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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 괴로워할 권리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 ‘포도밭 묘지2’ 중


시집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구이자 기형도의 미학적 태도가 함축적으로 드러난 시구 같아요. 가난 체험을 통과하고 80년대 군부 독재의 암흑기에 성년이 된 기형도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까를 생각하면 이 시집의 첫 시가 '안개'인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불안하고 모호하고 불투명하죠. 시인은 그렇게 자기 언어로 구축한 폐허에서 괴로움의 권리를 안전하고 예민하게 누립니다. 거기서 고백적 화법이, 잠언 같은 시구가 터지고요.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같은. 




# 위대한 잠언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 시작 메모 



이 구절에 대해 시인 김행숙은 이렇게 해석해요.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는 나라는 존재가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더 비극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기형도가 생각한 게 아닐까. 이 체념도 저항도 아닌 겸허를, 기형도가 자연에서 배우고 저는 그가 쓴 시에서 배웁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 굳은 감각이 놓치는 것들, 편협한 삶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거든요. 읽어도 읽어도 모르는 게 나오는 시집, 살아도 살아도 어려운 삶이랑 비슷하죠. 가장 위대한 잠언은 살아냄 속에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  입 속의 검은 잎


이 시집의 표제시입니다. 기형도가 시집 출간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어서 직접 책을 내지 못했고, 소설가 성석제랑 문학평론가 김현이 의논해서 유고시집을 펴냈지요. 그들이 고른 표제시이고 제목입니다. 기형도는 원래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계획했대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선언한 그 시요. 그에게 괴로워할 권리와 희망을 노래할 권리와 다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괴로워할 권리를 누렸기에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요. 


입 속의 검은 잎. 시가 어려운데 기형도 절친이었던 평론가 박해현의 증언과 기형도의 시를 옮겨놓습니다. 마침 오늘이 5월 18일이네요. 오월 광주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5.18은 기형도 시로 애도하고 기억하네요. 



“기형도의 그 시는 그가 여름휴가 중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온 뒤 쓴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광주에 갔습니다. 그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기형도 역시 5.18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에 나오는 대로 광주에 가서 택시를 타고 망월동에 찾아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에서 ‘그 일’은 5.18이고 ‘그’는 시인이 상상한 일종의 전형적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박해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입 속의 검은 잎’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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