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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올드걸의 시집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 주리라.

- 파스칼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1. 나이든 소녀

 

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있다. ‘우리 엄마도 한 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 문구에 쓰인 우리 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 덧 내가 효()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 생기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의 담당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히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 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 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 예순 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단풍잎 은행잎을 주워서 식탁유리 밑에 끼워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 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들을 낙엽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려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 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나는 이십대 초반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남들은 나보고 젊은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찍 엄마가 된 소녀였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 풀어버리 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 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가나 봐요’(최승자 길이 없어) 상태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하지만 심신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력의 저하와 감각의 퇴화가 그래프처럼 항목별로 고르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니까 피부에 잔주름 없애고 명품 몸매 가꾸어 영우먼되려는 욕망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려는 욕망도 있다. 그런데 올드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우먼은 미용산업, 성형산업, 의류산업을 거쳐야 만들어지므로 매스컴에 의해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노트 하나 시집 한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 않는 법이니까. 또한 일상생활에서 엄마역할로 기능하면 딱히 드러날 기회가 없기도 하다. 나이든 여자를 마주하고 당신은 꿈이 뭐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영 어색하다. 나도 엄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명사 엄마의 사적영역은 한 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상상불가능의 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주체라고.

 

 

2. 로 지은 집

 

내 생애 첫 시집은 한국명시선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하얀 거품, 까만 포도알 같은 아이의 눈망울, 세모 지붕에 낮은 울타리가 쳐진 집으로 뛰어가는 들판의 아이들 등등 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이발소 달력그림에 쓰일 법한 사진에다가 윤동주, 이육사, 김소월 등의 국정교과서 수록 시가 어우러진 사진판 양장본 책이었다. 내가 둥그런 바가지 머리 아이였을 때 그 시집을 방바닥에 드러누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두 번째 시집은 잡지 부록으로 딸려온 세계의 명시-애송시 200으로 국내편 국외편이 섞였다. 괴테의 첫사랑, 릴케의 가을날,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등 어색한 번역에 따른 비장한 시어를 나는 아무 이물감 없이 그대로 흡수했다. 책을 읽다 보면 심오하고 난해해서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느낌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싯적 읽은 시들이 그랬다.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면서 나는 시의 풍요를 제대로 누렸다.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는 시가 봄날 개나리처럼 어디에나 흐드러졌다. 꼭 시집을 사지 않더라도 스프링 연습장 겉표지에 조병화의 남남, 서정윤의 홀로서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같은 시가 예쁜 글씨체로 꾸며져 있었다. 그 뿐인가. 대중가요도 시적 정취가 물씬했다. 산울림과 들국화와 김광석의 어떤 가사는 시보다 시적이었다. 나는 노래와 시를 구분치 않았다. 노트를 쫙 펴고 한 쪽에는 이형기의 낙화와 그 옆에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베껴 쓰곤 했다. 부피가 얇고 작아서 손에 쏙 들어가는 시집은 선물용으로도 그만이었다. 삼천 원에 그만큼 기품 있는 선물이 또 없었다. 친구들과의 갈등에서 속상함을 표현할 때나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고백할 때 등 언어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시집을 뒤적거렸다. 연애편지에도 시 한 편씩 꼭 곁들였다.

 

그렇게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마다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였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김남주와 박노해의 해방문학 시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그어주곤 했다. 비장미와 숭고미와 낭만성과 유치함이 교차하던 이십대. 온통 정서과잉의 그 시대. 일상, 연애, 투쟁 어느 곳에서도 손 길게 뻗어 나는 시에 의지했다. 시로 지은 집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얼굴이 누워있었으니 그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이 되어주었다.

 

 

3. 행복 없이 사는 훈련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 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이성복)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 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 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달아 높이곰 돋아사 1권> 이영희

 

문학에 눈 뜨는 일은 회의에 눈 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 뜨는 일은 존재에 눈 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니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딜 가나 치유와 긍정의 말들을 사나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얼굴에 들이대어 삶에 눈멀게 할 때, 시는 은은히 촛불 밝혀 삶의 누추한 자리 비추어주니까. 배신과 치욕과 절망과 설움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덮어두는 그 구질구질한 기억의 밑자리를 시는 끝내 밝힌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그래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황동규)인 것이다.

 

 

4. 시를 핑계삼다

 

삶은 천연덕스럽고 시는 몸부림친다. 시가 뒤척일수록 삶은 명료해진다. 삶이 선명해지면 시는 다시 헝클어버린다. 나는 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좋은 시를 읽으면 자동인형처럼 고개가 올라간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누르듯이 책장을 덮는다. 방안을 한 바퀴 돌고나서야 다시 시 앞에 앉아 베껴 쓴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글쓰기 충동에 시달렸다. 시가 휘저어 놓아 화르르 떠올랐다가 층층이 가라앉는 사유의 지층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 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가을 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말은 나를 떠났다. 계속 쓰고 싶었다. 궁여지책으로 사유를 자극한 시 한 편과 차오르는 말들을 나란히 블로그에 올렸다. 혹여 누가 그 섬에 닿더라도 시 한 수 나눈다면 덜 민망하리라 더 인정어리리라 생각했다. 그 후로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시를 읽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시를 핑계 삼았다.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고, 회한이 쌓이고, 시집이 늘었고, 눈물이 마르고, 아이들이 커가고, 올드걸의 시집이 자랐다.

 

 

5. 삶과 시의 합작품

 

이 책은 단순하게는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 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요란한 삶이고 빈 수레이다.

 

살면서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학위가 없고 책읽기와 글쓰기로 생활비를 벌지만 명함이 없고 시를 늘 곁에 두지만 등단이나 전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능력이 닿지 않는다 해야겠다. 이런 나의 삶의 이력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살면서 민망한 적 많았다.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지 않고 성과를 축적하지 않는 삶은 설명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웠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이 바닥났을 때, 시가 내게로 왔다.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하는 시’(황현산) 그 포기하지 않음에 기대어 존재증명을 시도했다. 동시에, 익숙한 나로부터 떠나는 연습을 일삼았다. 지금 나는 손에 쥔 것은 없으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더 많아졌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연하게는 삶과 시의 합작품이다.

 

이것을 왜 책으로까지 묶어야하는지 고민이 길었다. 블로그와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한 올드걸의 시집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 ‘시집을 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냈다. 시의 사적소유가 아닌 시의 공적순환을 위해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편의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고 나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남을 들여놓는 행위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 그것을 시에 곁들여진 수다가 조금이라도 도우면 좋겠다.

 

2011년 가을부터 연구실에서 세미나 말들의 풍경을 진행하며 열 명 남짓한 벗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시를 읽었다. 시의 이해도와 삶의 만족도가 동시에 상승했다. 말을 들어주고 말을 만들어가는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했고 존재의 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생을 귀히 여기도록 영감과 자극을 준 눈물겨운 인연들이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타인의 지분과 체온이 깃들어있음을 말하고 싶다.

 

 

2012. 다시 가을

은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