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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맑스

정치론- 자연권


<홉스와 스피노자- ‘자연’을 보는 차이>

스피노자에게 끌리는 점. 위계가 없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벗어났다. (홉스를 잘 모르는 관계로 고병권의 글을 참조했다. 스피노자와 홉스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점이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설명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이 도달해야할 본연의 모습이라면 홉스는 자연을 극복해야할 나약한 상태로 본다. 홉스는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처럼 취급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가정을 내놓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들은 비슷한 본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개인을 환원불가능한 단위로 설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개체는 항상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이뤄진 조성체다. 고정된 원자는 없다. 스피노자에게는 항상 이것이나 저것이 문제되지 일반적인 어떤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양도의 문제.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로 자연권의 양도를 제시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영구적 전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제3자인 국가에게 양도하고 국가의 가공할 위력 아래서 계약을 맺고 그 이행을 보장받는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므로 양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들이 연합하여 사회체나 정치체를 구성할 때 권리의 변화가 나타난다. 개인은 개인적 변용이 아닌 집합적 변용을 수행한다. 양도가 있다면 제3자에 대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부분으로 참여하는 전체에 대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부를 만하다. 당대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기독교는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는데 그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감히’ 동일선상에 놓았으니 말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조작하지 않는 것’ - 자기 본성을 다 펼치고 사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악도 없다. 항상 ‘외부’(악마)의 유혹에 따른 죄와 타락이라는 기독교적 이해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외부의 유혹,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지 않은 개인의 무능이라는 스피노자의 지적질에 동감한다.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아무것이나 임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가 도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속이다. 그에겐 도박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이처럼 정념에 종속된 인간은 무능력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이성이 아니라 욕망에 끌린다.”  

우리의 목표는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전환이어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식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육식욕을 채식욕으로 바꾸듯이 말이다. 암 환자가 자기 몸 상태를 ‘인식’하고 술과 담배 끊는 것처럼 정신 상태의 건강을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무지하고 정신이 허약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법에 대해서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몸이 약한 사람이 몸의 건강에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까. 인식의 확장이 자유의 증대다. 인간은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이성적인 삶을 복종이라고 말할 수 없고...스스로를 거슬러서 명하는 정신의 자유를...노예상태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일까? 아니다. 금욕, 고행을 희생을 주장하는 사상들을 비난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 굴욕스러워하는 지성, 자기 자신을 마비시키는 행동과 같은 것들은 거짓이며 오류이고 부조일 뿐이다.  

정리하자. 도박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도박으로 인한 힘의 약화가 악이다. 더 많이 종속될수록 힘은 약화된다. 고로, 절제도 나름이다. 어떤 절제인가. 힘의 증대를 가져오나, 강화를 가져오나. 자기파괴와 자기배려의 차이이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행위 속에 내재한다. 행한 만큼이 인식의 정도다. 지행합일. 앎과 삶의 일치. 이성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행할 수도 있는데 안 한 게 아니다. “우리 애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 안 나오”는 건 스피노자 사전에 없다. 공부의 필요성을 알지만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거다.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해진 만큼이 인식의 정도라는 것.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서로 도움 없이 인간은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하여 그들이 세력을 합친다면, 그들은 연합하여 더욱더 많은 세력을 갖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의존과 독립의 조화 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고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기적인 것은 자기파괴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고 독립적인 개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행한 악은 자신에게 행한 것이다.”  

자연법을 통해 ‘도덕적 형이상학’을 구축하지 않으려는 스피노자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도덕법칙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정서의 증감이라는 물리법칙으로 사유한다. 다수가 배부르고 기쁨의 정서가 증가하면 그게 정의이고 좋은 정치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의는 관념이 아니다 물질적이다.

알수록 사랑스러운 스피노자 오빠~  (나이든 남자를 좋아하는 나의 연상취향의 극한이 아닐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