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유칼럼

(136)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사람들 ‘신생아 쓰레기통’. 인터넷 포털 화면에 검색어를 넣었다. 며칠 전 지나가듯 본, 신생아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의 기사를 찾기 위해서다. 스크롤을 내리니 수십 개의 단신이 뜬다. ‘강릉 음식물 쓰레기통서 신생아 발견…‘인면수심' 부모는 누구?’ 가장 자극적인 제목이다. 인면수심의 ‘부’는 정체불명. ‘모’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니 이렇다. 오후 6시40분쯤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집 화장실에서 애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나니 키우기가 곤란하고 겁이 나 수건에 감싼 후 비닐봉지에 넣어 택시를 타고 10km 떨어진 곳의 음식점 쓰레기통에 넣었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았다. 이를 숨겨오다 혼자 출산한 뒤 미혼모로 살게 될 것을 우려해 범행했다.내 식대로 정리하면, 그녀는 배 위로 트럭..
그게 왜 궁금한 거죠?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딨어.” 아버지는 TV를 보면서 늘 말씀하시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말도 꼭 덧붙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세상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지? 말도 안 된다면서 굳이 보면서 욕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자라서 세상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백발 성성한 아버지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온순한 시청자가 됐다. 아랫집에 사는 60대 초반의 어르신과 엘리베이터에 가끔 동승한다. 오전에 눈곱만 간신히 뗀 몰골로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들고 있을 때도 보고 저녁 강의를 마치고 노트북 가방 멘 채 밤 12시에 마주치기도 한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하루는 남편이 말했다. “아랫집 아저씨가 당신 무슨..
위로공단 - 그가 누웠던 자리 영화 (감독 임흥순·제작 반달)을 보았다. 일하는 여성노동자 22명의 깊은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얼굴선이 너그러운 중년 여성이 인상적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지난시절을 회고하는 그녀는 197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풀밭에서 도시락을 먹는 동네 언니가 멋져 보였고 일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대기업 공장에 취업한다. 실상은 달랐다. 매일 철야작업이 이어져 타이밍 같은 각성제를 먹어야 했다. 관리자의 욕설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다. 이 장면에서 나는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취업준비생 시절, 도심의 빌딩숲을 지날 때 직장인들이 몹시 부러웠단다. 하얀 셔츠 위에 출입증을 메달처럼 목에 걸고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삼삼오오 웃고 떠드는 그들을 동경하며 직장생활을 꿈꿨다고. 그런데 막상 건..
남의 집 귀한 자식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키보드를 치는 큰아이가 정기공연을 한다고 해서 구경을 갔다. 홍대 앞 작은 클럽. 벽면은 포스터 붙여다 뗀 테이프 자국이 너덜너덜했고 조명은 교차로 신호등 같은 삼색불빛이 단조롭게 깜빡였다. 아이들이 무대에 올랐다. 사운드가 터지고 조명이 켜지자 기타를 멘 여학생의 어깨끈에서 무슨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귀한 자식’. 동그란 장식용 배지였다. 어느 알바생 유니폼 등쪽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진상 고객이 얼마나 많으면 저랬겠냐, 사장님 센스 있다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요즘 ‘귀한 자식’이라는 말이 유행인가. 그러나 저 몸에 새긴 표지는 너무 온당해서 쓸쓸하다. 사람이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값싼 부속처럼 쓰이는 세상을 향한 청년들..
여자들의 저녁식사 모처럼의 불금. 친구 넷이 만나 밥과 술을 먹었다. 밤 9시가 넘자 “엄마 언제 오냐”는 전화가 번갈아 걸려오는 애 있는 여자들이다. 우리는 무더위를 어떻게 났는지 여름 안부를 주고받았다. A는 반바지 일화를 꺼냈다. 하루는 너무 더워 사무실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타부서 선배가 지나가며 한마디 하더란다. “그렇게 짧게 입고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A는 이혼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라서 대충 웃고 넘기려다 그냥 말했다고 한다. “저 남편 없는데요?” B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절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B는 지난주말에도 태백의 절로 떠났다. 옆방에는 60대 중년부부가 묵었고 오며가며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부인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묻더란다. “이렇게 혼자 다..
밥 (안)하는 엄마 몇 년전 한 여성 소설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서울의 한적한 동네에 아담한 정원이 있는 단층 양옥집으로 찾아갔다. 거실 책꽂이 한칸에는 무슨 무슨 문학상 상패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서너시까지 쓴다고 했다. 그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까지 글을 쓰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괴로웠던 터라 개인적인 질문이라며 아이 아침밥은 어떻게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침밥 안 먹는 아이로 키우면 돼요.” 그 초월적이고 독자적인 답변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곧 알아차렸다. ‘밥’의 탈을 쓴 저 사사로운 질문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일해도) 살림한다..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유가족이 동의할 만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자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 대한 원성과 비난이 높았다. “대통령이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까지 돌았다. 기사에 달린 댓글로만 보다가 나는 얼마 전에 직접 듣게 되었다. 하필 ‘애를 안 낳아본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여성이 대뜸 말했다. 박근혜가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 생때 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세월호 문제가 미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했지만 모두가 무안해질까봐 어물쩡 넘어갔다. 다시 생각해도 참 무심한 논리다. 한 사람의 지적·정서적 무능이 출산 경험의 부재에서 왔다는 발상. 다산할수록 성불한다는 말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건 애 낳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집단적 모독이고..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닙니까? "당신은 부인을 여자라서 만났습니까? 나는 남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을 뿐입니다.” 지난 세기의 일이다. 1999년 KBS TV에서 이라는 단막극이 방영됐다.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파격적인 소재였고 나는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라서 ‘본방’을 사수했다. 저 대사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단 한 줄로 사랑의 섭리를 깨우친 거 같았다. 또 신기했다. 누군가 내 연애에 ‘태클’을 걸었을 때 나는 저렇게 근사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새천년 이후 스크린 안팎에서 동성 간 사랑을 자연스레 접했다. 남자사람 친구가 동성애자였다. 애인의 생일이라며 남성복 코너에서 셔츠를 살 때 외에는 일상에서 그의 성정체성을 자각할 일은 별로 없었다. 같은 ‘게이영화’나 같은 ‘레즈비언 영화’는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