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청각장애인야구단 영화다, 라고 할 때 자동으로 연상되는 감동코드가 있다. <글러브>는 그것을 배반하지 않고 정확히 그려낸다. 재밌고 뭉클하다. 두 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고 눈물 한 사발 뽑아낸다. 대사발 유려하고 배우들 연기 탄탄하다. 남자주인공 정재영은 진짜 야구 선수 같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야구선수다.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허전하다. 교과서적인 메시지로 꽉 차있어 울림을 주는 여백이 부족하다. 장르적인 전형성을 비켜가지 못해 안타깝다. 어쨌거나 똑 떨어지는 영화란 점에서 이야기꾼 강우석 감독의 우월한 능력은 맞는데, 삶의 이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가 ‘장인’은 아닌 거다.
예전에 장애인 단체 간행물을 2년 간 맡았었다. 장애인스포츠 동호회 취재를 거의 매달 다녔고, 서울시내 장애인 학교도 거의 다 가볼 수 있었다. 놀라운 그사세를 경험했다. 시각장애인 아이들이 소리 나는 공으로 축구도 하고, 지체장애인 아이들이 농구도 하고 자폐아이가 수영도 했다. 장애인이 스포츠를 통해서 얻는 목적은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크게는 진로탐색에서 일상적으로는 삶의 활력증진과 커뮤니티 형성이다. 직업적 선수를 꿈꾸거나 조기축구회처럼 운동하러 나와서 땀도 흘리고 사람도 만난다.
장애인 운동부아이들은 좀 더 절실하다. 강원래 씨 말마따나 장애인아이들 꿈의 80%가 사회복지사다. 그들 밖에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예외적으로 조금 운동에 소질이 있고 가능성이 보이면 필사적으로 운동을 한다. 비유가 아니라 엄마가 그야말로 아이의 손발이 되어서 운동을 가르친다. 아주 극소수가 장애인올림픽 출전권을 얻고 매달을 따면 먹고 사는 일은 조금이라도 해결되니까, 좁은 문 앞을 아이와 엄마가 서성이는 것이다. 한번은 장애인학교 운동부를 취재에서 만난 한 학부형이 명함을 보고 전화해서는 (힘도 없는 나에게) 한참을 하소연한 적이 있다. 장애인 체육의 현실은 열악하고 암담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빡세게 운동해봤자, 열아홉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면 아이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운동을 이어갈 수가 당연히 없다. 좋은 지도자 만나도 그가 살길 찾아 떠나면 원점이다. 장애인이 길을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장애인 고용환경은 또 얼마나 열악한가. 그러니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뛸 수 있는 장애인 실업팀이라고 있겠는가. 그래서 <글러브>의 휴머니즘이 불편하다. 글러브 glove에서 g만 빼면 love라며 ‘야구에는 사랑이 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내가 볼때 이 영화에는 값싼 ‘연민’은 있어도 ‘사랑’은 없다.
어느 날 프로야구 MVP 출신 정재영(김상남)이 건달처럼 나타나서 흑기사로 변신한다. 아이들에게 구원자가 되어 ‘불쌍하게 보이면 지는 거다’라는 논리를 설파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장애인야구부 아이들에게 적자생존의 냉혹한 스포츠의 세계를 일러준다. 비장애인 척도(군상상고)에 맞서기 위해 아이들에게 지옥훈련을 단행하고 불굴의 의지를 심어준다. 1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나름의 성공체험을 시켜주고 마지막엔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엔딩 크레딧 뒤로 시골학교 운동장에 덩그마니 남겨질 아이들이 눈에 밟히는 건 지나친 오지랖인가.
눈물 닦고 생각해 보니 <글러브>는 70년대 새마을 운동처럼 ‘하면 된다’는 논리,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인간승리를 담아내고 있다. 굳이 ‘청각장애인 야구부’는 왜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에서 ‘장애코드’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일반 야구부를 소재로 한다면 무슨 극적인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감동과 눈물을 소비하는 게 미안하다. 손가락 네 개 있는 장애인이 모두가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아’가 될 수 없지만 희아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곡된 환상을 품는다. 장애가 있어도 자기가 노력해서 하면 된다와 같은 생각을 쉽게 한다. 감동의 눈물 속에서 정작 중요한 장애인 삶의 문제들이 묻히는데 <글러브>도 거기에 일조하는 영화다.
왜 꼭 장애를 극복해야할 무엇으로 보는지,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아질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인 채로 행복하면 안 되는지... 장애인에 관한 근본 물음을 <글러브>는 던져주지 않는다. 주마간산 식으로 훑으며 눈 가리고 귀 막는다. 40만 명이 <정의란 무엇인가> 책 한권 읽어버리고 ‘정의’를 마스터하는 것처럼 <글러브> 영화 한 편 통해 ‘장애인’의 삶을 소비하고 경쟁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좋음일까. GLOVE에는 사랑이 있지만 청각장애인 영화에는 장애인의 삶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