릴 수 있다는 의견도 중요한 지적이네요.

  8. 삐삐 [2011.12.21 0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구마구님,ㅎㅎㅎ 감연아와 박지성, 백용준에게 주는 돈이 시민의 세금 입니까? ㅎㅎㅎ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형적이지만 직업 풋볼 선수들이 풋볼 주식회사와 광고업체로 부터 돈을 벌게 되니까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그들이 벌 수 있는 거지요. 정씨가 자기 씨디를 수백만장 골든 디스크로 팔아 수천억을 치부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시민 세금을 그렇게 썼다는 것이 문제인 거지요. 전 솔직히 어는 개인이 큰 욕심이 있어서 맥락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는 만큼 돈을 챙겼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심사나운 사람들은 일반적이니까요. 정씨의 문제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의 행정에 대해서 분노하는 거에요. 정씨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의 음악회를 가지 않고 그의 씨디도 사지 않고 그러니까 그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를 음악가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니라 그의 음악에 대한 미지근한 해석 연주성때문이에요. 그가 아니라도 좋아하는 지휘자들이 꽤 있으니까요. 감동에 감동을 먹게 하는 사람들이고 솔직히 그들의 정치적 배경도 모릅니다. 감동을 주는 젊은 지휘자들 볼 때면 저들이 제 나이가 되면 어떤 해석을 할까 그것이 궁금해서 그때를 듣지 못하게 되는 세대라는 것이 아쉽게 한숨을 쉬게 되는 순간을 갖은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좋아했던 예술가들이 정치적으로 저를 당황시키는 경우는 극히 제한된 경우인 것 같아요.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따지기는 해요.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시작한 점이 어디에 있던 따지는 과정을 지나 원점에 관계없이 예술가들이 변화에 나가겠지요. 니체가 그렇게 좋아했던 바그너 음악에도 불구하고 후에 배반감에 떨면서 그를 인정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극복하면서 열어갔던 생각의 지평도 생각해 볼 만 하고요. 목수현씨는 정씨의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좀더 고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개인이 좋아하는 것과, 그 상대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게 되는 형국을 사심를 떠나 냉정하게 분석해 볼 수 있는 시각은 나누어질 수 있어야겠지요. 이렇게 쓰는 이유는 저는 올바른 예술이란 것이 객관저으로는 없고 어떤 입장의 사람들에게만 그들에 한에서만 올바른 예술이란 것을 이야기 해볼 수 있겠기 때문에 좀 분명히 하려고요. 제 미학적 감성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그 예술이 나쁘고 저질이라 생각한다면 스탈린이 되는 거겠지요.ㅎㅎ 사실 항상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예술이 따로 기준으로 있고 거기에 따라 제 감성을 눌러온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좀 편하게 산 셈이지요. 우연히 다행인 경우도 많고요. 제가 좋아하는 이상의 시들이 젊어서 어느 기회에 일본어로 씌여진 원시로 보게 되었을때의 묘한 느낌등, 그런 섬뜩한 느낌등은 저를 갈등하게 하기 보다는 더욱 그를 이해하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그가 너무 일찍 병사했기 때문에 저는 갈등을 덜하지만 오래 살았더라면 서정주씨 같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한가지 집고 넘어갈 사실은 일제때 조선 시인들의 평균수명이 삼십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물론 위생적인 문제로 병이 창궐새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쉽겠지만 다른 맥락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국화꽃 같은 누님이여가 왜 그리 훌륭하다는 건지 어려서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했던 시적 정서가 메말라서 그런 갈등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ㅎ 제가 피아니스트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연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후에 보다 알게 되면 괜찮은 판단들을 해 온 사람들이더라고요,하지만 운일 수도 있겠죠, 화학적 교감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맬락이 그럴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요.ㅎㅎ 하지만 분명히 배반의 고통으로 마루를 대굴대굴 구르는 누구든 인생에서 피해나가긴 힘들겁니다. 아무리 좋은 선구안과 감각을 지녔다하더라도요. 그런 사람들이 허밋이 되는지도 모르지요. 어떻든 올바른 예술은 개나 줘라, 이런 말을 심하게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김정일씨가 하시다 가신거겠지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예술이요. 저는 정씨의 음악에 그렇게 무관심해도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넬슨 프레이리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협연한 사실을 알고는 잘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넬쓴 프레이리는 저에게 매우 퍼스널한 연주가이고 그런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한국의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런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지요. 넬슨 프레이리 씨디는 어디에든 널렸고, 심지어 유튜브에도 수없이 깔렸을 텐데요. 물론 연주를 직접 듣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지만 어차피 그런 연주는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갈 수 없을 만큼 비쌀 것이고 , 아니면 그런 음악에 취향이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시민의 엄청난 세금을 써야 하는 건가 하는 거지요. 그리고 무었보다도 그가 받는 수준의 돈은 시세가 아니라고 보여요. 제가 음악계 전문인이 아니라 시세를 정확히 모르지만 프랑스에선 절대로 돈을 그런식으로 많이 주지 않을 것 같아요. 대학 선생 연봉도 그렇고 정치가들 연봉도 그런데 국가산하 단체의 라디어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가 얼마를 받고 있는지? ㅎㅎㅎ 왜 프랑스는 그렇게 고용하는데 서울시는 정씨에게 그런 대우를 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지요. 프레시안 기사에 외국의 최상급 지휘자 급여는 주로 미국쪽의 급여를 보여주고 있는데 미국과 유럽의 급여차이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체제에요. 그리고 유럽엔 훌륭한 지휘자가 많습니다. 자신들의 문화니까 판소리 명창이 우리에게 많은 것과 비슷한 경우겠지요. 물론 지휘자 자리가 매우 정치적인 거라 실력과 비례 하는 것은 아니기도 합니다만, 세이지 오자와가 있는한 정명훈을 세계무대에서, 빠리에서 지켜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서울시의 재정을 이런 식으로 몰고간 이유로 볼 수는 겁니다. 진중권씨는 코레아니쿠스에서도 드러나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숨은 민족주의자에요. 아마 그런식으로 정씨의 계약거래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추즉이고요. 민족주의 입장에서 재벌들에게 조찬강연했겠지요. 그런 입장에서 그의 인기가, 한겨레 신문이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다 관통하는 문제의 흐름일 수도 있고요. 제대로 이유가 있는 민족주의를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문제를 일으키게 한다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겠고요. 아닌가요.

  9. 마구마구 [2011.12.21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한번에 한가지씩만 알려주세요.^^;;; 두분의 의견은 신중히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인간문화재 지정해서 판소리, 정악, 탈춤 그리고 김금화씨가 하는 무속춤 그런거 보존하거든요. 세금으로요. 상업성이 없어서 시민의 극소수만 즐기니까, 그대로 두면 말라 죽을까봐요. 그런 생각도 들긴드네요. 여튼, 저도 그의 연봉이 적정한지는 모르니 뭐라 할 수도 없군요. ㅋㅋ.

  10. 삐삐 [2011.12.2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 문화재를 지정해서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당연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해도 그런 영역의 예술을 하는 분들을 보조하는 일이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하려면 한 개인에게 한정된 세금을 갖고 그처런 큰 돈을 몰아줄 수 없는 것이 이치인 겁니다. 상업적 논리나 대중적 인기에 관계없이 세금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어려운 입지의 전통문화 하시는 분들과 이미 성공적으로 맘껏 클라식 음악하는 분을, 현재 상임지휘자 직장을 갖고 있는 분을 같은 소수자 취향의 예술 보조 문제로 놓고 볼 수는 없고요. 그분중 어느 분이 정명훈씨가 갖어간 돈에 상응하는 돈을 받고 있지는 않으리란 생각입니다. 그들이 전통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만큼 생활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은 건전한 문화정책이고 정부차원에서 지방 정부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겠지요. 세금으로 문화를 보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부조리한 거금을 쓴다는 것이 문제라고 못박아야겠네요.ㅎ 저도 은유님이 지적한 듯이 한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든 엄청난 양의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히 문제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법적으론 세제를 통해서만 이런 문제를 조정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니체와 함께 한 11월

[니체의답안지]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것인가, 과연...가을강좌 모집도 끝나고 연말이 다가오는 어수선한 11. 개강시점으로 참 애매한 때다. 근데 공부를 꼭 3월이나 9월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나의 준비가 그때서야 완료됐으므로 공지를 띄웠다 

참 이상한 기다림. 연애할 때 전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한다. 내가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이 얄궂음을 당하는지, 며칠 동안 후회했다. 나를 외부에 개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폭풍마감은 아니고 가랑비에 젖듯이 열다섯 명이 찼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 글쓰기의 최전선 12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강의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위안, 계속 헛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허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차라투스트라 말고도 두꺼운 니체저서를 다시 뒤적여야했고 난해한 니체의 언어에 짓눌릴 때,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또 번뇌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난리인가. 대충 살지, 나도 참 애쓴다... 근데 그 터널만 지나고 나면 또 반짝 살만했다. 빈대떡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 대범함과 심약함의 진자운동.  

흔들리는 소리가 학인들 사이에서도 들린다. “, 이렇게 써도 되나요?” “이게 맞나요?” “니체 원전을 더 읽고 차라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요?”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을 강요해온 교육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니체를, 니체의 위험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론적 정합성을 따지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모델을 찾으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 니체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단아다. 불친절함의 최고봉은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러니 문학적 감수성과 독해력이 없으면 삶의 경험치가 적으면 읽기가 힘들다. 니체도 말했다. “차라투스트라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삶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몇몇 문장에 도취되지 말고 반드시 자기의 사유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차라를 읽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제안했다. 나는 이 수업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과 지식이 어우러지는 철학적 오페라를 기대한다고 

거창한 출사표. 과한 의미부여가 때로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지식-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삶에 대한 나의 선호. 다른 세상에 대한 나의 눈물겨운 동경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어떤 책을 읽든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앎이어야하는가’ ‘나는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보학 관련해서 푸코 책을 뒤적이다가 나의 원초적 물음에 응하는 빼어난 문장을 만났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성의역사2>







Chopin's Waltz Brilliante Op. 34, No. 1 in A Flat Major by Lang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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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초록 [2011.11.18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유너머에서 고병권 선생이 스피노자를 불어로 읽었다고 인용하는 구절에서, 정말 그는 불어로 스피노자를

    읽는가 순간 의심했고, 그렇다고 3개월 죽도록 읽고 나니 글이 보였다는 말에 촉발되어 시작한 불어, 그는

    그 말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촉발시켰는지 몰랐겠지만 그렇게 시작한 불어 공부가 이제는 사전을 찾으면서

    동화를 읽기도 하고 분노하라를 더듬거리면서 읽기도 하고 야수파에 관한 논의를 더듬거리면서 따라가게

    되었네요. 물론 더디고 더딘 걸음이지만, 금요일 오페라 모임에 가기엔 하루가 너무 복잡해서 못 간다고

    연락하고 마일즈 데이이스를 틀어놓고 월요일치 예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앗, 여기까지 그러고 조금은 쉬고

    싶다는 생각에 원두커피 티 백을 하나 꺼내 커피 마시면서 놀고 있던 중에 들어와보니 니체 강의 이야기가

    올라와있네요.

    신문보기가 겁나는 시간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매일이 새롭고 신선하다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하루 하루를

    살기도 하는 분열하는 존재, 그래도 역시 살아가야 한다면 생생하게 하루 하루를 느끼면서 살고 싶다고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면 폐교에 방을 하나 구해서 운동장에서

    여럿이 어울려서 운동도 하고, 방안에 작업실을 꾸면서 못하지만 하고 싶은 그림도 그리고 어울려서 악기도

    연습하고,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재미를 나누어주고 싶기도

    하다고 요즘 꿈을 꾸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요?

    • 은-유 [2011.11.19 0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폐교계획 근사해요~말씀하고 다니세요. ㅎㅎ 신문에서 매일 심란한 기사만 보다가 오늘은 로펌변호사에서 참여연대 간사로 간 분 인터뷰기사 보고 모처럼 마음이 좋았네요. 화폐축적욕망에서 벗어나 자기의 좋은 삶을 가꾸다보면 세상도 좋아질 것 같아요. ^^

  2. 마구마구 [2011.11.19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해도 나빠질게 없는 자유라... 좋네요.ㅋ. 축하합니다. 일신우일신 하시네요. 난 어제밤에 드디어 뜨개질 목도리 완성! ㅋㅋ. 눈감고도 뜰 수 있을때까지!!!

  3. 천마산 [2011.11.22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전 마누라 손에 이끌려서 '모래사원'이라는 이탈리아 밴드의 공연을 보러갔었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45분짜리 곡이 연주되었는데 그 감흥이 다시 생각나네요. 나이를 먹어가나봐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이제 머리의 생각보다는 가슴이 먼저 느끼네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삶과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연습이 더 많이 필요한가 봐요. 당신의 글을 보면 늘 내가 초라해짐을 느낍니다.^^. 공부해야지...^^

    • 은-유 [2011.11.22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자님 음악회도 보러가시고 멋진 걸요~ 차라투스트라라니 궁금하네요. 공부해서 열심히 실어나르겠습니다. 뭐라도 나눌 게 있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ㅎㅎ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썼다"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의 글은 시적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특유의 운율에 녹아있습니다. 짧은 경구와 비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니체가 독자를 선별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 시적인 니체의 글은 내가 원한다고 읽을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물음을 가졌을 때만, 그 절실함의 강도만큼 문장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힐 것입니다. ‘나는 니체를 읽었다가 아니라 니체가 나를 습격해왔다! " 니체와의 만남은 내가 낯설어지는 체험이고 삶을 창조하는 실험입니다.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좋은 글쓰기 교과서입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메시지, 치밀한 비유와 유려한 문체는 폭풍과도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실제로 출간 당시 고도의 문체연습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인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내려온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니체철학을 살펴보고 나를 찾는 글쓰기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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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다음 날

[차오르는말들]

명절 전날, 그러니까 여친과 헤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받아들여. 이유를 따지지 마. 이 세상에 논리적 인과성을 비켜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너처럼  헤어진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렸던 인생선배들이 얼마나 처참히 버려졌는가를 예로 들며, 나는 연애사건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연신 설파했다. 내겐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현실로 닥쳤다. 여자에겐 결혼이 삶의 불합리를 체험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제도장치다.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유형인 나조차도 대 시댁관련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한다.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제사나 명절은 일박이일 극기훈련 가는 기분으로 임하며 실제로도 혹독한 타자체험의 장이 펼쳐진다 

시댁은 그 자체로 모델하우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적재적소에 정물처럼 놓여있다. 먼지가 침입할까봐 베란다와 부엌 등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고리까지 걸려있다. 숨이 턱까지 막히는 적요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시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주름 잡힌 정장바지를 입고 고상한 단추가 달린 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물일을 하신다. 말이 없으신 시아버님은 늘 신문이나 책을 보며 시동생과 신랑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시댁에 갔을 때는 이 장면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명절이라 하룻밤 자고 올 때는 빳빳하게 풀먹인 이불마저도 왠지 부담스러웠다. 행동이 부자유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유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레알 감옥이었다.

위생종결자 시어머니의 살림살이, 특히 주방용 가재도구는 신상의 광택을 자랑한다. 수세미는 싱크대용, 냄비용, 일반용, 행굼용 등 종류별로 너댓 가지다. 처음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릇은 찬물로 닦고 뜨거운 물로 소독한 후 얼룩이 남았는지 형광등에 비추어본다. 다이아몬드 보석이 번쩍거려야 싱크대에 들어간다. 신혼 때 설거지 불합격 판정을 몇 차례 받았다. ‘결혼 전에 배우지 못했구나!’ 난데없는 모녀 비하발언에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어느 해 명절에는 유학 간 후배 두 명에게 연달아 국제전화가 와서 자리를 비웠다가 시댁에 와서 일은 안 하고 전화만 한다는 뒷말을 들었다. 온통 불가해한 상황. 무기력했다. 시어머니의 도덕적 판단은 나의 경험세계 외부의 영역이었기에 그에 대응할 어떤 언어도 찾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명절이면 무슨 직장 상사와 숙박면접을 보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날벼락은 명절 포함 일 년에 네 번 정도 국지성 호우처럼 지나갔다. 그 비를 쫄딱 맞고 나면 감기처럼 일주일을 앓곤 했다.

결혼 십년 지나고 이십년 가까이 되자 시어머니 기력이 쇠잔해지고 당신이 몇 차례 풍파를 겪으면서 요즘은 비교적잔잔한 호수 국면이다. 청결감각은 여전하시다. 엊그제는 가만히 시어머니의 동선을 바라보았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가는 동작들. 계란을 꺼내면 손을 씻고 싱크대 문고리를 잡고서도 비누칠해서 손을 닦는다. 후라이팬은 그렇게 자주 쓰는 데도 먼지가 앉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묶어놓는다. 전을 부칠 때는 기름이 튈까봐 바닥과 싱크대 조리대에 신문지를 깔고, 끝나면 걷어내고 재차 걸레질을 한다. 요리와 요리 사이, 베란다로 나가더니 위생장갑을 끼고 커다란 락스통을 들고 오신 시어머니 말씀하신다. “싱크대 소독해야 돼!” 나는 순간 시어머니가 마스크를 쓴 방역과 직원으로 보였다. ‘여자가 일 못하면 죽은 목숨이고 일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시어머니는 가사노동의 시간을 최대한 늘림으로 인해 자아존중감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덕분에 나의 명절 노동량은 많지 않다.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책을 보거나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옆에 서서 주방보조 노릇을 하며 시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야 한다. 명절날은 차례상을 물리자마자 전신 명품으로 치장하고 나타나는 친지에게 무상급식 투표율 60%에 빛나는 그사세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듣는다. 내용은 입에 금수저 물리려는 부모들의 영웅담과 승진과 출세담, 건강정보 등 온통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얘기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드라마처럼 매번 재생산되는 이야기가 한없이 지루하다. 그렇다고 리모콘으로 끌 수도 없다. 귀 있으니 들려온다. 선택한 적 없고 원한 적 없는 그들과의 배치에서 내 의지는 교란 당한다. 한참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낯설어진다. 신경질 난다. 나 혼자만 덩그마니 초라하다. 외롭다. 몰랐다. 크게 하는 일도 없는데 대관절 명절이 왜 피곤한가. 이번에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 없고 할 수 있는 이 없어서 그런 거 같다수동성의 장에 던져진 채 의욕하지 않기’ ‘행하지 않기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극도의 피로함이 밀려올 밖에 

기름이 배이고 소란이 지나간 머리를 식히고자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밤 9시 집을 나섰다. 단지 앞 파스쿠치에서 갔다. 2층 창가로 플라타너스가 하늘거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젊은 친구들이 혼자서 혹은 연인들이 기대어 앉아 노트북 켜고 공부하고 있다. 그 밤에 자리가 꽉 찼다. 겨우 한 자리 구해 앉아서 라즈베리차를 홀짝거렸다. 강력한 에어콘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세포가 탱클탱클 살아났다. 재치기가 나고 정신이 깨어났다. 공부하는 신체로 모드변환. <이 사람을 보라>를 폈다. 활자가 두 눈에 달려든다. 영혼을 상승시키는 니체의 말. 헤어져있던 애인과의 상봉처럼 눈물겹다 

무화가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대는 북풍이다. 나의 벗들이여, 무화과가 떨어지듯 너희에게는 이 가르침이 떨어진다: 이제 그 열매의 즙을 마시고 그 달콤한 살을 먹어라! 온 사방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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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아 [2011.09.14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형 먼저 올려보내고 모녀가 버스타고 친정에 다녀왔더니 녹초됐다. 겨우 출근했네.
    그래도 몸고생이 맘고생보단 낫지. 욕봤다.

  2. 침묵 [2011.09.14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명절에 죽은 형 납골당에 다녀왔습니다. 명절마다 겪는 일상인데 왜 이리 처연한지요.
    더불어 선생님의 글 속에도 '처연함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은-유 [2011.09.14 2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나이들수록 무슨 날이 되면 처연한지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평안하실 겁니다. 루쉰의 '무상'에 나오는 구절 읽어드릴까요. '삶의 즐거움을 생각하면 삶은 확실히 미련이 남는 것이겠지만, 삶의 고통을 생각하면 무상도 반드시 악한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상은 저승사자 활무상을 말하는데.. 이부분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3. [2011.09.14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1.09.14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랑도 없이 시댁에서 명절보내면 진짜 억울하겠다-.-; 고생많았네. 나도 어제 카페에 들어가서 마냥 넋놓고 앉아있는데 울컥하더라. 나답게 본성대로 살기가 이리도 힘겨운가. 몸부림이 안쓰러워서 말이지.. 힘내렴. 애낳고 추락하는만큼 삶의 깊이도 생기는 거란다.^^

  4. 마구마구 [2011.09.14 1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이런 글 잘쓰네요.ㅋ. 뭐랄까. 누구는 먹어버릴 사과를 특별한 정물화로 만드는 화가같아요.^^; 좀 남다른 명절을 보내시는군요. 삶이란게 뜻데로 안되죠.

  5. 장정아 [2011.09.14 1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윤할머니의 일상^자주 들어왔지만...오늘은 다규한편을 보고 있는듯하네. 나름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그분의 맘과 뇌속을 들여다보고싶다. 노동시간의 연장이 자아존중감을 높이기 위함이라니.. 슬프기도 하다.

    세월덕분에, 크고 작은 자존심의 상처입은 일땜에 예전에 비해 작아진듯했전 울 시엄니의 권력행사는 현재 진행중이지요. 그래서 이번엔 내가 맘먹고 남편에게 " 당신어머니가 무경우하고 몰상식한 행동을 할때마다 당신과 당장 그만살고 싶다. 결혼초부터 늘 날아가려고 꿈꾸고 있다"라고 말했지요. 몇날며칠 고민끝에 나무와 함께한 산책덕분에 순화된 한줄로라도 표현했더니 묵은체증이 조금은 내려가더이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사이에 껴서 겪었던 몸과 맘의 피로때문에 '명절통폐합'을 강력히 주장하고 싶어요.
    함께 서로를 반가워하는 명절본래의 의미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나요???
    '

    • 은-유 [2011.09.14 2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얘기했군요.ㅎㅎ 여자들이 겪는 고통은 말해도 잘 모르죠. 견디고 삭히는 자체정화법이 가장 빠른 것 같아요. 명절이 기다려지고 좋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궁금하네;

  6. 지오 [2011.09.14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샘 글은 잔잔한 호수같은데 파도가 쳐요. 위에 님 말씀대로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 같으세요^^
    토닥토닥... 고생하셨어요~!!

    아버지 같았던 큰삼촌의 납골당에 다녀왔습니다. 늘 동생과 함께였는데 올해는 동생이 시댁가느라 혼자 갔어요. 가족단위로 모인 사람들 틈에 혼자 술잔 올리려니 퍽... 서럽더라구요.
    오늘은 할머니께서 막내 삼촌 댁으로 짐을 챙겨서 내려 가셨습니다. 할머니도 저도 서로를 차마 못보고 돌아서는데 그게 또 퍽 서럽더군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쩐지 제 삶에 지붕이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 은-유 [2011.09.15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ㅠㅠ 왜 다 어디를 가는거야. 서울 와라. 같이 놀자.. 돌아서는 할머니 영상지원 돼서 슬프다. 그 때 마지막 글에서 할머니 말투가 생각나네..

  7. 연초록 [2011.09.14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절. 함께 즐거운 명절은 불가능할까요?

    이번 화요일은 보람이랑 둘이서 (승태는 자겠다고 해서 ) 덕수궁 나들이를 했습니다.

    나들이 하기전 토 프레소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는 바이올린 연습을 했지요. 수요일이 렛슨이라서

    보람이랑 만나서 버스에 타니 계속 스마트 폰으로 문자 보내기에 몰두하길래 엄마는 독일어 공부하겠노라고

    헤드폰을 켜고 ( 사정사정해서 입에서 톡 독일어를 mp3에 넣고 ) 아니 뭔 독일어냐고 놀라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인데 사정이 생겨서 그 언어를 배우게 되었답니다.배우기보다는 오래 전에 한 언어라서 다시 만났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데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가 이제까지 한국식으로 해온 발음과 독일인의 발음이

    달라서 한 번 놀라고, 그녀의 표현이 발랄 그 자체라서 또 한 번 놀랐지요.

    내려서 함께 점심 먹고, 덕수궁 휘트니 미술관 전시를 보러 갔습니다. 보람이는 그동안 여기 저기 미술관을

    다녀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새삼 놀랍더라고요.

    그리고는 광화문 교보에 가서 한 권 책을 사주겠다고 하니 알랭 드 보통의 architecture of happiness를 고르더군요.

    그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영어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올해 , 그것도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겁니다. 사서 보는 것이 줄도 긋고 다음에 다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보고 나서

    필요하겠다 싶은 사람들에게 선물해도 좋다고 해도 아직은 책을 사는 일이 낯선 것인지 아까운 것인지

    이것을 시작으로 엄마가 일년에 한 권은 꼭 선물하고 싶다고 했는데 모르지요. 어떻게 될지!!

    전 날 밤 식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영화 한 편 보고 들어가겠다고 광화문에 갔는데 표가 헐렁하게 남아있을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오전부터 매진이었다고요. 코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그 밤에 다음 날

    표를 예매했는데요 그 사실을 안 보람이는 학교앞에서 약속을 잡았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엄마는 그 전에

    영화 한 편 더 보고 싶다고 먼저 가라고 한 다음 미로 스페이스에서 눈여겨둔 일본 영화 한 편, 그리고

    예약한 표로 코코와 스트라빈스키 한 편 이렇게 보고 나서 기분좋게 버스에서 독일어 듣다보니 벌써

    일산, 집에 들어오니 뉴욕 가는 보람이 친구가 있어서 친구들이 집에서 또 모여 있더라고요. 한 친구가

    자신은 졸업하면 한국에서 디자인을 계속 하긴 어렵겠다고 그래서 네덜란드 유학을 생각중이라고요.

    그렇구나, 렘브란트에 관한 책 읽을 때 지명을 못 읽어서 불편하더라, 그래서 발음이라도 할 수 있게

    한 달만 그 나라 말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놀란 표정으로 못 읽어서 정말 불편하냐고 물어봅니다. 불편하지

    글씨인데 무슨 발음인지 모르니까. 그렇구나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나도 놀랐지요.

    앉아서 함께 맥주 한 잔 하고 방에 들어와서 하루를 돌이켜보니 아이들이 크고 나니 내게 명절이 주는 부담감이

    많이 ,아니 거의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답니다. 그 세월의 강을 용케도 건너왔구나 싶고요.

    언젠가 세월이 한참 지나고 은유씨가 덕윤이와 덕윤이 식구들과 더불어 보내게 될 명절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 때 어떤 그림으로 만나게 될까요? 명절 풍경을!!

  8. 삐삐 [2011.09.15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꽤 오랜만인듯 하네요.ㅎ 우연의 일치인지 저 무화과 구절을 본날 여기 올라온 글을 보고 놀랐어요.ㅎ 그 많은 글 중에 어떻게 같은 날 같은 줄을 읽어내릴 수 있었단 말입니까.ㅎㅎ 에체호모를 말씀하셨는데 무화과글은 짜라투스트라... 에서 읽고 있었습니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부는 북풍이다라기 보다는 나는 무화과가 잘 익도록 불어주는 북풍이다라고 읽었지만 독어원본을 모르니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아름다운 대목이지요. 이 주제글은 니채의 심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저는 짜라투스...는 좋은 소설로 읽어요.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는 니체를 좋아하고요.ㅎ 아주 재미있고 여운으로 가득찬 좋은 자전적 알레고리성 소설인거죠.

    추석날 글을 읽으면서 저희 새언니를 존경하게 되었어요. 시가 30분 방문후 친정으로 직행하는 분이거든요. 많이 차겁다 생각했는데 명절 문제의 종결자이자 혁명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저는 자발적으로 추석상을 차려요, 송편도 먹고 싶어서 만들고 그 날과 설날이 제가 한국사람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해주어서인가 봐요.ㅎㅎ 어려서 명절음식을 좋아했던 기억때문인것 같기도 하고요,

    속모르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카페가서 자유를 껴앉는 시간이 부럽기도 하고요, 저는 요즘 카페에서도 자유가 느껴지질 않아요. 카페인에 급급해서 달려가고 담배연기 피하는라 자리를 잘 잡아야 하고 글에 들어갈때 항상 차오르는 스트레스성 불만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ㅠ 몸버리고 성질 나쁘게 글쓰는 사람들 일반적이겠지요? 니체가 그래도 위안이 됩니다. 고통을 반추하는 작업이 창조하는 거다 뭐 그런 대목이 기억나는데 항상 그래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경험의 시간에 대해서 글이 딱 고만큼 나오고요, 고통이 멈추는 시간에 대해서는 글이 당겨지지 않거든요. 아마 글의 테크닉이 부족한 단계때문인지도 모르겠고요. 은유님
    친구분들께 혼날 소리지만 은유닙은 인기만 덜하고 친구만 만나지 않으시면 책이 순산될 것 같습니다.ㅎ 혼자쓰기 괴로우니 같이 써주세요. 동반 고문을 당하자는 건가요 지금?ㅎㅎ 좋은 가을 보내세요.

    • 은-유 [2011.09.16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같은 날 같은 책을 읽다니 엄청난 우연이네요ㅎㅎ 전 명절은 별로라도 명절음식은 좋아합니다.ㅋ (안 좋아하는 음식이 없지만서도^^) 가을부터는 조신하게 지내려고요. 시읽기 세미나랑 니체 차라투스트라 강의하기로 했거든요. 온통 시적인 것으로 가을을 채울 작정입니다.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클 때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제 경우는요. 삐삐님 옥체보전하시면서 글쓰시라고 생생기운 한바가지 퍼드립니다.ㅎㅎ

선악의 저편 4장 - 잠언과 간주곡

[니체의답안지]

4장은 짧은 잠언으로 이뤄졌다. 맥락에서 걸어 나온 한줄 문장을 해석하는 건 위험하고 부질없다. 그래도. 울림을 남기는 좋은 문장을 읽고 나누는 일은 아름답고 유용하다.   

65.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 안다는 것은 나의 무지와 편견과 빈구석을 아는 것. 그 손발 오글거리는 쪽팔림을 견디는 것. 자기를 알아가는 투쟁. 그것을 인식의 매력으로 표현하다니 니체는 대인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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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초록 [2010.12.14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학입학 원서를 쓰려고 하니 이것이 집단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생각이 절로 드는군요.

    원하는 공부를 선택할 수 있는 극소수 아이들을 제외하곤 자신의 성적을 들고 이리 저리 디밀고 들어가서

    상대방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접고 다시 생각해야 하는 바로 이런 아수라장을

    겪고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이 아득하네요.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있으면 그래서 ? 그런 줄 알아도 나 혼자서 거대한 파도를 이길 수 있나 이렇게

    자조적이 되기 쉽다는 것, 내가 생긴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 실감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머리 식히려고 더 콘서트 영화보러 갔다가 아니 불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네 이렇게 기쁠 수가

    혼자서 만학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왔더랬습니다.

    그러게 공부는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법인데,,,

    • 은-유 [2010.12.14 15: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만 들어도 심란하네요.원서 쓰면서 꿈이 바뀐다는 것이 국민적 코미디인데..그게 현실이니까요-.-; 생긴대로 소신대로 살기도 남들처럼 살기도 다 어려워요.ㅠㅠ / 더 콘서트는 저도 봤는데 좋더라고요. 선생님은 음악에 이어 불어까지 들리시다니 은혜로우시겠습니다 ㅋㅋ

  2. 천개의영혼 [2010.12.15 0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학교 들어가서 선배가 하는 말이 '너 공부 못해서 들어왔지?'라고 하는데 굉장히 속상했어요.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찾아서 갔는데요. 마음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애요. 지방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는 과라서 더했던 것 같애요. 말로만 듣던 서열이 있고 계급이 있더군요.^^;; 그게 모든 사람의 트라우마로 각인 될 것 같아요. 저도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무엇을 하든지 이미 지고 들어갑니다. 입시제도가 바뀌고 각종 시험제도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일전에 공무원시험이 꼭 그래야 하냐고 물어봤는데 그 분이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내가 그렇게 해서 들어왔으니깐 너희도 그렇게 해야한다." 보상심리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김예슬 사건을 두고서 저는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요. 오히려 이십대가 냉소적으로 나온 게 맘이 아프더라구요. 그것조차도 '고대'니깐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었다고 하면서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하는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나길 바랬는데요. 아차! 싶었어요. 벌써, 우리, 내 안에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고, 산산히 갈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178번, 확 꽂히는걸요! 그걸 악용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속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지요.

    • 은-유 [2010.12.15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처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상처받아서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 선배도 학벌사회에서 살다보니 그리 된거 같아 안타깝네요. 어디를 봐도 출구가 없고..저도 아이가 커가니까 구체적으로 속상하네요.

선악의 저편 3장 종교적인 것 - 금욕의 두 가지 버전

[니체의답안지]

어디선가 신보다 신앙이 먼저 생겼다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보다 종교적인 것이 문제라고. 신의 죽음으로 종교는 사라졌지만 종교적인 것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는 것, 즉 우리시대에는 도덕, 과학 등이 ‘신 없는 신앙’으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비판이다. 종교적인 것의 어떤 부분이 문제이냐 하면 희생, 금욕 같은 것들의 강조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삶이 되는 가치전도.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을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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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2 1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은-유 [2010.12.12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방금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혈 거부해 영아 죽게한 부모 얘기를 포털에서 봤어요. 가슴 아프죠. 종교가 자기극복의 수단이냐 삶을 파탄내는 독이냐. 그 문제겠죠..그리고 완전 몰입한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소모적인 것 같아요. 그냥 지켜보세요. 원래도 소통이 어려운데 여행가면 예민해지니까 더 조심스럽네요^^; 그나저나 부러워요..ㅠㅠ

  2. 마구마구 [2010.12.13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체가 심한 종교적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그 위험을 몸으로 느꼈을까요.

    • 은-유 [2010.12.14 15: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 아부지가 목사님..니체는 안티크리스트라는 책도 썼죠. 종교비판서는 종교적인 것 비판이죠. 니체는 구약은 높이 평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