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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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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을 만나다 좋아하는 시인을 만난다는 건 참 어색하다. 그가 낳은 자식과 연애하다 부모님 뵈러 가는 길처럼, 부담되는 자리다. 오래 편지를 주고받던 소울메이트와 만나는 자리 같기도 하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궁금한, 보고 싶으면서 도망가고 싶은 수줍은 이중감정. 피고름 같은 시를 온몸으로 짜내는 그가 너무 반듯해도 이상할 거고 너무 헝클어진 모습이어도 서운할 거 같았다. 교수다운 노신사 분위기도 섭섭하다. 시인다우면서 시인의 모습을 배반하길 기대했다. 욕심도 많지. 이번 자리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에서 '내가 쓴 시 내가 쓸 시'라는 단기강좌다.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최승호 시인이 매주 초대된다. 첫 시간에 이성복 선생님이 오신 거다. 어울리게도, 가장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고통의 날. 나는 ..
책에게 앎을 묻고, 앎에게 삶을 묻다 # 좋은 책..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요. 읽고 나서 눈동자가 깊어지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누군가의 글을 본적이 있고, 그 정의에 동의합니다. 좋은 책을 통해 좋은 앎을 이루었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제 공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할수록 자신의 가치척도만 날카롭게 다듬어져 예민하고 오만해진다면,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 자신의 잣대로 찌르고 가치평가 해대는 도구로 쓴다면 그것은 좋은 앎이 아니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공부가 사람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부당한 것에 분노하고 저항할 줄 안다는 것 등등 모든 삶의 경구를 지켜나가자면 엄청난 지혜와 섬세한 기예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치열함과 이해..
2008. 여름. 김동원 감독 인터뷰 풀버전_2 #3 영화, 시대와 대결하는 법 등 도시철거민을 기록영화화 했지요. 과거 정권에서부터 개발의 논리로 소외된 자들의 추방정책은 진행돼 왔잖아요. 지금은 눈에 안 띄고 사회적 이슈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죠. = 80년대와 비교하면 2000년대는 개인이 파편화 됐죠.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해졌고. 관심이 개인 삶의 질로 이동해서 소수자 문제 관심이 옅어진 게 사실이에요. 철거민도 눈에 안 보이고요. 우리 집 뉴타운 해달라는 주문은 있어도 개발 싫다는 얘기 안 하니까. 가치관이 물신화 됐죠. 연대감 약해지고. 하지만 인간 안에는 스스로 균형잡으려는 거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주의가 편하고 좋지만 허망하기도 하죠. 이웃을 찾고자 하고 봉사하고. 지금 촛불도 아무도 생각 못했죠. 아고라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최루가스 ..
2008. 여름. 김동원 감독 인터뷰 풀버전_1 #0 김동원, 애틋한 동경 을 본 사람들은 거의 그랬을 것이다. 감동이 넘쳐 감독님을 존경하게 됐다. 감동의 크기만큼 감독이 궁금했다. 은 곧 김동원의 자서전이었다. 그리곤 잊었다. 잊고 지냈다. 내가 송환을 감명 깊게 봤다는 사실조차. 한 달 전, 변성찬 선생님이 인디포럼에서 을 봤다면서 감독님 얘기를 꺼내셨다. “어, 선생님 저 그 영화 보고 싶어요. 구해주세요.” 다시 감독님을 떠올렸다. 마치 옛사랑처럼 그의 이름 석 자에 마음이 아련해졌다. 그렇게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다가 오마이뉴스에서 취재의뢰를 받았다. 나는 ‘운명’이라고 정의 내렸다. 확대해석을 해버렸다. 너무 좋았다. 마구 설렜다. 염려도 앞섰다. 4년 전에 쓴 감상 후기를 읽어보았다. 절절하더라. 4년 전의 내가 대견했다. 고민했다. 어..
올드걸의 The Last Waltz "사랑해요. 아저씨"로 시작하는 미도테마를 듣는다. 저 구슬픔..저 음산함.. 저 아릿함. 영화는 무서워도 음악은 온순하다. 누군가 착한 손으로 따라주는 술 한잔 받아먹는 이 기분. 취한다. 처연모드의 배경음악으로는 더없이 맞춤하다. 광석이 형의 '부치지 않은 편지' 또한 사랑스런 곡이다. 그 노래는 JSA에 나왔다. 박감독은 그곡을 500번쯤은 들은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관객이 아닌 출연자들을 울리기 위해 삽입했다고 말했다. 누구를 울리는 재주가 있는 것들. 난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인간이든 음악이든 한 편의 시든 삼류소설이든. 그러고 보니 울어본지 꽤 오래 됐다. 난 수년간 눈물병에 걸렸었다. 슬픈 게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안 슬픈 일이 없었다. 난감함과 허무함이다. 세상이 온통 검은페이지였다..
生이 무르익는 올레... 좋지 아니한가.. 여성이 만든 섬에, 여성이 길을 내고, 그 길을 여성이 걸었다. 아름다운 우연이다. 천혜의 땅 제주도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설문대라는 할망이 망망대해 가운데 만든 섬이다. 내 고향 제주도에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을 만들고자 소망한 서명숙 씨(전 시사저널·오마이뉴스 편집장)는 작년 여름 제주의 사라진 옛길을 찾아 ‘올레’ 길을 냈다. 그리고 5월 30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여성위원 20여 명은 느릿느릿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어 올레를 걸었다. 넉넉한 엄마의 품 제주의 젖줄 따라 몸을 길게 뉘였다. 아이처럼 초롱초롱 세상을 둘러보고 멋진 풍광 배불리 들이켰다. 꿈틀대는 흙길을 밟으며 자연, 사람, 일, 사랑 등 그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논했다. ‘아득한 신화에서 지극한 현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