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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여의도에서 잠실로 가기 위해 좌석버스 30번을 탔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는 <한겨레> 신문을 폈다. 오후 2시의 햇살이 고흐의 노란 빛깔로 가닥가닥 쏟아져 들어왔다. 강물이 반짝이고 활자가 흔들렸다. 몸이 노곤노곤 해진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세한 기척에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문이 손에서 떨궈져 담요처럼 무릎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신문과 다리의 틈에서 무언가가 뱀처럼 스윽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신문을 들추자 옆 사람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각 잡힌 감색 양복의 뒤통수를 보고서야 옆자리에 남자가 앉아있었음을, 내 생살 위로 미끄러지던 뱀은 그자의 손이었음을 알아챘다. 순간, 목덜미를 잡아채고 손모가지를 비틀기는커녕 나는 뇌부터 발끝까지 굳어갔다. 혀도 뻣뻣하고 심장만 날뛰었다. 성추행 대책 매뉴얼에 나오는 ‘침착한 대응방법’은 무능한 말이었다. 능동적으로 살던 육체가 갑자기 수동적인 상황에 놓이니 뇌회로 체계에 교란이 일어났다. 그땐 그랬다. 분명히 겨울. 심야. 막차. 만취. 이런 스산한 상황이 아니다. 봄날, 햇살, 신문, 버스. 이런 화창한 조합에서도 수컷은 코를 킁킁. 미처 몰랐다. 치욕의 마른 침만 삼키던 스물셋 어느 토요일.

고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는 담임을 뵙고는 선생님 잘 만나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수업시간에 들어오는 교과 선생님들 마다 좋은 담임 만난 너희 반은 복도 많다고 입을 모았다. 아이들도 담임을 따랐다. 부처 같은 인상에 목사 같은 언변에 도올 같은 박식함과 부성이 흐르는 엄격한 목소리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압도했다. 졸업 후. 그가 제자들을 상습적 성폭행으로 퇴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스승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의 악행보다 더 충격적인 점은 교장이 그를 끝까지 감싸고 교사직위를 지켜주려 했다는 사실이다. 나름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고의 수장답게 덕망 높은 교장으로 칭송받던 분이다. 3차 쇼크가 계속됐다. 이런 성폭행사건은 여학교에서 비일비재하고 그래서 벌집 쑤시는 일이 되어 여론화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자명한 사태를 나는 마치 유럽의 작가주의 영화를 볼 때처럼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황지우 시구대로 ‘민주, 자유평화, 숨결 더운 사랑 같은…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초조한 삶’은 정작 젠더의식에서 가장 늦되고 무뎠다. ‘음모 한 터럭에 세상의 음모가 숨겨져 있’음에 눈떠가던 서른 즈음.

아빠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쉽게 공모자로 합쳐졌어요.
얼마나 마음이 잘 맞는지 약속 없이도 지우개로 쓱싹쓱싹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지울 줄 알았어요.

- <젖소 아줌마가 작아지는 비밀> 부분


당산역 고가 아래서 하얀 분가루 바르고 담배 피는 여자아이들. 멀리서 보면 인형 같다. 뻐끔뻐끔 연기 나는 인형. 다른 스위치를 누르면 저 입에서 멜로디가 나올 것 같다. 예쁘다. 평일 낮인데 학교는 안 다니는가. 꼰대처럼 걱정한다. 예전에는 거리의 아이들을 보면 나 혼자서 생활기록부 작성했다. 아빠가 알콜중독이고 엄마는 가출했거나 식당에서 일하고. 밤이면 칼로 살 베는 전쟁이 일어난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이는 미치거나 뛰쳐나오거나…언제부턴가 시나리오가 하나가 더 늘었다. 아빠나 오빠에게 시달리는 꼬마 소녀들. 자기 욕망을 알기도 전에 타자의 욕망의 도구화된 육체로 긴 밤을 지나야하고 그 몸뚱이 추슬러 긴 생을 살아야한다. 늘 가상을 초과하는 현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들려준 얘기. 어느 여성이 여름에도 긴 팔과 목까지 오는 옷을 입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때리고 가두고 담뱃불로 지지면서 성폭행 하여 온몸에 흉터가 남아 그렇단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고통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그녀가 생각났다며 토막 난 글을 써왔고 그나마도 목이 메어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요즘 사람들과 같이 글을 쓰고 또 시를 읽다보니 생의 내밀한 부분을 보게 된다. 시적 언어를 통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잠재적인 것들. 찬찬히 유보 없이 응시한다. 거대한 카오스에 직면한 기분이다. ‘진실의 사막에온 것을 환영하네’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를 박차고 나온 네오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말인데, 나야말로 모래알 같은 진실에 발이 뜨거워 죽겠다. 그간 너무 쉽게 '고통의 자산화'와 '운명애'를 말한 건 아닐까. 고통에 대한 분석적 언어는 때로 현실의 구체적 고통을 소거시킨다. 이데올로기 이전의 삶은 이리도 난폭하고 섬뜩하다. 그러니 여자로 태어나서 미친년으로 진화한다는 말은 여자의 연대기에 관한 핵심적 진술이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읽다가 밑줄 그었던 부분. ‘미친년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 만든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급공감 후 급질문. 그 길고 오랜 세월 동안 미친놈들의 존재는 어떻게 생략이 가능했을까. 미혼모는 있고 미혼부는 없다. ‘화살표처럼 질주해나가는 앙상한 들개들’이 으르렁 거리는 세상은 어째서 여전한가. 느닷없는 물음에 붙들린 이천십이년 이월이십구일.

늦된 엄마는 오늘도 딸을 낳고 앳된 딸은 매일매일 학교에 간다. ‘월경 직전의 유방통처럼 피와 나만이 알채는 떨림으로’ 발밑이 불안한 딸의 선택은 두 가지다. ‘이 공포를 휴식 없이 응시’하면서 폴짝 폴짝 평생 뛰거나. 아니면 아예 초현실주의 그림같은 나무로 살거나. ‘몸에서는 사랑스런 난자 대신 눈알들이 자라나’는 ‘한 그루의 거대한 눈알나무’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
댄다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
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 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
가지 꽉 물어 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세 살
먹은 내가 빨아줘 빨아주라 제 자지를 꺼내 흔드는 복순
이 할아버지한테 침 퉤 뱉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여섯 살 먹은 내가 본드 빨고 토악질해대는 친구의 뜨
끈뜨끈한 녹색 위액 교복 치마로 닦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아홉 살 먹은 내가 국어선생님이 두 주먹에 날
려버린 금 씌운 어금니 두 대 찾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
었는데 스물두 살 먹은 내가 두 번째 애 떼러 간 동생 대신
산부인과에서 다리 벌리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네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그 애인의 애인
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
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
는데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돌고 돌
수록 썰면 썰수록 풍성해지는 양배추처럼 도마 위로 넘쳐
나는 쭈글쭈글한 내 그림자들이 겹겹이 엉킨 발로 폴 짝
폴 짝 줄 넘어가며 입 속의 혀 쭉쭉 뽑아 길고 더 길게 줄
을 잇대나간다

- <나는야 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