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심리학자가 아닐까. 니체의 저서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파헤치고 짚어내고 들춰내는 거침없음에 놀라고, 강자부터 약자까지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상에 ‘맞아’ ‘아, 그랬지’ 맞장구를 치게 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고귀한 인간에게는 ‘고독’과 ‘독립’이라는 필연적 수사가 붙는다. 고독을 모르는 인간, 독립이 안 된 인간을 ‘평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악의 저편 2장 ‘자유정신’은 새로운 철학자의 도래에 대한 니체의 간절한 염원이 읽힌다. 그가 제시하는 고귀한 인간상의 유형 몇 가지만 살펴보자.
<정원 같은 사람>
“정원 같은 사람 - 또는 하루가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저녁 무렵 물 위를 흐르는 음악 같은 사람이- 그대 주위에 있도록 하라: 멋진 고독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여전히 잘 사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유롭고 변덕스러우며 경쾌한 고독을 선택하라!”
니체의 풍류가 깃든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문장. 풍류와 유머가 공존하는 니체. 사랑스럽다. 정원 같은 사람이 뭘까. 향기로움. 아름다움. 어우러짐. 순간적임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아마도 기화요초 피어난 정원처럼 내면에 다양한 아름다운 충동이 자라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독립적인 인간>
“독립한다는 것은 극소수 사람의 문제이다.” 독립은 강자의 특권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자발적으로 “미궁”으로 들어가며 “삶 자체가 이미 동반하고 있는 위험을 천배나 불리게 된다.”
독립이라고 하면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니체는 물질적 독립은 물론이요 도덕과 상식, 안정으로부터의 인격적 독립을 말하는 것일 게다. 좋은 직장, 안정된 삶에서 스스로 몰락을 택하고 삶을 실험의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경우. 예컨대 총을 들 수 없다며 병역거부하고 감옥에 있는 현민씨가 생각난다. 삶 자체가 동반하는 위험을 천배나 불린 불온한 청춘.
그런데 이런 독립적 행동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 니체는 “최고의 통찰은 그것을 들을만한 소질이 없거나 예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귀에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들리면 ‘바보처럼’ ‘범죄처럼’ 들리며 -또한 그렇게 들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니체에게서 늘 모두를 위한 것, 모두에게 이해 받는 것은 가치가 낮은 것뿐이다.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시인이 쓴 직업을 선택하는 법이란 글을 봤다. 첫째가 부모형제와 아내, 그리고 잘 아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곳.. 월급이 적은 곳..승진이 안 되는 곳을 제시했다. 이런 곳을 선택하면 죄 적게 짓고 잘 살수 있다고 했다. 주위에선 '바보처럼' 권력자에겐 '범죄처럼' 보이는 일.
<평균인>
"평균인, 그들은 민주주의적 취향과 그 현대적 이념을 표현하는 능변과 달필의 노예이고 이 모두는 고독을 모르는 인간, 즉 자신의 고독을 가지지 못한 인간이다. 고통 자체를 제거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기는 졸렬한 젊은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과 의견을 일치시키려는 좋지 않은 취미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선이라는 것은 이웃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때 더 이상 선이 아니다. 공동선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자기모순이다. 공동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가치가 적은 것일 뿐이다.”
무리를 따르지 말라. 니체가 강조하는 독립적인 정신은 끊임없는 시도와 물음을 통해 발명된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가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설사 그 시험이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말이다.
<은둔자>
가면을 쓴 사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세미나 할 때 소심한 A형이 ‘자기 얘기’라고 동조했다. 니체는 ‘가면’을 사랑한다. 아니, “깊이 있는 모든 것은 가면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진리만큼 가상의 효용을 높이 평가한 니체 아닌가. 역시 가면 뒤에도 단지 교활함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간계에는 좋은 것이 많이 있다고 충고한다. 예를 들면 “귀중하고 손상되기 쉬운 어떤 것을 숨기고 있어야할 사람”은 무거운 쇠테가 박히고 푸른 이끼가 많이 낀 낡은 포도주통처럼 평생 거칠게 둥글둥글 굴러다닌다고 비유한다. 적빛으로 농익은 매혹의 술을 담은 둥근 포도주통 같은 사람! 매력적이다.
수치심에 대한 니체의 평가가 재밌다.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 아니다.”
수치심이 뭘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사유의 경지다. 단, 시도 때도 없이 아무일에나 느끼는 소심한 수치심이 아니라 “섬세한 수치심”을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독창성”이 있기 때문이다. 섬세한 수치심이 곧 독창성이라는 것. 부끄러움의 체험을 통해 본능(욕망)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그것이 고유의 본성을 꽃피우는 독창성으로 연결된다는 말일 것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조용히 일을 낸다. 니체체는 이렇게 표현했다. '부드러운 결단'
“그의 운명은 수치 속에서 깊이를 지니고 있는 인간과 만나게 되고, 몇몇 사람만이 이르게 되는 길목에서 부드러운 결단과 만나게 된다. 또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의 이웃이나 가장 친근한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심오한 정신에는 모두 가면이 필요하다. 모든 심오한 정신의 주변에는 모든 말 한마디 한 마디, 모든 발걸음, 그가 부여하는 모든 생의 기호를 끊임없이 잘못, 즉 천박하게 해석하는 덕분에 가면이 계속 자라난다.”
<새로운 철학자>
니체는 낡은 철학적 노동자는 가고 새로운 철학자가 와야 한다며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한다.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지도 말고(사람은 감옥이다) 너무 조국에만 매달리지도 말고...하다가 눈에 번쩍 띄는 대목.
“한 학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의 해방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더욱더 많은 것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기 위해 언제나 더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탐욕적으로 멀고 낯선 세계에 매달리기 때문이며, “그것은 비상하는 자의 위험이다.” 그렇다.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삶을 채우며 지적오만과 허위에 차서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들이 우리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거머리의 두뇌만 파는 학자같은 유형의 사람. 니체가 볼 때 형이상적 열정에 빠진 학자의 공명심은 언제나 “한 수레 가득한 아름다운 가능성"보다 궁극적으로 "한줌의 확실성"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과학만능주의.
고병권의 말대로 "철학적 노동자들이 진정한 철학자들이 창조한 개념을 정리하는 사람이고 기존에 창조된 가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교육시키는 데 그치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사람이며 입법하는 사람, 즉 자신이 사용할 개념을 창조하고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니체가 기다리는 새로운 철학자는 "가장 깊은 심야의, 정오의 고독의 친구"이다. 아, 끝까지 읽고 나니, 니체가 묻는 것만 같다. 당신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