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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병원이 병을 만든다 - 병원 앞의 생

이반일리히의 책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절반 가량 읽었다. (나머지는 다음주에 읽는다.)  제목만으로도 주제의식이 명확히 드러나는 책이다보니, 안 읽어도 읽은 거 같았다. 워낙 건강한 편이어서 크게 병원 갈 일 없이 성장했는데 결혼하고 불임클리닉을 다니게 됐다. 의사는 매뉴얼화된 지식과 자료, 통계 등으로 나의 몸을 진단하는데 그 해석이라는 게 그닥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모르나?" 하는 생각을 몇 차례 했다. 나는 기초체온을 재고 몸을 계속 관찰했지만 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진찰하는 시간도 10분 내외이고. 그 이후에 아이를 키우면서 소아과를 갔을 때도 대기시간이 진료시간보다 길고 의사의 태도도 형식적이어서 화병이 더 날 것 같았다. 여기에 끌려다니면 끝도 없겠구나 싶었다. 가급적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아이를 돌봐야겠다 결심했고 그렇게 아이 둘을 길렀다. 암튼 내 몸과 아이들 몸을 나보다 남이 더 잘 안다는 것도 뭔가 불합리하게 생각됐으니까.  

이반일리히는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불만과 화남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도 그랬지만 40년도 전에 유럽에서 나온 책이 한국사회에 이렇게 적합하게 맞아떨어지다니 신기해하면서 읽었다. 한줄로 요점정리하면, 병원병의 문제점은 자기치료 의지의 회복의 기회가 원초적으로 차단되고, 치료에 대해 의사의 직업적 독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 병원에 가서 병을 얻다

 

병을 앓는 사람들, 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가 개입한 결과, 새로운 질병이 많아진다. 이처럼 의사가 만드는 병을 병원병이라고 부른다. ‘임상적인 병원병이란, 치료, 의사 또는 병원이 병원, 곧 병을 발생시키는 인자因子가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포함한다. 나아가 의료가 단지 개인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적 조직체가 전체 환경에 주는 영향을 통하여 건강을 침식한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의료적 손해가 사회 정치적 전달양식에 의해 산출될 때, 그것이 사회적 병원병이다

그 예로 드는 것. -옛날에는 치명적이었을 저양양의 수준에서도 인간의 3분의 1은 생존할 수 있었으나 반면에 보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식사를 통하여 더욱 많은 독물과 돌연변이를 초래하는 원인을 흡수시키고 있다.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질병도 아니었으나 심장치료 때문에 불구가 된 아이들의 수가, 심장병으로 유효한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수를 초과하고 있다.

 * 20세기 의사, 건강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

프랑스 혁명 때까지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빈곤 속에서 죽었다. “즐겁게 죽는 변호사 하나 없고, 즐겁게 사는 의사 하나 없다.”고 하는 속담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나 있다. (59)

안그래도 아침에 파리에서 인턴하는 후배랑 통화를 했는데 의사가 인기 신랑감 30위 안에도 못 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돈은 많이 못 벌고 바쁘기만 해서라고. 프랑스는 아이를 낳으면 부부가 공동육아를 하는데 남편이 일이 바쁘면 여자 혼자 애를 봐야하니 그렇다고 했다. 한국 의사도 즐겁게 살지 못하겠지만 돈은 많이 벌어서 그것으로 벌충하는데 프랑스 의사는 사정이 다르다. 의대 학비 연 45만원. 수업 교재도 나라에서 빌려준다. 돈이 안 드니까 졸업해서 본전 뽑을 일도 없는 것. 국가 공무원과 비슷한 직업이므로 직업적 소명감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피부과랑 성형외과는 의대 성적 가장 하위권이 간다니 여러모로 한국과 차이가 컸다. 

이반일리히는 또 역사적으로 건강 치료를 독점한 직업이 없었다고 말한다. " 환자나 환자를 둘러싼 환경의 물리적, 생화학적 구조에 기술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의료제도의 유일한 기능이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었다. 병원의 제거 그리고 약품의 투여는 결코 인간과 질병의 관계를 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마술이나 의식을 통한 치료는 명백히 의료가 갖는 중요한 전통적 기능이다...치료자는 신들의 승려일 수도, 입법자일수도, 이발사 겸 의사(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했음)일수도, 과학적 충고자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의사라고 부르는 말에 포괄되어 있는 뜻의 범위를 대부분 포함할 수 있는 고통의 이름은, 14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며 못 박는다. "건강 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은 20세기 말의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다."

* 검사와 진료의 순례로 변모한 인생  

이반 일리히의 의료체제 비판은 (학교가 그렇듯이) 병원이라는 제도적 장치에 의한 개개인 삶의 장악이다. 현대인의 생애주기는 병원에 의해 기획되고 구획된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인생은 검사와 진료를 통하여 출발점까지 돌아오는 순례로 변모되고 있다. 인생은 이리하여 좋든 나쁘든 제도적으로 계획되고 형태를 갖추어야만 하는 통계적인 현상, 곧 하나의 기간으로 깎아내려지고 말았다. 생존 기간은, 의사가 태아를 출산해야하는가 어떤가, 그리고 어떻게 출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출생 전의 검사로 시작되어, 의사가 인공호흡 장치를 멈추라는 지시를 차트에 기록할 때 끝난다.” (89)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버리고 신체와의 투쟁 능력을 상실하며 독립하여 늙을 기회를 상실하고심지어 죽음의 형식까지 강요한다는 것이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94) 의료가 존재하지 않는 죽음은 낭만적 고집, 특권 또는 재앙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고 있다. 환자는 자기에게 스스로 죽는 능력(그것은 건강의 마지막 표출이다)이 있다고 하는 신념을 상실하였고, 전문가에 의해 살해되는 권리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왔다 

니체도 자유죽음, 내가 선택하여 죽을 권리를 말했고 난 동의한다. 얼마전 프랑스 노부부가 안락사의 합법화를 요구하며 동반 자살한 기사도 떠올랐다. 인간세상 한번 태어나서 백년도 못 살고 죽는데 산다는 게 어째 삶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권을 빼앗긴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병원이 한 몫하고 있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유일한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 과로사회, 노동자의 건강검진은 필수  

언젠가 가정의학과 명의를 취재 갔을 때 그가 물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당뇨, 고혈압, 암 같은 성인병이 왜 많은 줄 아세요?” 나는 , 담배가 과해서요.”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과식이라고 했고 과식의 이유는 과중한 업무 부담에 따른 스트레스라고 했다. 술담배보다 과식이 더 안 좋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하고 일을 많이 해서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병원에 와서 돈을 다 갖다 주면 이게 전태일이 말한 밑지는 생명아닌가? 그 뒤로 세브란스, 서울대병원, 이대병원 같은 초대형 병원은 물론이고 거리에 꽉 들어찬 무슨 크고 작은 의원들을 보면 자본주의와 공모해서 살아가는 거대한 기계 시스템으로 보였다.

이반일리히도 '조기진단의 실시'를 꼬집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계이고 자주 수리 공장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는 신앙을 강요받는다."(107) 병을 앓지 않는 사람들은 장래의 건강을 위하여 전문적 치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산업의 확대 단계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정상이고 치료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정의되고 만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는 병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현재에 있어 임금노동은 치료적 특징을 획득한다. 평생 동안의 건강교육, 카운슬링이나 건강진단, 건강 유지는 공장이나 사무실의 일상 업무에 포함되어 있다. 시민으로서 정치적으로 성장되어간 인류는 이제 평생을 산업화 세계에 거주하는 자로서 훈련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 사회의 의료화는 그 제국주의적 성격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136)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어른들은 일하느라 고달프다. 치과나 내과 등 동네병원은 대부분 야간진료를 하고, 12시에도 치킨을 배달해주는 곳이 있고, 맥도날드와 커피전문점이 24시간 운영된다. 그렇게 과로 구조로 세팅된 사회는 구성원이 모두 다 병원의 잠재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에 영혼을 저당 잡히고 살다가 죽을 때는 병원에 저당 잡힌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구슬픈지 모른다. 학교와 군대는 자본주의 신체에 적응하는 노동자를 양성하고 병원은 노동자를 수선하고 관리하면서 유지되는 피로사회다. 우리가 초과노동을 하는 임도농자 신분의 궤도에서 벗어난다면, 즉 적게 벌어서 적게 먹고 인간다운 삶의 속도로 살아간다면 병원에 가는 일이 줄어들까.

이반일리히 책을 보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나는 고민한다. 보험공단에서 12월말까지 건강검진 하라는 문서가 와 있다. 또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자궁암 위험 바이러스가 있다면서 더 자주 해야한다고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하라는 문자가 온다. 난 지금 몸도 안 아픈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의사도 그랬다. 바이러스가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거라고. 예방이 목적인 것이다. 근데 병원가서 내진하면 스트레스 지수 올라가서 바이러스 다시 생길 것 같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진료비도 비싸지만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랑 비슷하다. 저 병원이라는 설국열차에 올라타야 하는가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