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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답안지

니체와 장정일 사이에서, 보다 먼 이웃사랑


목요일은 니체의 날. 토요일은 시의 날. 금요일은 괄호의 날. 육신을 가로로 뉘이고 이 괄호 끝에서 저 괄호 끝으로 빈둥거리면 하루가 저문다. 그러는 사이 니체는 나고 시는 들고 그런다. 오늘은 장소를 바꿨다. 영하9도의 바람을 가르며 도심 이끝에서 저끝으로 배회했다. 교보문고에 가서는 시집 코너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어떤 시집 제목이 눈에 달겨들었다. 이름하여 <아니리> 이제 저런 장단에 감전되는 걸 보니 국악프로 좋아하던 엄마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싶어 야릇. 그래도 입에 감기는 어감과 가슴을 떠미는 듯한 회오의 정서가 좋아서 아니리, 아니리, 세번 말하여 아니리. 하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영화 보기 전 예상치도 않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햄버거를 먹게됐는데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으려고 그랬나 보다. 일년에 햄버거 먹는 경우가 한 두번인데. 장정일 '찌찌뽕~'

"쏟아지는 햇살 가운데 하얀 십자가 하나
롯이 세워질 때 나는 생각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벽돌이 아무리 높아진들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이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과 근접한 구절.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좋구나. 니체를 읽어도 반니체적인 인간이 있듯이 니체를 읽지 않고도 니체를 사는 이들은 많다. 니체를 통과한 신체가 햄버거를 섭취하고 나니 장정일 시의 맛이 또 다르다. 맛있게도 냠냠. 

 -이상-의욕하지 않기, -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 이들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어제 수업에서 논의가 됐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생명은 힘에의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창조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닌 것. 무기력증이 얼마나 '크나큰 피로'인가를 얘기하는 대목이다. 그런 얘길 하는데 '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말. 평소에 행복해야지~ 나는 잘 살거야! 다짐을 일삼고 그리 살아보려다가 등골 휘었기에, 니체가 "너무 의욕부리지 말아라"는 뜻인줄 알았다고. 크게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고 했다.

창조적 오독이지만 분명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행복하라'는 지상명령에 심신을 혹사시키곤 하니까. 행복에 대한 강박만 있지 어떤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만의 욕망과 능력을 알고 나만의 행복을 만들어가지 못한다. 스펙 쌓고 배낭여행 가고 어학실력 쌓고 명품백 사고...행복이라고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하는 행위를 따르고, 외부인증에 의한 삶을 살다보면 정말 크나큰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노예적 의욕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없고 '자격증'만 남고 허탈하다. 이같은 반동적 허무주의에 휩싸여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것이 헛되다"며 삶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얘기를 니체는 하는 거다.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빗댄 구절.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이웃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의 표출이라는 것.  나를 가꾸기보다 이웃을 돕는 일이 더 표나고 쉬우니까 그리하는데 그 '타인지향적 헌신'의 정체는 알고보면 자기로부터의 도피 아니냐 니체가 묻는다. 이 구절도 오해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초롱샘은 '이웃사랑이 왜 나쁜가' 물었다. 니체가 옆집에 떡돌리지 말고 등돌리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고, 조카 수학도 가르쳐야 한다. 다만 자기자장에만 맴돌기보다 조금씩 시야와 관심을 넓혀가면서 망원렌즈로 세상을 보자는 것. 수학 잘하는 이모를 두지 못한 아이들도 공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궁리해보자는 거라고 설명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 교육문제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생님들.이런 활동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대형로펌에서 기업인수합병에 관한 일을 하던 변호사가 참여연대 간사로 들어간 것도 자기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는 예를 들어주었다. 초롱샘이 물었다. "그분이 나갔다고 로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다. 맑스가 자본론 써도 자본주의 건재하고, 안티조선 운동해도 조선일보 영향력 1위는 변함없고, 김진숙 고공농성승리해도 비정규문제는 남고, 한비야가 몇 십년 구호천사로 활약해도 빈곤아동은 여전하다. 그나마 그 미련한 사람들이 버둥거렸기에 99%는 저항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거다.

우리 수업에서 아아님이 돌쟁이 애기 데리고 수업을 받는다. 강의신청 전에 묻길래 "된다. 해보자"고 했다. 니체수업이니까, 니체식으로 창조적인 우리만의 수업방식을 만들자고 했다. 공부는 원래 하고 싶은 사람들이 '길'에서 모여서 했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게 민주주의 학습이고 우연을 필연으로 삼는 법이니 다른 학인들에게도 좋겠지. 물론 수업시간에 아이가 떼써서 산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아님으로 인해 다른 아기엄마, 예비주부 학인들에게 공부의 물꼬를 터준 셈이 되니까, 그 또한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는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알고보면 소박한 남자;인데 잘난척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온갖 허무적 인간유형, 천민근성 쩌는 사람들, 니체의 페르소나로 나는 읽힌다. 그 충동들, 거친 열정들을 크나큰 덕으로 가꾸어 멋진 책으로 엮어냈으니 그 질긴 엉덩이의 힘이 부러울 뿐이다. 

학인들이 써온 과제 읽으면서 세상 살아가는 다양한 얘기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애정행위의 근간이 된다. 고3담임 학인이 쓴 어느 학생이야기. 소위 노는 아이이고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집안형편이 어려운데도 1학기에 야자를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생 오빠 학비 마련 등을 이유로 2학기부터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는 안 하면서도 '등교'와 '야자'에 충실한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뭘까, 왜일까. 한준샘의 해석으로 우린 그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외롭고, 가족들 다 일하는데 나만 놀고 있으면 미안한데 일하기도 싫고, 그래도 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해도 친구는 있잖아요. 나 같아도 야자 할 거 같아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으면서 니체바깥에도 눈 돌리라는 것. 장정일 버전으로 이거다.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