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식은 나의 분신이 아니라 신을 분유한 존재다. 여기서 신이란 세상을 임의로 만들고 심판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필연적으로 양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체”로서의 신이다. 스피노자의 신개념은 수염 휘날리고 때로 인자하고 때로 근엄한 인격신이 아니다. 신은 모든 자연만물들을 산출하는 ‘능력’에 가깝다. 참 매력적인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이 나는 신을 믿는다면 스피노자의 신만 믿겠다고 했단다. 암튼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신의 능력’이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내재적 존재로서의 신. 이것이 그 유명한 ‘신즉자연’이란 언명이다. 그러니까, 내 몸을 빌려서 잠시 세상에 떨어진 양태로서의 자식도 ‘신의 능력의 표현’인 것이다.
각 양태들은 애초부터 정해진 하나의 본질은 없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양태들 간의 외적인 관계다. 나무는 목수의 손을 만나면 의자로 변하고, 불과 만나면 숯덩이로 변한다. 혀는 음식과 만나면 맛보는 혀가 됐다가 애인과 만나면 사랑하는 혀가 된다. 양태들의 본질은 초월적 세계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게 아니라 양태들 간의 관계에 따라 신의 무한능력이 표현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과속하는 차와 충돌하면 죽음을 맞는다. 각각의 양태들은 관계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한다.
자연의 일부인 아들딸 양태는 나 은유양태와 부모자식으로 만났다. 과연 나는 아이들에게 본성을 꽃피우도록 촉발하는 좋은 마주침인가. 묻게 된다. 단지 혈육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자식에게 적합한 관념을 갖기 어렵다. 자식을 제일 모르는 게 부모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아는 친구는 15년간 부모를 속이고 담배를 꿋꿋이 피고 있다. 나 역시 중요한 실존의 문제는 엄마가 마음고생 할까봐 터놓고 말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면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을 안타까울 정도로 모른다. 나도 내 아들을 순진한 중딩으로 알고 있지만 어디서 포*노사이트를 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식만이 아니라 외부에 대해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기 어렵다. “우리 정신은 신체에 직간접적으로 작용을 가해오는 많은 것들을 지각하지만 그런 지각이 그런 작용을 가한 물체들의 참된 구조를 알려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변용들이 지시해주는 것은 대상들의 실재적 특성보다는 우리 신체 자신의 상태다.”
우리는 늘 내 신체에서 변용된 관념만을 갖는다. 엄마가 말하는 자식은, 자식의 상태보다 엄마의 세계관을 더 잘 보여준다. 최근 치열한 입시 환경 하에서 “우리 아들은 서울대 나온 의사”라고 소개하는 엄마의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참된 관념이 아니라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20년 등골 빠진 엄마의 일생이고 일류주의에 사로잡힌 서글픈 모성이다.
3. 부모의 예속을 뚫고
목동엄마와 아이들을 보자. 대부분 엄마들은 자식들에게 기억이나 이미지 같은 혼란된 관념에 휩싸여 있다. 자식의 본질을 관찰하지 못하고 북한산 오르듯이 남의 엉덩이에만 시선을 맞추고 땀 뻘뻘 흘리며 산다.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 채 엄마와 아이는 서로에게 종속된다. 엄마는 자기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사한다. 물심양면 집중 투자로 아이의 문제 푸는 능력은 증가하겠지만, 아이를 학원에만 가둠으로써 다양한 세계와 접속하는 길을 차단한다. 아이는 남을 배려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등등 외부와 관계 맺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지난겨울 60년 만에 폭설이 내렸을 때, 기업도 임시휴무에 들어간 날. 큰아이 학교에서 최상위권이면서 일찌감치 과학영재로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아이는, 엄마의 에쿠우스에 실려 그 눈을 뚫고 올림픽대로를 달려 4시간 만에 대치동으로 학원을 갔다고 한다. 그 엄마 대단하다면서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씁쓸했다. 눈밭을 뒹굴어도 시원찮을 나이에 이동식 감옥에 갇힌 아이,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리에 지식이 눈덩이처럼 쌓여가면서 가슴이 얼어붙지 않았을까 염려됐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부모의 헌신’에 예속된다. 어렵사리 의대는 들어가겠지만 만약 적성에 맞지 않아도,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어도 나를 위해 한평생 애쓴 부모의 기대 때문에 하얀 가운을 벗지 못하기 쉽다.
이는 자유가 아닌 예속의 상태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행하지만,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하며 원치 않는 일을 행하게 된다.”(E4P66C)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운에 따라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예속적이 될수록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을 잃게 된다.적합한 관념이란,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지 슬픔을 주는지 그 원인을 아는 관념인데 오랜 예속의 결과로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한지 판단할 능력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정신이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하고, 적합하지 못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E3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