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극장옆소극장

노순택 - 망각기계

올초에 별꼴카페에서 개최했던 사진전 <사람을 보라> 끝나는 날. 한금선, 노순택 작가님이 와서 사진  떼는 일을 했다.

연구실 안쪽에서 회의하고 있어서 처음에 두 분이 온 줄도 몰랐었는데, 나와보니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계의 기둥들;;께서 이렇게 허드렛일을 직접 하시느냐고. 겉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내심은 존경모드였다. 이름난 작가가 작품만 '민중속으로'이고 일상은 민중밖으로인 경우도 많다. 사진 등 도제식으로 이뤄지는 업계에서는 일상의 착취가 만연하다. 그러지 않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더군다나 다큐멘터리사진은 현실에 발딛은 곳, 낮은 세상을 기록하는 것이기에 낮은 자세가 더욱 요청되는 분야가 아닌가. 작품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 노순택 작가를 지난 토요일 쌍차희망걷기대회에서 마주쳤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작업중이었는데 주민들과 상경한 모양이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다가 광주 관련 사진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사진전을 찾았다. 걷기대회의 여파로 욱신거리는 두 다리를 끌고 경복궁 왼편 담길따라 올라갔다. 민속박물관 매표소 건너편 '학고재' 갤러리. 날렵한 처마 위로 드러난 시원한 하늘, 초여름 신록과 바람이 만들어낸 그늘에 앉아 진미샘을 기다렸다. 진미샘이랑 시네마메이트인데 글쓰기수업하는 동안 영화를 한 편도 못 봤고 밀린 수다도 산더미다. 그날 일정이 맞아서 같이 보기로했다. 한 사람을 기다리며, 사진전을 기다리며 광주를 생각했다. 나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 엄마의 고향이면서 내 절친들의 고향이면서 민주화의 고향. 생각하면 마냥 좋고 문득 아픈 곳. 광주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았을까는 중요치 않다. 예술은 재현이 아니다. 해석이다. 노순택 작가는 광주를 통해서 어떤 의미와 물음을 만들었을까.    

 

 

제목이 망각기계. 망월동이다. 구묘역이다. 예상치 못한 일. 입구에 비치된 전시안내문을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다. 한 아저씨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거 좀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신묘역을 저렇게 삐까번쩍 다듬어 놨으니, 여기는 또 이렇게 방치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남자는 새묘역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했다. 거기 가니 마음이 편치 않아 옛묘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했다. 여기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한데, 그와 동시에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더 소중한 '성지'라고, 518정신은 바로 이곳 묘역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을 이렇게 폐허처럼 방치할 수있느냐는 게 그가 품은 의문이었다.

 

그게 언제인지. 십년도 전이다. 광주에 놀러갔다가 친구 안내로 신묘역에 가보고는 다시는 망월동에 가지 않았다. 저건 518을, 망자를 기억하려고 만든 기념관이 아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지문 자국하나 없는 액자들, 죽음과 눈물과 한숨과 회한이 섞이지 않은 저것들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기억한단 말인가. 기억하면서 은폐하는 방식으로 고통담론을 소비하는 기념관의 기만에 몹시도 불쾌했다. 나의 광주는 허름하고 처절하다. 입구에서부터 구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흙길 돌아 무덤에 가면 친구가 남긴 편지가 써있고 소줏잔이 외로이 떨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체가 나뒹굴고 총성이 들리는 것 처럼 피를 끓게 했던 구묘역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유치하게도 이십대의 나는 구묘역에서 산자로서 소임을 맹세하곤 했다. 그렇게 신묘역을 핑계로 발길을 끊었던 구묘역을 다시 마주했다. 기억하면서 외면했던 그곳이 노순택의 사진으로 나타났다.

 

잔인했던 군사독재도 이젠 끝나고 5월의 영령들도 이제는 명예를 회복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광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관홧발로 짓이겨진 대추리의 절규는, 살인자 대통령을 기념하겠다는 일해공원의 몰염치는, 외로운 섬 강정의 피눈물은, 흘러간 옛일이 아니다. 우리는 나랏돈으로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동시에 기념하는 부조리의 시간에 서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죽은 자의 편에서도 죽인 자의 편에서도 흘러나온다. 망각의 성립은 언제나 공조에서 비롯된다.

 

노순택은 글을 잘 쓴다. 사진처럼 글도 명료하다. 오랜 사유에서 우러났기에 그럴 것이다. 글쓰기 수업할 때 좋은 작품의 세 가지 조건. 인식적 가치, 감성적 가치, 미학적 가치를 꼽는다. 좋은 글은 최소한 한 가지라도 충족시켜야한다고 말한다. 노순택의 사진은 세 가지를 충촉한다.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보고 있으면 흔들린다. 보고 있으면 매혹된다. 미학적 가치는 단연 독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사진전 관련 기사가 '월간 사진'이 아니라 '월간 미술'에 등재된 것은 수긍할만 하다.) 군더더기가 제거된 격정의 이미지. 왜곡과 망각과 시간으로 뒤틀린 얼굴들.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 같은 사진들은 낯설고 처연하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518에 대해 남다른 고통을 느끼는 사진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그곳 다 쓰러져가는 구묘역을 찾아가는 한 사람이 있음에, 왜 타인의 고통은 쉬이 망각되는가를 묻는 한 사람이 존재함에, 나는 감사했다.

 

   

  

 

* 노순택사진전 6월 24일까지. 학고재갤러리 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