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고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융의 말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중요하다. 무의식은 생의 원천이다. 융은 선함보다 온전함을 추구했다고 한다. 책에서도 ‘대극통합’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빛과 어둠의 조화로움이라고 해야 하나. 역설통합의 경지를 강조한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사회화된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이고 ‘만들어진 자아’이지 본연의 자기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이 ‘무의식’이다. 융은 적극적 명상을 통해 그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융에게 있어 심리학과 영성에는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융이 ‘도를 아십니까?’ 묻는 것 같은 착각마저도...ㅡ.ㅡ
암튼 융에게 자아가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인류는 인류에 거역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신들은 인류에게 운명의 길을 제시한다. 우리는 오늘날 신들을, ‘요인들’ 이라 칭한다. 그 말은 화체레 facere, 즉 만든다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드는 자(신)는 세계라는 극장의 배후에 서 있다. 그것은 작은 세계인건 큰 세계이건 존재한다.” (130)
의식에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자신이 ‘요인’즉, 만드는 자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림자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놀랍게도 우리가 요인의 객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만들어짐을 당하고 있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 부자유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융이 말하는 나의 주인은 누구냐 하면, 무의식으로서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인격이 아니라 비인칭이다. 프로이트의 이드(원시적·동물적·본능적 요소, 이드는 무의식이지만 무의식을 꼭 이드라고 할 수 없다)와 유사하다. ‘그것이 생각한다’고 할 때처럼. 그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세 가지 존재방식은 그림자, 아니마, 노현자. 무의식은 깨달음을 준다.
무의식의 세 가지 존재방식, 그림자, 아니마, 현자 등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원형은 시각형태가 아니라 사건형식이다. 원형은 무의식을 이루는 요소다. “삶에는 많은 원형들이 있다. 끝없는 경험의 반복이 인각되어 정신적인 체질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내용으로 가득 찬 ‘상’들의 형태라기보다 거의 내용이 없는 형(型)들로 인각되었다. 이것은 단지 어떤 견해를 갖고 행동을 하게끔 하는 특정한 형의 가능성을 묘사할 따름이다. 삶에서 원형에 해당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원형이 활성화된다.”(164)
적극적 명상은 원형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자료의 원천이다. 적극적 명상이란 일련의 환상을 의도적인 집중으로 현재화하는 것. 이해할 수 없고 무의식적인 환상들이 있음으로써 꿈의 빈도와 강도가 증강되고, 이 환상들을 의식으로 떠올리게 되면 꿈의 성격이 바뀌고 약화되고 뜸해진다고 융은 말한다.
융은 환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환상의 모든 단편들을 맥락에 따라 살펴보도록 과제를 준다. 이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방법으로 권유한 ‘자유연상’과는 다르다. 환상을 그 환상의 단편에 자연스럽게 부착되어 있는 그 이상의 환상자료를 지속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처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사건, 인물 등을 중심으로 개인의식의 길을 따라간다면, 융은 꿈이 집단적 무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보고 만다라 원형상징 그림들 제시, 집단적 원형과 통합시키는 쪽이다.
* 집단적 무의식
무의식이 개인적이 아닌 보편적 성질을 갖고 있다.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은 소위 원형들이다. 신화. 민담. 오랜 시간 걸쳐서 굳어진 형태들. 개인적 무의식은 정감이 강조된 콤플렉스들이다. 정감은 정서, 애정, 증오, 공포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속에 나타난 환상이 환자의 정서적 반응, 즉 대상에 대한 억압된 내용에 주목했다. 그 표상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프로이트는 서사를 중요치 않게 여겼다. 서사는 환자가 마지막으로 가공하는 단계로서 억압을 은폐한다고 보았다. 스토리를 잘게 잘라서 그 단편의 느낌에서 누가 연상되는가를 캐물었다.
융은 아니다. 표상의 내용과 형식이 중요하다. 스토리를 강조한다. 이는 고대해몽술과 유사하다. 꿈을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로 본다. 프로이트는 정서에 주목했지만 융은 정서보다 원형과의 관련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융은 원형, 이데아를 중시한 관념론자다. 융에게는 현실 있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의미가 있고 현실이 있다.
프로이트는 집단적 상징이 환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환자와도 고해치료 형식을 취해, 아버지와 아들처럼 수직적 관계를 맺는다. 반면에 융은 환자와 수평적 관계를 이루었다. 영매로서 무의식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준 것. 개인심리학에도 비개인적인 주제가 얽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