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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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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 가다 그곳이 조금 쓸쓸해졌을 때 가려 했다. 피서철 해운대처럼 인산인해를 이룰 때는 굳이 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곳이 마른 겨울 논처럼 적막할 때 한 번 찾아뵈려 했다. ‘언제 한 번 보자’라는 말로 전화를 끊은 것처럼 마음의 숙제로 남겨두었던 참이다. 친구가 모임에서 간다기에 내 자리도 하나 마련해 달라고 냉큼 부탁했다. 원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낡은 편지 하나 손에 쥐고 어릴 때 헤어진 아비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딸이 되어 기웃기웃 그 마을길을 홀로 걷고 싶었는데... 현실계에서 가능한 일이 적어질수록 영화적 상상력만 발달한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시댁식구들과 성묘를 마치고 귀경길, 천안 시내에 내렸다. 조신한 맏며느리에서 바람의 딸 유목민으로 모드변환. 내가 사랑하는 내가 되어 천안아산역에 당도했다..
김희애 배우 - 오늘 더 아름다워지는 '희애씨의 위대한 하루' 생은 아이러니다. 변화무쌍한 세태에 따라 ‘변신’하면서도 언제나 ‘한결’ 같아야 한다. 이 고난도의 주문을 너끈히 수행하는 한 사람이 있다. 배우 김희애. 그래서 대중은 그에게 따뜻한 지지의 눈길을 보낸다. 데뷔 이후 25년 간 영화, 드라마, CF에서 보여준 흐트러짐 없는 미모에 탄복하고, 세월의 풍파를 녹여낸 품 넓은 연기에 울고 웃는다. 날마다 조금씩, 오늘 더 아름다워지는 희애씨의 위대한 하루이야기. "몸매도 시구도 20대 같잖아~” “나이 들수록 더 예뻐지는 배우다” “개념복장이다.” 지난 4월 7일, LG의 잠실 홈 개막전에서 배우 김희애가 시구를 했다. 주로 이십대의 여자연예인들이 시구를 하던 관례를 깨고 그녀가 등장하자 야구팬들은 더욱 환호했다. 기사를 본 네티즌들은 "미니스커트에 하이힐 ..
여덟살인생 - 딸의 명언노트 “엄마 나도 이제 슬슬 명언노트를 써야겠어!” 어느 날 딸이 인형놀이를 하다가 툭 던지듯 말한다. 느닷없이 웬 명언노트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곧 상황을 파악했다. 한달 전인가 내가 아들에게 '너도 이제부터 책 읽다가 좋은 구절을 모아 명언노트를 써보라'고 말한 걸 옆에서 귀담아 두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딸은 둘째아이 특유의 '시샘과 모방'이 생존의 동력이다. 내가 아들한테 '학교에서 오면 수저통 좀 꺼내놓으라'고 말하면 딸은 그 다음날부터 현관에서 신발 벗자마자 수저통부터 싱크대에 올려놓는 식이다. 다 좋다. 명언노트 결심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 때는 주로 인형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놀이터에 나간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야 책에 손이 가..
다시 가을 / 도종환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 도종환 시집 , 문학동네 소녀의 가을은 낙엽과 시와 노래로 충만했다. 앙케이트 할 때면 좋아하는 계절에 ‘가을’ 써놓고 9월부터 미리 들떠 지냈다. 고1때 국어선생님을 사모했는데 ‘낙엽을 태우면서’를 배우는 시간엔 애들이랑 우애동산에서 낙엽을 쓸어와 교단에 쫙 깔아놓고 선생님을 ..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가을이 여성들의 계절이라 그런가. 연달아 여성들의 잔치가 열렸다. 목요일(17일)에는 여성연합 후원의 밤. 다음날에는 여성공동체 ‘윙W-ing’ 축제. 두 조직의 주축 세력도 열성 당원도 아닌데, 그러니까 굳이 꼭 가야만 하는 자리도 아니었는데 나는 거기에 있었다. 실뿌리로 엉킨 인연의 타래와 운명적 끌림 때문에 종종 그런 곳에 흘러들어간다. 봉은사의 밤과 신길동의 밤.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강남의 천년 고찰 미륵불 앞마당에서 열린 지식인 여성운동가들의 밤. 여성연합 후원의 밤에는 학계, 노동계, 문화계, 정계 등등으로 테이블이 배치될 만큼 유명인들이 다 모였다. 정갈한 유기농 뷔페 음식을 나누며 긴 시간 할애해 자리를 빛낸 이름을 소개하고, 요즘 상황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더 사서 고생하자. 추운 겨울..
<성의 역사1> 자기 인식이 어떻게 권력의 예속을 낳는가 푸코의 ‘성의 역사’는 모두 세 권이다. 1권 앎의 의지, 2권 쾌락의 활용, 3권 자기배려. 그는 이 방대한 저서를 왜 썼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일단 푸코는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는 말로 논의를 펼쳐나간다. 성에 대한 엄격한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말해졌다는 것. 이같은 공적인 성담론이 확산은 '성의 주체'와 '성과학'을 탄생시켰고, 서구 현대의 개인은 자기-실천에 따라 발견되는 자기 몸속에 있는 진실이 아니라, 자기-인식(해석)에 따라 저 멀리 존재하는 진실을 찾으려는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예속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푸코는 계보학적으로 증명한다. 계보학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니체의 철학적 접근방식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것, 근본원인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강 / 황인숙 ‘눈도 마주치지 말자’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직업의 종류가 만 가지가 넘는다. 그간 여러 직업의 세계를 접했는데 아무래도 사보일을 하니까 회사원을 가장 많이 만난다. 같은 샐러리맨이라도 업종에 따라 삶이 다르다. 매스컴에서 신의 직장이라고 소개하는 공기업, 금융권 고액연봉자 일수록 쫓기듯 산다...
<인디포럼 채무변제파티> 그렇다면 십시일반, 아니면 말고 쉬운 길 놔두고 가시덤불 길 가는 사람들이 있다. 농약 한통 쫙 뿌리면 한 소쿠리 가득 사과를 담을 수 있는데 굳이 농약 안 쓰고 고집 부려 수확량의 삼분의 일밖에 못 건지는 농부들. 고액의 족집게 강사자리 놔두고 극구 화폐랑 거리가 먼 인문학 전파하는 학자들. 해직될 거 알면서도 거리에 나서는 교사들. 밥 굶을 줄 알면서도 굳이 독립영화를 찍는 사람들. 만나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의 면상은 대체로 밝다. 애환은 있어도 그늘은 없다. 가난이라기보다 '청빈'한 삶을 택했으니 자기만족도가 높은 것이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즐겁다. 이들이 모여서 ‘파티’를 열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즐거움의 무한 증폭이다. 인디포럼 채무변제파티-그렇다면 십시일반. 9월 12일 독립영화판 사람들이 일일호프를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