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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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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 , 민음사 방학이 길어지니까 애들이 악마로 보이기 시작한다. 끼니 때마다 고개 쳐들고 웃으면서 나타나는 뿔 달린 악마. 복면한 밥도둑. 칠월말 팔월초 폭염에는 정신이 혼미해서 힘듦을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최소한의 에너지가 필요한가 보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5시30분쯤 귀..
시적공동체, 누가 왜 무엇을 읽는가 1. “완전 다른 시집이야. 혼자 읽을 때와는 다른 시집이라니까” 시세미나 끝나고 나오는 길, 한 친구가 들떠서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다.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세미나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랐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동안 여럿이 모여 시를 읽고 나면 어둡던 시집은 환해지고 모난 가슴은 둥글게 부푼다. 마른 장작 같이 뻣뻣하던 시집이 분홍빛 솜사탕처럼 끈끈하게 몸에 엉긴다.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던 그 쌀쌀맞은 시집이 갑자기 얼마나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지. 마치 등 돌리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미소 짓는 것처럼 그만 설움이 일시에 녹아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시세미나로 인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나는’(한용운)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2011년 10월 15..
시세미나 말들의 풍경 시즌4 ' 심연의 시집' 시즌4는 ‘심연의 시집’으로 모두 18권을 읽습니다. 시세미나 성원들과 논의를 거쳐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인, 그리고 두고두고 마음을 휘젓는 시인의 작품으로 추렸습니다. 깊은 시 깊이 읽기입니다. 그동안 시즌1, 2, 3의 시편을 지나오면서 느끼고 배웠습니다. 시는 함부로 읽지 않아야한다는 것. 한 사람이 심연까지 몸을 내려 길어 올린 그것을 마주하는 동안은, 그 공들인 언어의 쓰임을 배반하지는 않으려는 자세, 나의 삶에 그의 시를 포개어 귀퉁이를 맞춰보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노릇일 것입니다. 하여 시즌4에서는 시낭독회에서 나아가 시 깊이읽기 공부모임의 성격에 충실하기 위해 시와 적극적으로 내통한 글 한편을 써서 만납니다. 시즌4. 심연의 시집 백석 , 문학동네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최승자 , ..
김이듬 - 겨울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 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 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 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 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 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 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 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 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이민하, 뿔을 접었다 폈다 얼마 전 고1학생의 자살소식을 들었다. 죽은 시간과 상황이 유독 안쓰럽다. 일요일 아침 7시, 아빠가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깨우려고 방문을 열었더니 창문 끝에 아이가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영화에서나 보던 가슴 조이던 장면이 아닌가. 유리창 문틀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하얗게 질린 열 개의 손톱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이는 얼마나 용을 쓰다가 놓아버렸을까. 눈앞에서 자식을 보내야했던 아빠는 그 잔인한 형벌을 어떻게 감당할까.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니 집이 경기도 화정 소재 아파트이고 고등학교 진학하면서부터 대치동 국어전문학원을 다녔으며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거 같다’는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 기사에는, 일요일에도 늦잠 한번 늘어지게 못 자고 학원에 다녀..
김언, 미확인물체 비가 왔다. 확인되지 않은 미아삼거리에서 칼국수를 먹 었다. 어제는 확인되지 않은 중국요리를 먹었다. 확인되지 않은 중국집 이름은 진짜루. 확인되지 않은 단무지와 양파 와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확인되 지 않은 누군가와 확인되지 않은 수표를 내고 나왔다. 확 인되지 않은 경품이 걸린 쿠폰을 받고 버렸다. 부산에 사 는 내가 언제 다시 오겠냐. 확인되지 않은 정류소 쓰레기 통 앞에서 확인되지 않은 택시를 타고 그는 갔다. 확인되 지 않은 길을 걷다가 확인되지 않은 동네 이름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확인되지 않은 버스 안에서 확인되지 않은 기차를 타고 가는 그를 상상했다. 그는 확인되지 않 은 곳을 지나고 있다. 천안 아니면 대전쯤? 진짜로 그가 하 고 싶은 말은 헤어질 때까..
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 만득귀자.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 있네. 예전에 어느 역술인이 사주를 풀면서 한자로 써주었다. 표현이 하도 예스러워 신선했다. ‘늦게’라는 시간은 주관적이다. 간절히 딸을 원하다가 첫 아이 낳고 6년 만에 가까스로 만났으니 내게 너무 늦은 자식인 건 맞다. 주변 엄마들을 보아도 둘째 아이에게는..
이장욱, 나는 오해될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라디오와 멀어졌다. 그러다가 2007년 즈음 임태경이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려 다시 라디오 앞에 턱 괴고 앉았다. 들으니 좋았다. 평소에 듣던 노래도 중저음의 디제이가 소개하고 강원도 삼척에서 온 사연과 곁들이면 어쿠어스틱 버전처럼 낭만이 솔솔 피어났다. 음악이 손 잡아주는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라디오는, 영혼의 감기 정도는 금세 낫게 하는 ‘느낌의 공동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연소개 끝에 이름 대신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불렀다. 4951님 신청곡입니다. 이런 식이다. 깜짝 놀랐다. 수인번호 같았다. 말끝마다 번호를 불러대니 라디오가 만들어주는 낭만의 울타리는 어디가고 이 세상이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이름이 아닌 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