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영화로 <만추>를 보았다. 극장 밖을 나오며 휘청했다. 눈부신 햇살이 부담스러웠다. 헤어진 다음 날처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말 그대로 심란하여 고정희 시집을 폈는데 <만추>라는 시가 있었다. 거짓말 같은 우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1991년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이번 <만추>는 네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고정희 시인이 영화 <만추>를 보고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시집을 나는 지난 20년 수십 번 보았을 터인데 <만추>라는 시가 이제야 보이다니. 이 극적인 상봉을 위해 침묵했던 것일까.
7년 째 수감 중인 애나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 휴가를 받는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 행 버스에서 훈이를 만난다. 돈 받고 애인노릇 하는 남창과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 두 사람의 하루를 영화에 담았다. 배경은 시애틀, 애나는 탕웨이, 훈이는 현빈이다. 잿빛 안개 낀 도시에 외로운 학처럼 걸어 다니는 두 사람. 탕웨이와 현빈의 눈빛과 시애틀의 안개가 분리되지 않는다. 감독이 일부러 시애틀을 정했단다. 시애틀의 특산물 안개.
이 영화는 아름다운 사랑영화다. 근데 초월적이고 영원한 사랑이 아닌 옆에 있어주는 것, 말이 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옆에 있어주는 것. 말이 통하는 것. 사실 지나치게 소소하고 일상적인 요구이다. 하지만 항시적으로 충족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늘 내 옆에 머물고 무엇을 얘기해도 다 수용하는 신적존재. 그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해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큰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극중에 현빈이 그렇다. 육체와 영혼 두루 탁월한 소통능력을 발휘해 여심을 녹이는 우월한 남창이다. 극중 옥자라는 중년여성은 현빈을 사랑한다. 지갑에 돈은 두둑한데 마음 나눌 상대가 없다. 현빈에게 집착한다. 레스토랑 차려줄 테니 나랑 도망가자 한다. 옥자가 갈망한 것은 ‘말이 통하고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에 옥자의 남편이 현빈을 찾아와 묻는다. 내 아내가 사랑한 남자가 누군지 보고 싶었다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준 거냐고. 현빈은 답한다. “나는 얘기만 나누었다”고.
보통 남자는 옆에 있되, 말을 하되 남근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게 하는 사랑의 기술을 모른다. 영화에서처럼 우연히 여자를 만나면 어떨지. 호구조사에 들어가서 왜 무슨 일이냐, 다 말해보아라, 내가 위로해 줄게 등등 판단하고 계몽할 것이다. 여자를 보호하라! 연약한 그녀를 대상화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현빈은 자기를 내세우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옆에서 안개처럼 머물러 있으면서 촉촉이 마음을 적셔간다. 세심히 마음의 결을 살피고 행동한다. 그래서 탕웨이로 하여금 마음을 털어놓게 하고 심지어 웃게 만든다.
현빈과 대조적 인물로 탕웨이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친오빠의 친구가 나온다. 살인죄를 저지르게 했던 장본인 남자다. (그런 남자의 부인은 적당히 여성스럽고 평면적인 표정을 지녔다) 식당에서 현빈과 작은 결투소동이 벌어지는데 그 남자가 현빈에게 을러댄다. “니가 애나에 대해서 뭘 알아! 쟤는 아픔이 많은 애야!” 뭐 대충 이런 논조이다. 완전 바보다. 우스꽝스럽다. 수십년을 보아왔어도 탕웨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정작 그이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알겠지만 그것은 사실로서 가치가 하나도 없는 일들이다.
현빈은 만난 지 하루 됐어도 탕웨이와 진실을 공유하고 깊게 공감한다. 그녀의 엄마를 조문하면서 아픔을 매만져주고 마음에 응어리를 풀어준다. 심지어 그놈에게 사과까지 받아준다. 두 사람이 보낸 하루에서 평생과 맞먹는 무한의 시간이 생성된다. 더군다나 현빈은 한국남자. 탕웨이는 중국여자. 둘은 간단한 생활영어로 대화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말귀를 알아차리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고급한 언어,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야단스러운 정사신 없이 오롯한 키스만으로도 에로티시즘의 절정을 표현한다. 탕웨이의 깊은 눈빛과 자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영화는 삼류 리메이크작에 그쳤을 것이다.
탕웨이가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갔았을 때, 오랜만에 만난 형제자매는 상속문제로 서류부터 들이민다. 감옥 바깥세상과 엄마의 죽음에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한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부모가 자식을 가장 모르고,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가 서로에 무심하고. 한 세월 동고동락한 형제는 이해관계로 셈하고, 남자를 사랑할 때도 여자는 외롭다. 가족주의 하에서 여자가 겪는 일상적인 소통단절의 구조, 천형적인 외로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영화가 있을까. 그래서 시애틀의 안개는, <무진기행> 김승옥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불처럼 타오르는 사랑보다 안개처럼 스미는 사랑이 더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