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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상처의 철학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무감각성, 무갈등성

한나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부제와 달리 내용은 재판에 관한 취재기사에 가깝다. 조금 지루하게 장대하게 묘사되며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한다. 악과 평범함을 조합시킨 이 강렬한 표현은 당시 큰 파장과 논쟁을 일으켰다. 요점은 이렇다. 한나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치전범 아이히만은 사악함이 전신에 흐르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평범성banality은 진부하고 익숙하여 일상화되었다는 시간적 혹은 강도성의 의미가 아니라,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악의 편재성을 뜻한다. 

'악의 평범성'은 고병권이 쓴 <생각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사유하지 않음의 풍조와 그로 인한 폐단을 언급할 때 여기저기 꽤 자주 인용된다. 심보선 시인도 영화 <화차> 리뷰에서 인용했더라. 김민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깊은 성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자기와 같이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악이란 망각의 선택이고, 그 망각의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일 것이라는 얘기로 마무리했다. 좋은 글이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무감각성보다 '무갈등성'에 가깝다. 악의 평범성은, 자기의 도덕적 감각과 살해행위라는 반도덕적 행위 사이에서 아무런 마음의 갈등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두 사실을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르게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도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무사하고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악의 평범함은 무감각성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심리적 무갈등성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탈개인화와 언어문제다. 아렌트에게 도덕은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치전범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탈개인화한다. 그들은 자기를 '기계'로 바꾸고자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개인성이라는 일말의 요소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마지막에는 무개인이 아니라 비개인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어떤 개인을 전제로 하는 도덕적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제 오늘 보니 이정희도 자신을 탈개인화하더라. 정당조직정치의 한계겠지만)

또한 그들은 암호화된 특수언어와 일상언어를 구별해 사용했다
. 그들에게 언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감정이나 생각이 임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검열을 했다. 그들은 암호언어와 더불어 유대인 문제를 일상영역과 무관한 특별한 영역으로 대할 수 있었고 감정의 흔들림으로부터 임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가령 유대인학살의 암호명은 최종해결책이었다. 이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는 인간 자신이다. 삶을 살고 그것을 언어로 직조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삶을 지시한다. 우리는 말로 이뤄져있다.

# 도덕과 합리성의 문제 

아렌트의 칸트 비판지점. 칸트에 따르면 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은 그 행동원칙이 보편법칙을 따를 때 실현된다. 하지만 이 도덕적 절대명제는 아이히만에게서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파괴된다. 아이히만은 주장한다. 나는 보편법칙(국가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 사실은 말해준다. 보편법칙의 합법성만으로는 도덕성이 구현될 수 없음을보편법칙이 절대명제가 될 때 개인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는 칸트의 도덕적 주체를 수정하고 소크라테스 이론을 따른다. 아렌트에게 도덕적 감각은 양심 같은 사적감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서적 도덕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것. 자기안에 들려오는 내적 정언명령을 따르는 도덕적 주체라는 얘기다. 이 주장은 아렌트 도덕철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개인의 도덕적 감각이 돌파구가될 때 아우슈비츠같은 역사적인 악은 양심 투철한 영웅의 출현으로 뚫어야하는  문제가 된다.

김진영 선생님은 도덕은 합리성과 무관하다. 합리적 도덕성은 보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했다. 도덕의 극점에는 연민이 있다고. (이때 연민은 니체가 비판하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고귀한 감성이다) 그 예로 니체의 토리노의 말을 든다. 니체는 말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뛰어들어 눈물을 흘린 뒤로 광기에 빠진다. 이전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렇게 10년을 앓다가 죽는다. 우리가 연민을 느낄 때 그것이 단순한 정서일까. 어떤 대상을 보고 슬픔을 느낄 때는 이미 사유가 작동한다. 독일은 철학의 나라다. 독일민족은 합리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민이 없어서 아우슈비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 보아도 합리적인 사람이 연민적인 사람보다 더 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니체가 그토록 독일민족, 독일적인 것을 비방하고 비판한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내가 니체에게 끌리는 이유도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