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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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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혹은 폐허 / 심보선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8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완벽한 인간과 완벽한 경구 따위는 식후의 농담 한마디면 쉽사리 완성되었네.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사랑의 계시가 어느날 임하여 시를 살게 하고 폐허를 꿈꾸게 하네. (그대는 사랑을 수저처럼 입에 물고 살아가네. 시장 하시거든, 어여, 나를 퍼먹으시게) 한생의 사랑을 나와 머문 그대, 이제 가네. 가는 그대, 다만 내 입술의 은밀한 달싹임을, 그 입술 너머 엎드려 통곡하는 혀의 구구절절만을 기억해주게. 오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꽃은 성급히 피고 나무는 느리게 죽어가네. 천변만화의 계절이 잘게 쪼개져, 머무를 처소 하나 없이 우주 만역에 흩어지는 먼지의 나날이 될때까지 나는 그대를 기억하리 - 먼지 혹은 폐허 / 심보선, 시집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
서울의 병 / 장석주 '아무나 위독한 서울을 살려다오' 새해가 열리고 다음날. 2008년 증권선물시장 개장식 취재를 갔다. 거래소 입구에 커다란 검은 관이 놓여있고 구슬픈 상여소리가 들렸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코스콤 비정규직 동지들이 준비한 퍼포먼스였다. 암울했다. 겹겹이 둘러쌓인 경비망을 뚫고 거래소 본관 로비에 들어서자 첼로 선율이 귀를 간질이고 증권사 사장들 및 재계 관계자들이 혈색좋은 얼굴로 잔뜩 모여 있었다. 그때만해도 지수가 3000천 포인트 간다고 들떠 있을 때니 새해새출발새희망으로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안과 밖의 상반된 상황이 얄궂었다. 날씨가 풀리고 봄이 되어 코스콤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200일 행사가 있었다. 그곳에서 두어 시간 앉아 같이 박수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간 싸운 이야기도 들었다. 거래소앞 천막을 지날 때마다 추..
사랑일기 / 이성복 입동이 지났는데도 딸아이는 여름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다른 운동화나 구두는 신지 않는다. 자기 발에 맞게 편안히 늘어난 것이 좋은가보다 싶어 그냥 두었다. 이번주부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지난 일요일에 부추를 사러갔다. 다행히 맘에 드는 부추를 사서 집으로 가는 길. 우리모녀는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는 낙엽이 뒹구는 창밖을 구경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서형아. 집에가면 엄마 원고 써야 하거든. 내일까지 써야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한테 자꾸 말시키지 말고 혼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아야 해. 부추도 샀으니까 엄마가 부탁할게." 31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딸아이에게 나는..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책을 보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혹은 음악을 듣다가 너무 찡해서 눈물을 짓는 건 흔한 일상사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 울어본 적은 딱 두 번 있다. 울었다기보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고 해야 맞겠다. 한 번은 한대수 선생님 사진을 보고서다. 같이 취재 간 사진작가가 한대수선생님의 뒷모습을 찍었는데 흑백이었다. 한적한 홍대 뒷골목을 배경으로 가로등 불빛과 전선줄이 뒤엉킨 담벼락 사이로 검은 트렌치 코트를 입은 그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쓸쓸하고 처연하고 신산스러웠다. 당신 한평생 살아온 생애의 이야기처럼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한대수선생님의 책 제목대로 '죽는 것도 제기랄 사는 것도 제기랄'의 미학적인 구현이었다.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두번째는 북한사람들 사진을 보았을 때다. 광화문 교..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매주 월요일 점심때면 아버지가 오신다. 빈 반찬통이 들은 가방과 아이들 과자를 한보따리 들고 오신다. 그러면 나는 일주일치 밑반찬을 만들어서 빈통에 담아 드린다. 반찬이랄 것이 뭐 별거 있을까. 멸치나 북어를 볶은 마른반찬 한 가지, 삼색나물 중 두어가지, 오뎅이나 두부조림, 불고기나 오징어볶음 같은 단백질류 등등이다. 일요일에 준비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준비하는데, 그 시간이 한없이 우울하다. 왜 우울한가. 아버지가 반찬가게에서 사 드시면 더 다양하고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을 텐데. 아니면 일하는 아주머니를 일주일에 두번만 불러도 더 따뜻한 반찬을 드실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나도 부담을 덜 수 있을 텐데. 하는 얄팍한 생각들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서다. 매번 돌아오는 끼니의 영원회귀. 차이없는 ..
가시나무 / 천양희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이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 천양희 구멍과 가시. 인간의 몸에 필요한 것, 두 가지다. 우물처럼 깊은 심연. 뻥 뚫린 가슴. 마음이 허하다 할 때는 필시 가슴에 구멍이 생긴 거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심연. 메워..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 문태준 엄마가 돌아가시고 첫 생일날에는 아침부터 이를 닦다가 울컥했다. 엄마가 나를 낳고 하루라도 입원비를 줄이려고 바로 그날밤 퇴원했다고 하셨다. 나는 애를 낳고서야 엄마의 궁상 혹은 결단이 실감나서 숙연해지고 말았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의 출산스토리가 더욱 사무쳤다. 핏덩이를 품에 꼭 싸 안고 어그적 어그적 걸어가는 엄마의 불편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존재에 대한 연민에 복받쳤다. 저녁에 술을 '진탕' 마시고는 생애 첫 음주-구토를 일으켰다. 그것도 일급호텔 스카이라운지의 하얀 눈밭같은 테이블보에다가. 서울 한강의 야경을 배경삼아. 다음날은 생애 처음으로 원고기한을 어겼으며, 일박이일 간 머리를 바닥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슬픔이 가슴보다 커질 때는 술을 붓는다. 그 술은 마중물이다. 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