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세포는 상품이다. 자고나면 새 상품이 나온다. 상품생산과 동시에 가치증식 과정이 반복된다. 연속된 전체로서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바라볼 때 모든 생산은 재생산이다. 맑스는 이 재생산 관점을 도입해 자본의 정체를 밝혀낸다.
자본의 재생산
자본, 그것은 한마디로 잉여가치다. 우린 그동안 자본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난다고 말했지만, 잉여가치가 덧붙는 그 자본도 사실은 잉여가치의 총액에 불과하다. 가령 자본 1000원으로 매년 2000원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자본가. 그가 매년 200원의 잉여가치를 비생산적으로 소비하면, 5년이 지나면 그는 본래의 1000원을 다 뽑아내 썼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단순재상산 중인 자본 중 그가 처음 가진 자본은 없는 셈이다. “최초의 총투하자본은 축적된 자본에 비하면 무한소량이 된다.” 모든 자본은 자본화된 영여가치에 불과하다.
잉여가치는 누가 만드나. 노동자들이 노동력의 가치 이상으로 가치를 생산해낸 것에서 나온다. 그런데 노동자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가치를 상품형태로 생산해낸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 다시 말해 임금형태로 가치를 지불받기 전에 생산 활동을 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만든 생산물 중 일부를 임금으로 받는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니다. 재생산을 고려하면 “노동자가 이번 주 또는 금년에 지불받는 것은 지난주 또는 작년의 노동에 대한 것이다.” 계급의 관점에서 고찰해보자.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이 생산한 생산물을 모두 취하고 대신 노동자계급에게는 생산물 중 일부를 화폐형태로 교부한다.
농노의 경우를 보자. 농노는 영주의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생산한다. 가령 일주일 중 3일이나 생산물의 반은 영주에게 지불해야 한다. 누가 생산하고 누가 지불하는가가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에 영주가 임금형태로 농민에게 지불하는 방식, 즉 자본의 방식을 취하면 모호해진다. 오히려 거꾸로 보인다. 자본가는 지불받는 자가 아니라 지불하는 자의 형상이 된다. 자본가가 생산하고 생산에 일부 기여한 요소에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 같은 환상이 생겨난다.
정리하면 “노동자계급은 금년의 자기의 잉여노동으로 다음해에 추가노동을 고용할 자본을 창조한 셈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자본은 흡혈귀’ 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과거에 빨린 ‘피’의 명령에 복종해서 새로운 ‘피’를 헌납하는 셈이다.
노동자의 재생산
맑스는 또한 재생산이라는 시각을 통해, 자본만이 아니라 노동자 역시 재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계급 노동자계급이라는 규모에서, 사회적 규모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고찰해보자. 자본만이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도 이뤄진다. 시장에서 구매된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사용된다. 생산과정은 노동력을 쓰는 소비과정이다. (생산적 소비). 생산과정을 벗어나면 노동자는 다시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전까지 노동력을 복원해야 하는데, 이는 노동력의 대가로 받은 화폐를 통해 생활수단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과정이다. (개인적 소비)
그런데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도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생산적이다. 노동자가 자기 건강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또한 자본가에게 훌륭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헬스장 만들어주고 영어학원비 대주는 것도 더 나은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이다. 따라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의 소비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모두 생산적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계급은 심지어 직접적 노동과정 밖에서까지도 자본의 부속물이고 개인적 소비까지도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본의 재생산이란 노동력의 재생산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 메커니즘은 늘 새로운 노동자들을 준비하고 있다. 즉, 노동력을 파는 것 말고는 달리 생계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계속 생산된다. 그는 모든 생산수단을 결여한 채,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다시 자본가 앞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먹고사는데 생활수단을 소비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유지하고 재생하는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수단을 소멸시킴으로써 다시 노동시장에 나와야 하는 처지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축적이 일어난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의 재생산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자본관계 자체, 즉 한편으로는 자본가 다른 한편은 임금노동자의 생산과 재생산을 의미한다. 어떤 노동자가 어떤 자본가를 만나느냐는 우연적일 수 있지만, 전체로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만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자본가에게 팔기 전에 이미 자본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 있다는 것은 그 외관상 아무리 대등한 교환이라 하더라도, 이미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내포한다.
'축적'편 최대의의는 이것을 해명한 데 있다. 시장에서의 등가교환은 단지 외관일 뿐이다.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축적이 이뤄진다는 것. 그것이 영구적으로 재생산된다는 것이야말로 이 체제의 착취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