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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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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아들의 철학입문서 “일어나!” “늦겠다!” “빨리해!” 아침마다 아들에게 퍼붓는 말은 대략 이 세 마디로 압축된다 하겠다. 8시 30분까지 학교를 가야하는데 꼭 25분까지 팬티바람에 어슬렁거리면 애터져죽을 지경이다. “가만 보면 늦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늦어. 맨날 허둥대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없고 자기 지배력도 약한 사람인 경우가 많거든. 그런데 네가 그렇게 될까봐 그래. 제발 시간 개념 좀 갖고 살아! (이놈아,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 이런 잔소리를 아침마다 들으려니 아들도 나 못지않게 죽을 맛일 거다. “안 늦으니까 걱정 마세요” 라며 입을 쑥 내밀더니 언제부턴가 전략을 바꾸었다. 내가 따발총처럼 퍼부으면 미국드라마에 나오는 노란머리 청소년처럼 영어로 말하면서 억압을 분출한다. 내가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
서울풍경화첩 - 서울, 사랑해도 될까요 # 홍대 앞 직장을 옮기느라 예기치 않은 휴가가 생긴 친구가 제주도에 같이 가자고 한다. 가고팠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싶었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홍대앞 주차장길을 걷고 있었다. “좀 서운한 영화다” “감동이 없어도 눈물은 나네...” 조조영화로 본 ‘내사랑 내곁에’의 감상평을 두런두런 주고받으며. 환한 대낮의 홍대 앞은 생경했다. 주로 밤과 새벽사이에만 머물던 곳. 1년 365일 성탄절 이브처럼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거리가 헐겁게 비어 있다. 촬영이 끝난 세트장처럼 가짜 동네 같다. 길을 잘못 들어선 거 아닌가 싶어 연신 두리번거렸다. 수다스럽던 친구가 입을 꼭 다문 듯 새침한 거리. 걷는 동안 하나둘 셔터가 올라가고 홍대 앞이 기지개를 편다. 맞다. 여..
<성의 역사1> 자기 인식이 어떻게 권력의 예속을 낳는가 푸코의 ‘성의 역사’는 모두 세 권이다. 1권 앎의 의지, 2권 쾌락의 활용, 3권 자기배려. 그는 이 방대한 저서를 왜 썼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일단 푸코는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는 말로 논의를 펼쳐나간다. 성에 대한 엄격한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말해졌다는 것. 이같은 공적인 성담론이 확산은 '성의 주체'와 '성과학'을 탄생시켰고, 서구 현대의 개인은 자기-실천에 따라 발견되는 자기 몸속에 있는 진실이 아니라, 자기-인식(해석)에 따라 저 멀리 존재하는 진실을 찾으려는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예속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푸코는 계보학적으로 증명한다. 계보학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니체의 철학적 접근방식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것, 근본원인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좋은 마주침과 나쁜 마주침 우리는 살면서 대수롭지 않게 선악을 판단한다. 좋은 날씨, 나쁜 날씨. 좋은 학생, 나쁜 학생. 좋은 노래, 나쁜 노래. 하지만 이것은 사물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눈 오는 날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겐 나쁜 날씨이고, 눈싸움을 학수고대하는 꼬마들에겐 좋은 날씨일 것이다. 치매 걸린 시부모를 봉양하는 며느리는 시댁 식구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며느리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들이고,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유용한지 여부에만 관심을 두고 판단할 뿐,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에티카> 능력이 곧 자유다 니체는 자기보다 300년 전에 태어난 스피노자를 벗으로 삼는다. 니체는 한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선구자이며 그로 인해 이제 자기 혼자의 고독은 두 사람의 고독이 되었다고 열띤 어조로 고백했다고 한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스피노자는 신을 긍정했는데, 공통적으로 삶을 사랑했다. 스피노자 철학 역시 삶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을 전개했다. 니체가 우레와 같은 호통과 아름다운 은유의 방식으로 역설한다면 스피노자는 점잖고 집요하고 치밀한 학자스타일이다. 주석달고 증명하고 정리한다. “자연(신)은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좋은 날씨와..
<경제학-철학 수고> 자연적 감성으로부터의 총체적 소외 최근 쌍용차사태를 지켜보면서 나의 의문과 분노는 한 가지였다. 경제상황이 좋을 때라고 해서 별다른 혜택도 못 누리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왜 잔혹한 고통은 노동자의 차지가 되는가. 고통 분담이 아니라 고통 전담. 뭐 이런 무경우가 다 있는가. 좋을 때 부려먹다가 단물 빠지면 버리는 식이다. 감탄고토! 무명시절 내내 내조하던 조강지처 버렸다고 설경구-송윤아 커플에 거품 물던 네티즌들은 이런 사회적 차원의 대대적 배신 사태에 대해선 둔감하고 관대하다.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 때마다 계급배반 투표하는 것도 부족해서 생존권 싸움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강성노조, 귀족노조 이참에 다 감옥에 가두라’고 욕까지 해댄다. ‘서민’의 생존권 문제가 위협받는 상황이건만 자기도 서민이면서, 월급 몇 푼 더 받고 대출 끼고 산 집..
<동무론> 서늘하고 위험한 관계 친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관계가 친구인가. 어느 한 시절을 인연으로 친구가 되긴 쉬워도 오랜 세월 ‘좋은 친구’로 지내기는 어려운 거 같다. 삶의 조건, 가치관 등 사람은 계속 변하니까.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같은 신체 상태와 감정의 파장으로 합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친구는 이심전심 잘 통해야하지만 너무 똑같고 마냥 편하기만 해도 재미없다. 나를 보는 거니까. 거울을 쳐다보고 독백하는 '거울놀이'는 얼마 못가서 싫증나게 마련이다. 무릇, 벗이란 다양한 스펙트럼의 세계를 열어주어 서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존경할 만한 면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존재를 열어 밝히고 삶을 고양시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벗이다. 니체는 이를 창조하는 벗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벗을 ..
<대한민국 소통법> 소통이 지겨울 때가 있지 소통, 뜻이 통하여 서로 오해가 없음 사전적 정의는 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소통’은 복잡다단하다. 생각이 서로 다르더라도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에서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에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단, 소통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가슴에 참을 인자를 많이 비축해두어야 한다. 괴리, 상호몰이해, 의사소통 단절의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고된 시간과 체력의 싸움이다. 그러니 직업적인 소통전문가가 아닌 바에야 소통다운 소통이 힘들다. 먹고 사는 일 제쳐두고 ‘소통’의 지난한 정신노동에 정기를 다 빼앗기며 살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다. '모든 소통은 단절이다'라는 말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