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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의 최전선, 만남의 최전선


글쓰기 수업을 두 번 마쳤다. 그 사이 시아버님이 일과성뇌허혈로 쓰러졌다가 열흘 만에 퇴원했다. 뇌경색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마비는 없다. 가슴이 철렁했다. 존재를 고민했다. 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병원 몇 번 드나드는 것쯤이야. 헌데 그냥 서글펐다. 나는 기차시간표처럼은 살 수 없는 인생인 거 같아서다. 예외상태가 정상상태인 그런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잔잔하다가 휩쓸리다가 가라앉다가 떠내려간다. 바다가 집이다 

글쓰기 수업은 재밌다. 사람 만나는 일은 비슷한가 보다집단 인터뷰하는 느낌이다. 귀 쫑긋. 토끼처럼 듣고 참새처럼 떠들고 애인처럼 교감한다. 에너지가 엄청 쓰인다. 일 하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나면 봉인이 풀리는 듯 피로가 확 몰려오는 증상까지 인터뷰랑 똑같다   

첫 시간엔 인사를 나눴다. 나를 포함한 26명이 글쓰기깃발 아래 모였다. 고등학생, 대학생, 휴학생, 취업준비생, 회사원, 교사, 당직자, 활동가, 백수, 육아휴직자, 예비작가 등 다양한 세상살이꾼들. 왜 글을 잘 쓰고 싶고 어떤 글을 쓰려는 건지 터놓았다. 크게 두 부류다. 생활글과 창작글. 앞의 경우는 블로그, 졸업논문, 영화감상, 성명서 작성, 회사공문 등 일상에서 글쓰기 필요성을 느낀 부류이다. 나머지는 여행작가, 동화작가, SF소설가 등을 꿈꿨다. 자기소개로 두어 시간을 보냈다. 하나같이 달변이다. 글빨은 난감하고 말빨은 되나보다. 코미디영화처럼 5분 단위로 관객을 웃겼다.

가수 이소라 씨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내 노래를 들을 땐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수학의 재미를 알려주는 책 한권 쓰고 싶어요.” “잘 살기 위해서 글 쓰고 싶어요. 잘 사는 게 뭔지 모르지만 나의 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삶이 똑같은 패턴 똑같은 사람이라 여행을 가도 새로움이 없어요. 재미없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가슴을 때리는 글 쓰고 싶어요.” “솔직해지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어요.” “휘발되어버리는 감정들 정리하고 싶어요.”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워요. 머릿속이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어떤 사람들일까 구경해보자는 맘으로 왔어요.” “연애랑 비슷해요. 여자 친구 만나기 전엔 계획을 세우지만 그대로 안 되는데 글쓰기도 그런 것 같아요.” 

삶의 풍요를 꿈꾸는 자들. 그들에게 노동자이면서 작가로 법률가로 운동가로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았던 <전태일 평전>을 읽고 글을 써오라 했다. 책 리뷰가 아니다. 전태일이 사유의 절정기를 맞던 나이 스무 살 때 내게 일어난 사건, 즉 삶의 최전선에서 세상과 부딪혔던 한 순간을 구체적으로 쉽게 줄거리 위주로쓰기다. 이는 '글과 삶의 거리'를 좁히려는 목적이다. 내 말은 없고 남의 말로 잰 체하는 글을 쓰면 글과 삶이 따로 논다. 꼭 자기 경험에서 출발할 것을 당부했다. 글쓰기란 자기 삶의 텃밭에서 자기 언어를 길러내는 일임을 <전태일 평전>만큼 잘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첫 수업 후, 솔직하고 정성스런 후기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저항하는 글쓰기'라는 한솔씨의 결의가 좋았고 정민씨의 고백이 감격스럽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토록 벅찼던 것은 내가 작가가 되기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 보다도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벌써 전달이 된 걸까. 함께-있음의 자각은 글쓰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내가 나누고싶어 욕심낸 그것이다.   

2
차시. <전태일 평전>을 중심으로 글쓰기 기법을 배웠다. 글쓰기의 동력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전태일 평전> 나의 밑줄을 발표했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솔이씨가 낭독했다. 나도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랐다 얼마나 시적인가! 직장인 귀선씨는 조영래변호사의 글을 꼽았다. 기성세대의 비굴한 처세철학을 비판하는 부분이 현재 본인이 직장에서 겪는 고민과 일치한다며 격하게 공감했다. 길지만 인용해 보면,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 오더니사람이 다 되어서 왔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어떤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숨 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깨달아 겸손(?)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달걀로 바윗덩어리를 치는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자각 있는(?)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노예의 처세술이다. 예속된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 노예는 자신의 영리함 때문에 평생을 노예로 산다고 니체가 비판했는데, 저런 사람들 회사에 참 많다. 가장 처량한 인간상이다. 출세해도 노예는 노예니까, 부유해도 노예는 노예니까 그렇다.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네 시, 전태일과 조영래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실험알라딘에서 <전태일 평전> 리뷰 다섯 편 뽑았다. 어떤 글이 잘 읽히는가 물었다. 두 가지로 좁혀졌다. 친구의 경험을 예로 든 글과전태일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고유한 해석이 담긴 글이다. 전태일과 외로움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나머지 세 편의 예시글은 전태일은 어두운 노동현실을 밝힌 시대의 횃불이었다는 일반론을 재탕했다. “아마 <전태일 평전> 읽고 글 써오라고 했으면 우리중에도 이런 글을 여러 개 나왔을 걸요.” 다들 웃는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아무 감흥이 없음을 다 같이 확인했다. 무난한 것은 무능력한 것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전개할까. 그것이 다음 주 수업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