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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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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말라르메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나는 의미란 게 정말로 시에 덧붙여진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의심했다. 나는 우리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베껴놓은 문장이다. 어떤 글을 읽고 뜻도 모른 채 압도당할 때 가장 행복하다. 사고하지 않는 그 바보같은 상태에 빠지는 게 좋다.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그것은 절정 체험이랄까 -.-; 머리가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거다. 황현산의 문장들은, 나를 종종 찰나에서 심연으로 이끈다. 말라르메 을 읽는데 황현산이 5년간 고심했다는 번역과 해설이, 말라르메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다. (말라르메 시도 물론 정이 들려는 중이다. 더 여러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처음엔 공부하듯이 무슨 시를 읽는가 싶기도 하지만,..
올드걸의 시집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 주리라. - 파스칼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1. 나이든 소녀 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있다. ‘우리 엄마도 한 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 문구에 쓰인 우리 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 덧 내가 효(孝)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 생기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
노동의 배신, 4천원 인생, 위건부두 가는 길 을 르포수업을 위해 연달아 읽었다. 세권 모두 노동체험에 관한 보고서다. 2010년 대한민국 시급인생의 노동실태를 보여준 은 겉표지의 헤드카피대로 ‘울면서 읽’었지만 책장이 후딱 넘어가고 눈물도 금세 마른다. 수업시간에 어느 분 말대로 “이렇게 빨리 읽은 책은 처음이다.” 나는 술술 읽히는 책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좋은 책이라면 독서중지-사유의 순간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이 책은 익숙한 내용이, 또한 필자가 기자들이다보니 정확한 의미전달에 주력한 단문 필체가 속도감을 높인다. 은 문학작품다웠다. 책장을 자주 덮어야했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고 고개 들어 부러워하고 탄광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탄식하고 조지오웰은 이 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지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동경을 보내고, 그러..
삶이 힘들어도 '황제처럼' 오랜 가뭄끝에 단비가 내리던 6월의 마지막 날 이 출간됐다. 이 책의 테마는 황제펭귄의 생애. 주제는 서로 곁에 되어 살자는 이야기다. MBC남극의 눈물 제작팀의 일원으로 남극에서 300일 생활한 송인혁 카메라감독과 같이 작업했다. 나의 벗이자 기획자인 박희선과 셋이서 지난 3월부터 매주 혹은 격주로 회동을 가졌다. 홍대 카페에서 치킨집으로, 여의도 장미의 집에서 고수부지로. 감독님이 사진을 넘기면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열심히 듣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상상했다. 그러다 보면 황제펭귄의 사는 모습은, 우리들 산다는 것의 징하디 징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강물되어 흘러갔다. 만남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황제펭귄은 동창처럼 친근한 녀석이 되었고 정이 흠뻑 들어버렸다. 그렇게 장시간 웃고 울고 떠들고 느끼고..
상처의 철학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무감각성, 무갈등성 한나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책.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부제와 달리 내용은 재판에 관한 취재기사에 가깝다. 조금 지루하게 장대하게 묘사되며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한다. 악과 평범함을 조합시킨 이 강렬한 표현은 당시 큰 파장과 논쟁을 일으켰다. 요점은 이렇다. 한나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치전범 아이히만은 사악함이 전신에 흐르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평범성banality은 진부하고 익숙하여 일상화..
상처의 철학 2 - 기억과 증언의 문제 # 사는 능력 아우슈비츠 수수용소에 들어가고 3-6개월이면 어김없이 죽었다. 몇 명은 살았다. 독일어를 몰라서 일찍 죽어간 자들도 많다. 단어 하나 배우기 전에 쓸려나간 것이다. (레비는 ‘침몰당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을 썼다.) 수감됐다고 다 희생자가 아니라면, 구조된 자들은 무슨 힘으로 살아남았는가. 동물성과 야수성이다. 이것이 있을 때만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았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오는 사례. 알프레드는 늘 깔끔하고 품위유지를 목숨처럼 여겼다. 남들과 다르게 처세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뤘고 특수임무를 맡았다. 앙리는 친화력이 좋았다.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등 약자의 위치를 전격적으로 취했다. 마치 애완견처럼 굴어 살아남았다. 사는 능력은 윤리와 존엄성 포기했을 때 도달했다. #..
아우슈비츠, 상처의 철학 인간이 겪는 고통과 기억, 언어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 아직은 막연하다. 글쓰기수업 할 때 과제를 내주면 대부분 고통스런 기억을 긁어내 언어로 담아온다. 잘 안 담긴다. 흩어진 나날들. 자기로부터 객관화가 어려운 기억인데 털어버리고 싶을 때 알맹이 없는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빈 중심에 들어찬 진실이 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하여질 수 없는, 잊을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 삶에서 떼어버리고 싶지만 자기를 형성한 결정적인 부분인 삶의 어두운 이면들. 누구나 있다. 사회면에 나오는 흉흉한 뉴스들. 그 자체로 야만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이 참 많이도 겪고 산다. 이 범람하는 고통 앞에서 나는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라는 질..
일방통행로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이전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은 상대방의 구두나 우산 값을 물어보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사교상의 어떠한 이야깃거리에도 삶의 상황에 관한 테마, 돈이라는 테마가 어김없이 침입해 들어온다...마치 극장 안에 갇혀서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무대 위의 공연을 계속해서 봐야만 하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반복해서 사고와 이야기의 주제로 삼아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 벤야민 저번 수업시간에 좀 웃겼다. 텍스트가 논문형식이라 좀 난해하다. 너나없이 어려웠다고들 말하면서 얘기가 시작됐는데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성역할에 따른 성차별- 젠더 이분법을 넘어서야한다는 이론적 논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