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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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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지 않을, 권리 사교육으로 유명한 지역에 강의를 갔다. 앞서 단체 대표가 교육 특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인사말을 전하더니 여러분들이 글쓰기를 잘 배워두었다가 아이들에게도 알려주라며 자리를 떴다. 객석 대부분은 주부였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취지를 바로잡았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가르치지는 마세요. 엄마의 옷을 벗고 본연의 나로 사는 방편으로서 글쓰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분이 손을 들었다. 6학년 아이에게 독서록을 쓰게 하는데 아이가 싫어한다며 무슨 방도가 없냐는 것이다. 엄마 모드는 웬만해선 해제되지 않는다. 아니다. 학부모만이 아니라 교사들도 읽기와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골치라며 묘책을 묻곤 한다. 그럴 땐 되묻는다. 왜 아이들이 꼭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돌아오는 답은 ..
작가를 꿈꾸는 이에게 전하고픈 말 강연을 마치고 나가는데 계단 아래까지 한 아이가 따라 나와 말을 건다. 작가가 꿈이라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은데 부모가 반대한다고, 다른 과를 가도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묻는 눈동자는 초조함으로 일렁였다. 고등학생들을 만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부모의 반대 이유도 한결같다. 돈 벌기 어렵다는데, 취직이 안 된다는데, 밥 굶는다는데. 어느 밤에 문자가 왔다. ‘쌤, 글로 돈을 벌 수 있을까요.’ 같이 글쓰기를 공부하던 20대 후반 학인이다. 나는 초기에는 최저생계비 마련이 어렵다고 답했다. 직장에 다니는데 하루하루 메말라가는 것 같다고, 일을 그만둘까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선뜻 결정하기 어렵다고,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며 그는 대화창을 빠져나갔다.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민음사 펴냄스무 ..
평범이라는 착각, 정상이라는 환영 초여름 볕이 좋아 이불을 빨아 널다가, 베란다에 빨래가 널려 있으면 저 집은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는구나 알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빨래는 평화의 깃발인가. 두 아이를 면 기저귀 채워서 길렀다. 전업주부라 시간이 많았다. 하루치 똥오줌을 받아내고 세탁기를 돌리고 하얗고 네모난 기저귀를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켰다. 일상 의례처럼 날마다 빨래를 하던 그 시기가, 그러고 보니 내 생애 가장 평범한 날들이었다. 평범의 뜻이 무변고·무고통·무탈함이라면.얼마 전 여성 쉼터에 사는 한 친구가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는데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저 거실 안에는 지금쯤 식구들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겠지 싶고 자기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거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민지(가명)는 수업 시간에 자주 엎드렸다. 의견을 물어도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물 잔처럼 놓여있던 민지는 할 말이 생각나면 남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주장도 의견도 아닌 그 파편적인 말들을 나는 팔뚝에 튄 물방울 닦듯 무심히 대꾸하거나 못 들은 척 넘겼다. 한 번은 민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쌤은 할 말 없을 땐 말 시키고 말하고 싶을 땐 안 시켜요.” 고루 발언 기회가 돌아가는 ‘말의 평등’을 우선시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민지는 ‘어른들’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아는 얘기가 나와도 끼어들 순간을 못 찾겠다고, 다른 사람 말이 끝나고 말하려면 안 끝나고, 끝나면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는 거..
그런 사람 처음 봐요 난생처음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울트라 코리아 2017’이 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이르러 친구와 수군거렸다. 우리가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온 거 같지? 과감한 신체표현 의상에 타투는 기본, 코스튬은 선택, 국기를 든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옷 한 벌로 한 계절 날 거 같은 중년의 덕후들도 오는 록 페스티벌과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은 달랐다. 나이와 계급의 차이랄까. 관객이 젊고 부티 났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어보니 이십대가 가장 많고 사오십대 예매율은 2%라고. 내 생에 그렇게 처음 2%가 되어보았다. 나도 록 페스티벌을 처음 간 건 이십대였다. 송도에서 열리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 남편이랑 두 돌 지..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말 한마디 2014년 4월17일,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날 영화 가 개봉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우 천우희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한 여중생이 남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 일상을 보여주는 사물은 트렁크다. 딱 그만큼이 피해자에게 허락된 삶의 지분 같았다. 가해자는 지붕 있는 집에서 발 뻗고 잠들고 피해자는 짐 가방 끌고 떠다니는 현실.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한공주는 입을 연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조용한 되물음. 여성주의 논리나 주장이 아닌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한 저 발언. 항변이라 하기엔 담담한 발화가 화살처럼 박혔다. 잘못 없는 사람이 되레 질긴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
고양이 키우기에서 고양이 되기로 수레 집에 혼자 있겠구나. 밖에서 전화하면 딸아이는 정정한다. 아니, 무지랑 둘이 있어. 아, 그렇지 무지가 있었지. 자꾸 까먹는다. 무지는 우리집 고양이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서 나는 아이 혼자 있다고 여기고, 고양이를 자신과 동등한 개체로 여기는 딸아이는 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가 이토록 어렵다. 3년 전, 딸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품고 있는 장면이 ‘명화’ 같았다. 친구의 지인 새끼 고양이들인데 다 입양이 결정됐고 한 마리만 남았다며 우리가 키우자고 했다. 말로 졸랐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텐데 사진을 보곤 홀렸다. 나는 고양이 입양 불가 의견을 빈대떡 뒤집듯 뒤집었다. “그럼 데려오든가.” 흰색·밤색·검은색 털이 멋스러운 ..
'서울 것들'이라는 자각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하러 제주도에 갔을 때다. 30여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자칭 ‘전직 간첩’ 어르신들과 같이 승합차에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쪽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당신 사정을 말한다. “오늘은 안 돼. 육지 사람들이 왔거든.” 그 말을 듣자 육지에서 온 객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은 왜 웃느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덩달아 웃었다. 육지 사람이란 합성어가 생소했다. 그리 호명되는 것도 첫 경험이다. 섬을 척도로 내 정체성은 육지 사람이 맞다. 일상에선 육지생활자가 기본값이니 섬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살았던 거다. 여자는 여성 장관이고 남자가 장관이듯 말이다. 이 육지 사람 에피소드를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조용히 부연한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