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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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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의 유혹 ‘너희들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다 같은 말을 삼가 주세요.’ 얼마 전 청소년 대상 강의를 앞두고 몇 가지 당부가 적힌 메일이 왔다. 강사들에게 귀띔할 정도면 이런 일이 잦나 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전적이 있다.한 강연에서 그간 청소년을 만나면서 편견이 깨졌노라 고백하다가 그 문제적 발언, ‘청소년들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는 걸 지적받고 알았다. 한 청소년이 말했다. “만약에 은유 작가님께 누가 ‘여자가 이런 글도 쓰고 대단하다’는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무안함에 ‘땀뻘뻘’ 상태가 된 나는 다른 섬세한 표현을 찾아보겠다며 사과했다. 며칠간 그 쓴소리가 웽웽거려 혼자 얼굴 붉어졌다. 맞는 말인데 ‘좀만 살살 말해주지’ 싶은 서운함이 들었지만, 청소년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은근히 하대한 ..
은유 읽다 - 나의 두 사람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생아 용품 매장에 갔다. 손바닥만 한 턱받이부터 팔뚝만 한 배내옷까지 크기가 앙증맞고, 순백색부터 복숭아 색까지 색감마저 보드라워 넋을 잃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야? 평생 한 번인데 하루도 못 빼? (…) 오빠 회사 사람만 그렇겠지. 내 주변엔 교육 안 듣는 사람 없어.” 만삭의 임신부였다. 아마도 예비 부모 출산교육 프로그램에 남편과 함께 가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각이 달라서 남편이 남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고통의 출구를 찾는 방법 강원도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6월에 ‘평화’를 주제로 독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를 읽는다며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강연을 앞두고 담당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께 드리는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었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억울하게 잡힌 분들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토록 엉뚱한 질문이라니, 과연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핵심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소는 개인의 사회적 좌표다. 그 학생은 폭력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이 어떻게 공적 발언의 장을 확보해 ‘나 여기 있음’ ‘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절차와 경로의 시작점을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