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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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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면기- 허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 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 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염소 새깨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 며 시 앞에 섰다. - , 허연 민음사 직장인이 된다는 건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 하는 일이다. 물론 퇴근이 불규칙한 경우가 더 많다.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일..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랑 점심을 먹었다. 친구가 후배직원과 같이 나왔다. 뿔테 안경에 더벅머리를 인 선머슴 비주얼에다가 어딘가 겅중거리는 뒤태가 단독의 망상체계를 구축한 소년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월의 다정한 햇살로 데워진 합정동 주택가 골목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그 소년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을 건다. “저, 등단 하셨다고요?” 첨엔 놀랐고 바로 웃겼다. 너무 뜬금없는 대사가 무슨 접선하는 거 같았다. 시 읽는 여자로 나를 치장한 적은 있을지언정, 시 쓰는 인격으로 행세한 적은 없다. 그 푸른색 거짓말을 나는 모른다. 알고 보니 친구가 나에 대해 시를 좋아한다며 시집 운운한 모양이다. 그 소년이 ‘시집’이라는 말에 혹해서 ‘등단’까지 진도를 빼서 정보를 왜곡 수용한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