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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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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를 타고 / 김정환 ‘피난보따리 만한 애정을 움켜쥐고’ 사람이 가난하면 이렇게 만나는 수도 있구나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너는 그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오래도록 깊이 패인, 너의 주름살로 건너오는 터질 듯한 그리움이여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삼팔선 같은, 먼지의 일렁임이여 그러나 우린 어쩌다 이렇게 소중한 사이로 서로 만나서 피난보따리만한 애정을 움켜쥐고 있느냐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느냐 설움이며 울화의 치밈이며 흔들리면서 그냥, 마구 흔들리면서 - 김정환 시집 창작과 비평사 문자메시지 신호음을 핸드폰 산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바꿨다. “와~ 쪽지다~”하는 앙증맞은 목소리다. 그랬더니 문자 올 때 왠지 더 반갑다. 주로 아침 첫 문자는 이팜과 초록마을이다. ‘한우 잡는 날, 사태 양지 특수부위 20% 세일, 단 하루’ 이런 광고가 애들 학교 보내고 나..
몹쓸 동경 / 황지우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그대를 지나쳐왔다'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배갑, 안경, 접어둔 화집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깐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뜩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생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셀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 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후두음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 안도현 시집 , 창비 뭇 남성동지들의 연인이 되어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선배다. 서른 중반에 같이 노동운동 하는 연하남이랑 결혼하고 아이없이 지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기를 가지려니 생기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언니가 '유산했..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봐'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김정란 시집 , 나남출판 '내가 어떻게 너를 낳았을까.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루에도 몇 번씩, 고장난 벽시계에서 뻐꾸기 튀어나오듯이 수시로 나오는 말이다..
광주 / 이성부 '한 사람이 구름 하나가 나를 불러' 한 나라가 다시 살고 다시 어두워지는 까닭은 나 때문이다. 아직도 내 속에 머물고 있는 광주여, 성급한 목소리로 너무 말해서 바짝 말라 찌들어지고 몇 달 만에 와보면 볼에 살이 찐, 부었는지 아름다워졌는지 혹은 깊이 병들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고향, 만나면 쩔쩔매는 고향, 겁에 질린 마음을 가지고도 뒤돌아 큰 소리로 외치는 노예, 넘치는 오기 한 사람이, 구름 하나가 나를 불러 왼종일 기차를 타고 내려오게 하는 곳 기대와 무너짐, 용기와 패배, 잠, 무서운 잠만 살아 있는 곳, 오 광주여 - 이성부 시집, . 민음사 '나는 광주가 참 좋아요.' 올 봄이었는지, 작년 봄이었는지 모르겠다. 광주역 앞. 기차를 기다리던 나는 가슴팍으로 짱짱하게 파고 드는 남도의 햇살을 쬐이면서 중얼거렸다. "만약에 서울..
조개의 깊이 / 김광규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수 없는 노래2 / 이성복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이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 이성복 시집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 너무 순박해서 익살스러운 이것은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처음 보고 건넸다는 유명한 인사말이다. 38세의 니체는 21세의 루에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청혼했다가 묵사발이 된다. ..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박영희 시집 중에서 장마가 소강상태다. 벌써 비가 그립다. 장마는 싫어도 비는 좋은데. 아쉽다. 생활인이 되고서는 긴 비가 원망스럽다. 이유는 빨래가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에 땀도 많이 흘려 옷이며 수건이 하루에도 몇 장씩 나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