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8.15]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1)
  2. [2019.08.08] 백현진, 작업하는 사람 (2)
  3. [2019.08.08] 시인 문정희 - 본질적으로 시인은 여자다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은유칼럼]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수레의 무지에 대한 애정 세례는 새삼스럽지 않다. 아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돌보던 길냥이가 낳은 새끼들 4남매 중 혼자만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있던 아기고양이를 손수 데려온 4년 전부터 시작됐다. 흰색, 갈색, 검은색이 조화롭게 자리잡은 ‘삼색이’ 무지를 보며 연신 감탄한다. “무지는 무늬가 너무 예뻐!” 무지도 수레 곁을 충신처럼 지킨다. 수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슬며시 아이의 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수레가 공중에서 휘젓는 낚싯대를 따라 신나게 한판 놀다가, 숙제를 하는 수레 옆에서 잠이 들곤 한다. “무지는 나의 베스트프렌드”라고 으쓱하며 말하던 수레는, 열네 살 땐 커서 무지랑 결혼할 거라는 선언으로 날 놀래켰다. 그런 세속적 말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보다 너른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갔다. 졸음의 바닥에서 주워 올린 말. 선적이고 시적인 말. 그러고 보니 시도 있다. 문정희 시인의「응」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그때 너 시인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시인 같다는 건 시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둔 말이니까. 시인과 시인 같은 사람의 경계를 아이에게 주입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고양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아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 시인이다. 살면서 우리는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듯 시인지도 모르고 시도 짓는다. 잠결의 아이처럼. 

수레는 고2가 되니까 문학을 배워서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어느 밤엔 내 옆에서 자려고 눕더니 묻는다. 
“엄마,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 알아?”
“응. 알지. 우리 집에 시집도 있을 걸.” 
“근데 왜?” 
“문학시간에 배웠는데 그 시가 좋아……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수레는 제법 결연한 어투로 시구를 두 행 읊더니만 이내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 번 산다. 열일곱 무렵부터 나도 시가 괜히 좋았다. 시집 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노트에 정성스레 베껴 쓰곤 했다.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같은 단어가 만든 감정의 둘레에서, 나는 마치 꽃그늘 아래 앉은 것처럼 더없이 안전하다 느꼈다. 아이는 왜 그 시의 그 부분이 좋았을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나는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나도 한 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지만, 똑똑한 게 사는 데 좋은지 나쁜지 어느 순간부터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나이가 들고 오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수레에겐 고양이 무지가 책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대하는 법을 일러주는 지침서이자, 도도한 상대와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심리에세이, 한 번도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는 마술 같은 그림책. 매번 설렘으로 첫 장을 여는 책.

 

#무크지'언유주얼' #10매소설 #무지와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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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작업하는 사람

[행복한인터뷰]

인터넷 검색창에 ‘백현진’ 세 글자를 넣으면 가수, 화가라는 인물 정보가 뜬다. ‘위키백과’엔 그가 참여한 영화와 음반 목록이 주르르 펼쳐지고, ‘동영상’엔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붉은달 푸른해> 개장수로 분한 모습이 나온다. ‘이미지’엔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이 시선을 끈다. 바다 물결처럼 매 순간 다른 존재를 펼쳐내는 멀티플레이어 아티스트 백현진. 한때 ‘연남동 사는 백현진’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가 힙스터의 성지로 주목을 받자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백현진’으로 바꾸더니, 지금은 그저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현진은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붓을 잡는 사람이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독보적 화가다. 그가 2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삼청동 PKM갤러리는 청와대 춘추관 옆에 위치한다. 한마디로 명당 자리다. 서울 도심의 소음이 제거된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해 부르는 상식적 의미의 노동요가 아니라, 오히려 적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한 ‘또 다른 노동요’를 뜻한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아니 그 경계를 흔드는 백현진의 작품을 보는 일은 길들여진 두뇌에 자극을 주는 일이고, 자기 내면의 고요한 세계로 넘어가는 귀한 노동이기도 하다. 

첫 개인전 후 10년 정도 흘렀다. 중견작가로서 전시를 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점점 다가오는 전시를 덜 예민하고 덜 특별하게 느낀다. 그래서 좋다. 작업하다가 때 되면 작업 반출하고, 전시 시작하는 날 되면 전시장 가고, 이러한 과정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더 평범하게 만들고 싶다. 몸시 부담스럽다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일은 없고, 크게 무리가 없다. 음, 무리가 덜하다. 

이번 전시 부제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은 어떻게 만든 조합인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흙바닥에 매트리스가 있고 아지랑이가 피어있는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체 누워 있는 거, 멍 때리면서 물결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걸 끌고 들어왔다. 정말 체계 없이 낱 말들이 떠돌다가 어느 순간 결정되는 거라서 제목을 어떻게 지었는지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설명을 못 한다. 

그동안 인터뷰한 내용이나 전시 자료에도 무질서, 체계 없음, 직관, 즉흥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오더라. 
사람 사는 게 정말 체계가 없는 것 같다. 무질서나 체계 없음을 추구한다기보다 작업 과정이 사람 사는 것처럼 체계 없고 두서없는 걸 인정하는 거다. 


체계 없는 삶, 두서없는 예술 
백현진은 말을 예민하게 고른다. 바둑을 두듯 낱말을 둔다. 이미 뱉은 말을 되물리고 다른 말로 정정하길 거듭했다. 작업 이야기라서 더 그렇단다. 언어로 할 수 없어서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린 건데 그걸 다시 언어로 설명하는 건 그에게 “힘든 일이고 이상한 일”이다. 얼핏 언어에 대한 불신처럼 들리는 이 말은 실은 언어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매 맞은 기억밖에 없는” 학창 시절에 소년 백현진은 시를 썼다. 미대생이던 누나를 통해 막연히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던 터라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가 낙방했고, 조소과에 들어갔다. 그가 체험한 미대 입시는 참 별로였다. 누가 누가 구구단을 그림으로 잘 외우나 같은 평가 방법이 도대체 맞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적나라한 실체를 봤다. “안 다녀도 되겠구나.” 그즈음 ‘어어부 프로젝트’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 학교를 계속 안 나갔더니 제적 통지서가 날아왔다. 어어부 프로젝트 백현진으로 청춘을 태우고 21세기로 넘어왔다. 제도 교육의 문을 박차고 나온다고 다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스템에 순응하는 예술가라는 것도 형용모순임을 그의 20대가 보여준다. 

음악을 하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화가로서 자기 재능을 믿게해준 운명의 한마디가 있나? 
2000년대 초중반에 현대 무용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의 초청으로 몇 차례 독일에서 공연했고, 몇몇 작품에 어어부 프로젝트가 음악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피나를 만났다. 작업하면서 많이 헷갈리던 시기였다. ‘다른 걸 해야 하나’가 아니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그때 피나가 내 그림과 음악에 큰 칭찬을 해줬다. 저 정도 예술가가 내작업을 좋게 봐주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척 큰 힘이 됐다. 그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내가 독일에서 피나의 작품을 쭉 보면서 이 사람은 어마어마한 예술가라고 느낀 상태에서 그 얘길 들으니까 힘이 된 거다. 

작가로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건 운이라고 말했는데, 피나 바우슈를 만난 것도 멋진 운 같다. 또 어떤 일을 운이 좋았다고 기억하나? 
대학 때부터 먹고살겠다고 일러스트레이터와 그래픽디자이너로 소소하게 일하다가 30대 초반에 그만두었다. 내가 한 일을 클라이언트에게 컨펌받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았다. 최소 생활비도 못 버니까 막막하던 차에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속 작가 제안이 왔다. 5년 동안 작업실과 재료비 걱정 없이 일했다. 큰 행운이었다. 

2016년 <들과 새와 개와 재능> 전시 이후 2년 만인데 신작 페인팅이 무려 60여 점이다. 작업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는지?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 중 반 이상은 오전 7~8시부터 오후 1시까지 붓질한 거다. 오후 시간엔 놀거나 음악 작업을 하거나 산책도 하고 낮잠도 잔다.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작업하는 범주에 속하는 작가는 아니다. 엄청 흐트러진다.(웃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한다. 

재능은 곧 성실함이라는 말이 있는데 동의하나? 
내 생각에 작가로서 성실함은 곧 작업량이다. 죽었건 살아 있건 작가 중 ‘이 사람은 진짜 근사한 예술가구나’라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작업량이 굉장하다. 그렇게 치면 나는 멀었다고 본다. 


연기 아닌 연기, 그림 아닌 그림 
백현진의 삶은 크게 두 축이다. 미술가로서 시간과 삶, 음악가로서 시간과 삶. 보통 작곡할 때 입으로 멜로디 만들어서 시작하니까 그림 그리면서도 흥얼흥얼 동시에 작업이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전시장 벽면에 작은 붓으로 녹색을 칠하는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을 선보인다. 미술과 음악 작업에 임하는 그는 흡사 배우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활과 연기가 구분되지 않던 그는 일찍이 김지운 감독의 권유로 영화 <반칙왕>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 후 품앗이로 이런저런 작품에 출연하다가 장률 감독의 <경주>에서 최 교수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속물 역할을 찰떡처럼 해낼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이 얼마나 어떤 면에서 후진지, 적들을 좀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붉은달 푸른해>에서는 개장수 역으로 인기를 끌었다. 

연기 잘한다는 리뷰가 많더라. 인기를 실감하나? 
연남동이 뜨기전부터 이 동네에 쭉 살았으니까 음악 하고 미술 하는 백현진으로 아는 젊은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 요즘에는 지나가다 대뜸 (손가락질하면서) “어, 어, 어 탤런트!” “어? 그, 김선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나온 드라마에서 나를 봤다는 의미겠지. 그러면 “저는 김선아가 아닙니다” 하고 지나간다.(웃음) 

배우 활동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일시적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 보통은 합주할 때 빼고는 그림이나 음악을 다 혼자 한다. 배우 일은 1년에 한 달 남짓 하는데 그런 일시적 소속감이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음악이나 그림만큼은 아니지만 현장 가서 연기할 때 재미있다. 

(그림설명: 백현진 작가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나중에 뭐가 나올지는 그도 모른다. 계속 그리다가 그림을 보고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멈춘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긴 시간 계속하면 육체적으로 힘들다. 그래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멈추지 못한다. 그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기, 노래, 미술 세 분야를 아우르는 공통된 게 있다면 무엇인가. 
굳이 꼽는다면 셋 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일한다. 배우로는 약점일 수 있는데, 연기할 때도 테이크마다 다르게 간다. 연기 철학 같은 게 아니라 대본대로 똑같이 하는 걸 잘 못한다. 이번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개장수 역할이 재밌다고 하던데, 작가랑 연출가가 거의 열어줬다. 그런 조건에서만 기존 배우와 다른 매력이 나오는 것 같다. 

어느 인터뷰에 보니까, "저게 무슨 연기냐" 소리를 듣는데, 음악 할 때도 "저게 무슨 음악이냐"는 얘길 들어서 괜찮다고 했더라. 
그림을 보고도 그렇게 말한다. “저게 무슨 그림이냐.”(웃음)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청년 시절엔 ‘웃기시네’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각자 마음대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맷집 키우는 훈련이 됐다. 한국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하면, 보통은 작업에 대한 피드백이나 시장에서 성과와 무관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것이다. 인디 뮤지션으로 오래 시간을 보낸 게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혹평에 맷집을 길러줬다. 

음악 하고 그림 그리면 추하지 않게 늙을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왜 그런가? 
누굴 미워하거나 우쭐하는 마음이 후진 생각이지 않나. 주눅 들고 낙담하고 시기하고 우쭐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림 그리고 음악 하고 글 쓸 때는 그런 생각이 들어올 겨를이 없다. 깨어 있는 동안 하루의 절반 가량을 뒤숭숭한 마음으로 지내는 거랑, 그냥 멍하니 우두커니 시간을 통과하는 것을 비교하면 대자연의 일부로서 후자가 훨씬 더 깔끔하고 좋은 것 같다. 

대개 사람들이 자기 단점, 결핍 때문에 위축되고 남을 미워하고, 도전을 망설인다. 자기 단점에 대한 태도가 궁금하다. 
단점으로만 구성된 인간일 것이다.(웃음) 그런데 인간이 여기까지 끌고 온 문명에 대해 혼자 깊게 생각해보면 문명에서 발전은 없다. 거기엔 변화, 변경만이 있다. 어떤 기준이 있어서 잘하면 장점, 못하면 단점인데 그런 게 없다는 뜻이다. 내 작업이 다른 작업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전혀 겸손이 아니다. 그럼 뭐가 가치 있냐고 묻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령 피나 바우슈 작품들은 더 가치가 있는 무엇일까? 그냥 내게 크게 좋은 작품이다. 어쨌든 내가 싫어하고 못 견뎌 하는 건 여전히 많은데, 가급적 그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다. 

가족들과는 어떻게 지내나? 
아버지는 오랜 세월 외항선 선장이어서 1년 만에 집에와서 한 달 정도 살다 다시 나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도 아버지 역할이 어떤 건지 모르고, 나도 자식으로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도 정치인이라 집에 항상 안 계셨고, 할머니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에겐 내리사랑의 경험이 부재했을 거다. 거기까지 헤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따로 노셨다. 청년 시절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할 때 부모님을 효도 차원에서 모셨다. 기분 좋게 공연이 끝나고 부모님께 절을 하며 장난으로 변변히 사랑도 안 주시고 완전히 방치를 해줘서 내가 이렇게 예술가로 재미있게 산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어흠” 헛기침하고, 어머니는 웃으시더라.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1934년생인데 늘 건강하셔서 정말 고맙다. 

그에게 행복하냐고 묻자 늘 재미있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그 청년 덕분 같다. “번쩍번쩍 정신을 들게 하는 젊은 사람”이다. 과거의 자신처럼 꼬여 있고 독한 젊은 청년이 내 작품을 보면? 내 음악을 들으면? 그게 섬뜩섬뜩해서 너무 깝치지도 말고 입 닥치고 작업을 잘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내면의 감시자는 “인정사정 안 봐주니까 걔한테 걸리면 다 작살난다”며 웃는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거의 모든 답변에 “혼자 깊게 생각해보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날 선 청년 정신과 고요한 성찰에서 나온 백현진의 작품은 겨울 땅처럼 언 마음에 청신한 봄기운을 한 줌 불어넣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기 위해 백현진이 하지 않은 것들

1 작업의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난 1인 사업자다. 혼자 그림 그리고, 흥얼거린 것으로 노래를 만든다. 작업을 계속하며 규모를 키운 사람을 많이 봤는데,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2 가능한 한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지 않았다.
휘둘리거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작업을 계속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무언가를 그들의 시각에 계속 맞춰가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3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다.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2004년, 먹고 살기 위해 소소하게 하던 일을 모두 정리했다. 작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나 환경에 대해 변명 거리를 스스로 갖지 못하게, 재료비나 작업실 없이도 작업 가능한 0.3mm 샤프를 선택해 <염기 섞인 붉은 책>이라는 드로잉 북을 만들었다. 그 책이 갤러리의 눈에 띄어 전속 작가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행복이가득한집 2019 인터뷰

시인 문정희 - 본질적으로 시인은 여자다

[행복한인터뷰]


인생에 한 번쯤 ‘사랑의 눈사태’를 꿈꾸는 자의 유명한 주술,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한계령을 위한 연가」)의 시인 문정희. 그가 눈앞에 있다. 검은색 롱 카디건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시인의 자태와 형형한 눈빛은 존재 그 자체로 주변 온도를 덥혀놓는다. 1969년 스물둘에 등단한 그는 최근 열네 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을 펴냈다. 여러모로 드물고 귀한 시집이 우리에게 당도했다. 시인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인으로 살기는 척박한 현실에서 등단 50년간 독보적인 위상을 지킨 사람. 그는 남성 중심의 언어로 짜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삭제당한 여성의 존엄과 목소리를 살려내는 시-업에 일생을 투신했고, 이번 시집은 그 절정을 꽃피웠다. 유일한 무기는 모국어, 창작의 동력은 자유와 사랑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고단한 전사의 표정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영매(靈媒)’가 된 기세로 시종 뜨거운 언어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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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문재(文才)로서 문학적 재주를 인정받았고, 그게 자부심으로 작용했어요. 그러나 그건 젖은 속옷 같은 거였죠. 결국은 벗어야 할 옷이었죠. 주위의 엄청난 견제와 적대를 받았고, 나 자신조차 자기기만에 차서 약간 눈을 감게 되었죠. 등단 후에 악전고투가 시작됐는데 저는 단순화했어요. 어린 시절 화려한 문학적 이력의 좋은 점만 취했어요. 예술가들이 자기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고민하거든요. 저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요. 내 손에 엄청나게 좋은 불칼이 들어 있다. 이렇게 요약하고 불을 내거나 방어하거나 찌르자. 정신의 잉크가 마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읽고 썼습니다.”
젖은 속옷은 벗고 불칼을 든 채 오직 씀으로써 존재하기. 50년 시인으로 살아온 내적 동력을 묻자 나온 명쾌한 대답이다.
문정희는 진명여고 재학 중 미당 서정주가 발탁해 여고생 최초로 시집 『꽃숨』을 발간하는 등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등을 발표하며 모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어조로 생명과 사랑, 자유와 고독을 노래했다. 최근 펴낸 『작가의 사랑』에는 60편의 시가 실렸는데 세계 시민이 되지 못한 여성의 서사가 주를 이룬다. 
최초의 콩쿠르상 후보였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탈락하자 심사위원을 전원 여성으로 꾸린 페미나상을 제정한 안나 드와이유, 독재자 앞에서 차도르를 찢어버린 전설의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처형당한 김수임, 가정폭력으로 남편을 살해한 무명씨 아내,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5개 국어를 구사했으나 데이트 폭력을 당해 문학적 죽음을 선고받고 쓸쓸히 죽어간 김명순……. 이 땅의 불평등한 구조와 미개한 폭력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눈물과 비명을 시인이 한 명 한 명 곡진한 언어로 살려냈다.
이런 작품들은 근래 한국사회를 달군 ‘미투(나도 말한다)’의 대리 발화로 읽힌다. 그 때문인지 시집을 낸 후 매체와의 인터뷰를 열다섯 번이나 치렀고 대개 미투에 초점을 맞추어 시집을 조명하는 기사가 나갔다. 그와 같은 해석도 의미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여성의 이야기는 이미 이전 시집들에서 더 시끄럽게 계속 말해왔어요. 그런데 제 시에서 여성은 남성의 상대 성이 아닌 대지모적인 생명의 원류입니다. 3~4년 전, 스페인에서 열린 ‘책의 밤’이란 행사에 참여했어요. 전 세계에서 100여 명의 작가가 모인 큰 자리였죠. 오직 나만의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어요. 생명의 본질로서의 여성성, 대지모가 내 시 세계다. 자궁은 여자의 몸에 있지만, 여자의 자궁이 아니라 인류의 자궁이다. 전통적으로 소외되고 학대받은 여성의 삶에서부터 생명 주체, 창조 주체로서의 존엄을 노래하는 것까지가 나의 시 세계란 뜻이었죠. 한국에서 모성은 자기 새끼에 대한 사랑을 희생으로 실천하는 동물적 모성이죠. 남성들이 여성 요소를 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다가 모성에서는 성스럽게 얘기해요. 그건 굴레를 씌워서 다루기 쉽게 하려는 의도죠. 에이드리언 리치라는 미국 시인이 이미 잘 분석한 내용입니다. 지배 체제로 악용되거나 국한된 모성성 이외에 생명의 원천으로서 대담한 모성성. 내가 여자이고 그걸 알고 있는 시인이라는 게 여간 즐겁지 않았어요. 본질적으로 시인은 여자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면, 김소월도 여성성으로 시를 썼어요. 미당의 「귀촉도」, 만해의 「님의 침묵」도 여성 어조를 구사해요. 저는 인간의 생명 중에 가장 원천적이고 마르지 않는 것을 썼습니다.”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있다

문정희 시인은 결혼과 출산을 택하고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일찍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눈떴다. 남편이 4대 독자여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집안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겁 없이 치른 결혼 때문에 가난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엄청난 생활 세계의 압력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혼까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혹독한 일상은 고맙게도 문학의 엄청난 자료를 제공하고 관념에 빠지지 않는 단단한 언어를 선물했다. 가령 “결혼은 전쟁보다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 같은 시구가 그것이다. 서른 초반 뉴욕에서 시작한 대학원 생활은 시인으로서 그가 고통의 정점으로 기억하는 시간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언어를, 한국어를 빼버리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더구나 미국에 가면 ‘동양에서 온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로 대우받을 줄 알았는데, 나는 마이너, 주변인, 그냥 영어 서툰 동양여자예요. 2년 동안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끔찍했어요. 슬픔, 가난, 고통, 비탄 등 모든 게 나한테 왔었는데 그때 또 내가 느낀 건 이거였어요. 젊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스승 서정주는 그에게 ‘하늘 아래 오직 네가 있다’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젊었을 때는 못 알아들었다. 그저 당신이 재능을 인정해준 제자에 대한 격려로 여겼다. 힘든 상황이 닥치자 스승의 말이 되살아났다. 세상 어디에 가도 나 같은 존재는 나밖에 없는데 우울과 비탄과 자기비하에 휩싸여 살 수만은 없지 않나, 마음을 추슬렀다.
“그 동네에 헌책방이 있었어요. 1달러만 주면 스웨덴 여배우 자서전도 살 수 있었죠. 그때 거기서 『No time for tears』(눈물 흘릴 시간이 없다)라는 책을 만났어요. 작가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참 좋았어요. 또 지하철 계단을 보면 ‘watch your step’(발 조심)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 말이 당신 지금 어디 서 있어? 네 발걸음을 한번 봐. 그렇게 읽혔어요. 지나가는 모든 말이 와닿았고, 그럴 때마다 하늘 아래 유일한 존재로서 내가 있다는 걸 생각했어요.”
당시 뉴욕은 월남전 이후 반전 민권운동 히피즘이 가라앉고 앨런 긴즈버그나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충만했다. 그 시절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폭식 하듯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그때의 독서로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이론체계를 다질 수 있었다. 세상 모든 활자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써가며 ‘존재의 증명’이자 ‘고통의 자산화’를 이뤄낸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고 피 흘리고 아픈 것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싫긴 하지만.”

지구 위의 시인임을 즐긴다

문정희의 시는 국경을 넘은 지 오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등 9개 국어로 출판된 12권의 번역 시집을 갖고 있다. 마케도니아 세계 시인 포럼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시인상’(2004)과 스웨덴 노벨상 수상 시인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2010)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국제창작프로그램이나 문학행사에 한국 대표로 자주 초청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이룬 일들이 지나치게 과장되는 것을 그는 경계한다.
“한번은 낭트 시인의 집에서 저를 초청했어요. 유료 관객석이 꽉 차고 성황리에 행사를 치렀죠. 그날 밤 한국의 모 신문사에서 인터뷰 전화가 왔기에 프랑스 독자들이 한국시에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는 게 참 기쁘다고 했더니, 신문에 이렇게 기사가 났어요. ‘케이팝에 이어 한국시도 인기’. 한국 매체는 해외 문학상을 올림픽 경기나 축구 시합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번에 다른 신문사와 인터뷰할 때 말했어요.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시의 세계화에는 관심 없다. 세계 속의 한국시라면 모르지만. 예술가는 철저히 자기 이름을 걸고 활동한다. 국가의 이름을 걸고 하지 않는다, 라고요. 쌀쌀맞게 들릴지 몰라도 시인이 국가나 민족에 사로잡혀 있으면 고립과 토속화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한국적인 것, 케이팝을 내세우기보다 유일한 존재로서 자신을 봐야 해요.”
문정희는 노마드다. “이 시대 지구 위의 시인임을 즐긴다.” 순전히 만남 때문이다. 해외 교류에서 만나는 작가들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과 영감을 제공한다. 작가가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는 확인은 언제나 설레고 고맙다. 효율성의 척도로 문학을 대하지 않는 태도를 가진 시인들, 시를 실용으로 뚝딱 바꿔먹을 생각보다는 좀 더 원대한 가치를 꿈꾸고 구상하는 자존심 강한 그들의 모습에 전염돼 그 역시 창작욕에 불타곤 한다. 아울러 “난 충분히 가능하구나.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더 괜찮구나.” 하는 긍정적인 힘도 얻어 온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 집 밖을 떠도는 동안은 밥 먹고 설거지하는 일상을 제거해버리니까 오롯이 자기에게, 자기 안에서도 예술가 자아를 꺼내놓고 즐길 수 있어서 좋다.
1995년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다. 외국 작가 서른다섯 명과 석 달을 살았는데 그중 여섯 명이 여자였다. 어느 날 밤 여자끼리 한방에 모여서 첫사랑 얘기를 나눴던 일화는 시집 『작가의 사랑』 표제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남미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동아시아 작가가 /한방에 모여 사랑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작가의 사랑」 일부)
‘떠돌이별’ 문정희에 대해 일본 시인 다카하시 무쓰오는 이렇게 말했다. “문정희는 우연히 한국 땅에서 태어난 것뿐. 그녀의 진정한 생국은 시의 나라이다.”

문학과 치명적인 사랑을 못한 열등감

『치명적 사랑을 못한 열등감』은 그가 2016년 가을에 펴낸 산문집 제목이다. 사랑이란 말도, 열등감이란 말도, 치명적이란 말도 탁탁 요철처럼 걸리는 단어다. 치명적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문학이에요, 문학”이라고 말한다.
“더 좋은 문학, 더 큰 문학을 했었으면 어떨까. 재능을 너무 노예화하며 살았던 거 같아요. ‘재능의 노예화’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한 말이에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상을 받았고 대학에는 특례입학 했어요. 굶어 죽을 뻔한 위기도 바닥에 굴러떨어질 기회도 없었어요. 적당히 구제되고 적당히 이름 걸고 살 수 있는 정도의 문학 때문에 끝까지 몰락하지 못한 슬픔이 있어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서둘러 말을 잇는다.
“하지만 저는 문학하는 사람한테 섣불리 상처나 비극을 요구하지 말라고 해요. 특히 한국문학에서 비극을 요구하는 건 ‘아비투스’(습관)예요. 진정한 비극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안 하면서 조금 가난하고 조금 병을 앓는 게 비극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거절하고 싶어요. 괴테 문학이 저렇게 위대해지기까지는 괴테의 장수가 한몫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살아온 날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지만 최근 삶이 싫지는 않아요. 책도 작가도 예술도 최고급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거 같아요.”
자책과 달리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남성 위주의 문학사에서 방치된 여류시가 시조와 조선시대 기생시집 편저 작업을 수년간 해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시 「딸아 미안하다」, 유관순을 소재로 애국이 아닌 자유혼에 초점을 두고 「아우내의 새」라는 장시를 발표했다. 가부장제 여성의 처지를 이야기한 시 「유령」, 「그 많던 여학생은 다 어디로 갔는가」 등 사라진 인류 절반의 서사를 문학적 기록으로 복원시켰다. 2017년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룬 여성 문인들 글 모음집 『참고문헌 없음』에도 그의 작품 「곡시」가 실렸다. 여성 문인 중 최연장자로서 문정희는 어린 후배들과 나란히 손잡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문정희는 평생 권력에 편에 서지 않고 시의 편에 섰다. 치명적인 사랑을 못했다고 말할 때는 아련한 눈동자가 되고, 오래 살아서 대가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는 금세 활달한 눈동자가 된다. 몸에서 슬픔과 기쁨의 다양한 감정이 폭주하고, 관능과 성찰의 언어가 팽팽하게 길항하는 시인. 그의 시가 늙지 않는 것은 필연이다.




#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문학을 가까이하는 법

1. 시는 감동이 아니라 매혹이다. 시에서 감동을 구하면 유행가 가락 같은 대중적 위로에 치우친 대중시를 고르게 된다. 설명이 없어도 딱 거기 있음으로써 매혹되는 시가 좋은 시다.

2. 쉽고 재밌는 것부터 시작하라. 패스트푸드도 먹고 길거리 음식도 먹어봐야 미식가가 된다. 제아무리 대단한 고전문학 작품도 재미없으면 던져버려도 된다. 읽다 보면 ‘재미’가 바뀔 것이다.

3. 시는 언어의 실패에서 시작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해보라. 언젠가 언어로 존재를 투시하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