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세미나에서 새봄맞이 ‘기분전환’을 위해 융의 <원형과 무의식>을 읽었다. 예상대로 기분은 전환했는데 ‘더 좋은 쪽’으로 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_- <원형과 무의식> 첫 번째 단원이 무척 난해했기 때문이다.
하필 발제를 맡은 나는 거의 입술을 깨물고 참을 인자를 새기며 책장을 넘겼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아니 대체 동원된 철학자와 연금술사가 몇 명이야...엉엉..’ 종잡기 힘들었다. 역시나 세미나 시간에, 읽을수록 미궁을 헤매게 하는 ‘얄미운 텍스트’였다는데 전원 동의했다.
박정수쌤은 이렇게 진단했다.
“융이 70세 무렵에 쓴 글이라 그럴 것이다. 젊었을 때 날카로움이 빠져버리고 세상을 관조하는 상태가 되어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철학, 종교, 심리학을 총 망라해서 쓴 것 같다. 논조 파악이 쉽지 않았다.”
시인도 첫 시집이 가장 좋은 경우가 많은데, 암튼 작가가 나이 들어 날카로움이 빠져버린 <좋은생각>같은 류의 글을 쓴다면 그것은 나이듦의 선물이 아니라 비극이다. 융 할아버지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암튼 뒷담화는 이쯤에서 마치고;; 복잡다단한 구성에서 다음 진도를 위해 기본 개념을 추려보았다.
우리는 이미 융을 만나고 있었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집단무의식, 원형, 아니마, 아니무스, 페르소나, 그림자 등등이 전부 융이 창안한 개념이다. 프로이트와는 비슷한 나이로 둘이 학문적 동지였다. 융이 정신분석학의 후계자로까지 불렸는데 훗날 세계관 차이로 갈 길을 달리했다. 차이란 크게 두 가지다. 리비도와 무의식에 관한 것.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는 성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고, 융의 리비도는 심적에너지 일반을 가리켰다. (‘氣’ 같은 느낌)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된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융의 무의식은 개인 차원을 초월한 인류의 기본적인 관념- 예를 들면 신화, 종교, 민담 등에서 표출되는 공통의 관념인 원형으로서의 '집단무의식'으로 확장했다. 프로이트가 신경증 환자처럼 예민하게 학문했다면 융은 동양적이고 우주적이고 구도자 같은 성향으로 분열증 환자처럼 이론을 전개한 셈이다.
원형: 어떤 행위의 형식, 충동의 운동 궤적을 말한다. 들뢰즈의 추상기계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를 테면 개-되기 라고 했을 때 개의 정지형태의 ‘모양’이 아니라 개의 ‘운동형태’를 따르는 것이듯 말이다. 개체나 종들이 타고난 유전된 운동성, 충동의 형식이 ‘원형’이다. 개미와 인간의 행동유형이 다르다.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행위의 유형이 결정된다.
정리하자면 원형은 시간, 공간,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 즉, 원형은 사전 경험 없이 집단 구성원이 공유하는 심상을 의미. 유아는 사전경험이 없이도 어둠을 무서워하여 공포를 느끼고 고통을 피하고 어머니를 반기는 행동을 보인다. 원형은 순수하고 거짓 없는 성질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성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미를 의식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너무도 무의식적이어서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정도다.
충동; 본능과 같은 의미. 추동하게 하는 힘. 충동은 형식을 갖는다. 식욕이나 성욕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충동, 에너지 흐름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 태고의 잔재들과 원시적인 기능양식들을 확인했다. 태고의 특성들이 바로 본능의 토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충동과 태고의 양식은 행동유형이라는 생물학적 개념 속에서 일치된다. 형체 없는 충동은 없으며 모든 충동은 각기 그 상황에 맞는 형상을 갖고 있다. 그러한 상은 선험적 성질의 전형이다. 개미의 모든 활동 이전에 개미가 타고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인간은 그가 본능적으로 기능하는 한 그 활동의 동기와 본보기를 만들어내는 본능유형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 상(像)은 충동의 의미를 나타낸다.
의지: 의지는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제한된 에너지의 양을 의미한다. 의지는 궁극적으로는 본능(충동)에 의해 동기유발이 된다. 융이 고유한 ‘정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지에 영향을 받는 모든 기능에까지 이른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맹목적 충동과 의지, 혹은 선택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정신의 해리성: 해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원래 의식의 내용이지만 용납될 수 없는 성질 때문에 억압을 통해 의식의 문턱 아래로 잠재된 내용. 다른 하나는 이차적 주체가 아직 의식으로 가는 입구를 발견하지 못해 머무는 경우다. 이차적 주체의 존재는 억압 덕분이 아니며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의 결과를 표현한다. 이차적 주체도 자아의식에 영향을 주는데 상징들에 의해 매개된다.
무의식: 무의식은, 알려지지 않은 정신적인 것, 즉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적 내용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 어느 정도 의식될 수 있거나 적어도 언젠가 한 번은 의식되었고 바로 다음 순간에 다시 의식될 수 있는 것. 의식의 언저리.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른 매개체다. 처음에는 과정이 마치 의식적인 것처럼 진행되다가도 점차적인 해리가 이루어짐에 따라 더 원시적 단계로 가라 앉아 그 성질이 근간에 놓여 있는 본능의 형태에 가까이 다가간다. 의식은 개인이 직접 인식할 수 있는 정신의 부분. 적합하게 조종된 적응 능력, 즉 충동 억제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는 집단 무의식 내에 존재하는 타고난 핵심적 원형으로서 모든 의식과 무의식의 주인이며 모든 콤플렉스와 원형을 끌어들여 성격을 조화시키고 통일시키는 본래적이고 선험적인 ‘나’.
개성화: 융은 파시즘, 민족주의 같은 정치화된 집단의식 비판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집단에서 고립되어 개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집단 속으로 더 밀고 나가야한다고 보았다. 개인을 넘어서서 인류 보편의 원형에 도달했을 때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개성화’이다. ‘세계와 분리된 나’가 아니라 우주 속에서 나를 찾으라는 것. 무의식의 내용들을 의식에 통합시켜서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 심리적 성숙. 세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세계를 포용하는 것이다.
개인무의식 개인의 경험 중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강도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의식되긴 하였지만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거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억압하여 의식에 머물 수 없게 된 경험들.
집단무의식 개인의 지각, 정서,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인류 역사를 통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정신적 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