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우연히 본 장면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제목이 ‘찜질방 부자(父子)’다. 이 엄동설한에 방한칸이 없어 아버지와 열여섯살 아들이 짐 상자를 들고 거리를 배회한다. 이 찜질방에서 쫓겨나면 저 찜질방으로. 그러길 몇 차례. 아버지는 보증금 300만원짜리 방이라도 구하고자 목돈마련을 위해 지방에 간다. 아들 손에 십만 원을 꼭 쥐어 주며 아빠 올 때까지 아껴서 쓰라고 당부한다. 이제 아들은 찜질방에서 눈치 보며 혼자 자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 아버지를 태운 봉고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아들의 뒷모습이, 둥지에서 떨어진 작은새처럼 한없이 애처롭다.
KBS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딱 그 나이의 아들 키우는 엄마로서 가슴 미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누구 후원자라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바라는 마음에 홈페이지에 가봤다. 그랬더니 아예 매회 출연자마다 후원 계좌번호가 나와 있다. 아마 인정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국행 마일리지도 쌓을 겸) 많이 도와줄 것이다. 그나마 출연자들은 어느 정도 숨통은 트일 터이니,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고 공영방송은 떠들어대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헌데 이게 어디 개개인 온정의 손길로 해결될 문제인가. 낮에는 애 많이 낳으라고 출산캠페인 엄청 해대고, 밤에는 그 미래의 새싹인 아이들이 얼마나 피폐하게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영방송 KBS의 두얼굴이다.
찜질방 부자. 이들은 열심히 사는데도 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아버지는 막노동꾼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공사판에서 일하고 일당7만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일당 7만원으로만 보면 적은 돈은 아니다. 문제는 한 달 내내 안정적인 일자리가 확보가 어렵고, 있어도 육체적인 한계로 연이어 일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늙으면 점점 더하다. 웬만해선 뜨내기 생활을 청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디 일용직뿐이겠는가. 서울에 가로등 간격으로 들어선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생들. 시급 몇 푼,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돈 받아서 고시원 전전하면서 사는 가엾은 아이들도 수도 없이 많다.
#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다
그런데 인간답게 먹고 사는 일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급’ ‘시급’은 왜 생긴 것일까. 일한 만큼 주는 시급은 과연 합리적인 임금체계일까? 이에 대해 맑스가 이백년도 전에 자본론에서 조목조목 비판한다. 다른 장도 그렇지만 특히 ‘임금’편은 리얼타임으로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임금은 노동력의 가격이다. 여기서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상품은 아니다. 가치의 실체로서의 ‘노동’과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가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가치’로서의 임금은 무엇이 문제일까. 마치 ‘면화의 가치’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노동의 가치’란 표현은 노동자가 하루 일한만큼의 노동이 모두 지불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자본가는 기계나 원료는 살 때 값을 치른다. 선불이다. 그런데 노동력을 살 때는 후불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한 후에 대가를 받는다는 사정 때문에, 임금은 마치 노동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만약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면 그 노동량이 몽땅 노동자의 임금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지불노동과 자본가가 챙기는 불불노동으로 분할되는데 ‘노동의 가치’라는 말은 이 같은 자본주의 배후의 착취관계를 은폐한다.
# 시간제, 노동의 정상가격이라는 환상
노동자가 받는 명목임금을 노동일(하루노동시간)로 나누면 시간 당 노동의 평균가격이 나온다는 발상. 단위 시간당 노동의 가격을 구해서 그것을 다시 합산하면 노동자의 임금이 나온다는 것. 그런데 하루 노동시간 변동에 따라 노동력의 하루가치가 크게 변동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계산법은 터무니없다.
가령 하루에 12시간 중 필요노동시간이 6시간 이라면, 노동자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 6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자본가의 몫이다. 즉, 최소한 먹고 자고 생존유지를 위해서는 하루에 6시간은 일해야 그 사람이 다음날에도 일하러 나올 수 있는 노동력 '재생산’이 보장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자본가가 시급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자의 기본생활권을 교란시키고 아주 효율적으로 노동자의 단물을 빼먹고 있다. 예컨대 하루 서너 시간 일하는 알바생들이 그 시간급으로는 집값과 밥값 옷값 통신비 내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용직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시간급제는 ‘노동의 정상가격’을 지불한다는 환상을 유포한다.
심지어 잔업 할 때 초과 지급되는 시간외 수당이 자본가의 선심인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하지만 노동시간의 연장은 노동가격의 저하를 가져온다. 11시간 일하는 것과 12시간 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1시간 느는 것이지만 피로도를 느끼는 면에서 결코 균질한 1시간의 노동이 아니다.
“만약 시간임금이 확정되어 노동자를 자본가의 마음에 드는 시간만큼 취업시키고 그 노동시간에 대해 지불하기만 한다면, 자본가는 원래 시간임금의 산정단위고 있는 시간보다도 짧게 노동자를 노동시킬 수 있다...이제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존유지에 필요한 정도의 노동시간을 허용하지 않고도 노동자로부터 일정한 양의 잉여노동을 짜낼 수 있다. 자본가는 취업의 규칙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편의나 기분, 순간의 이익에 따라 혹독한 과도노동과 상대적, 절대적 작업 중단을 교대 시킬 수 있다. 그는 노동의 정상적 가격을 지불한다는 구실하에 노동자에게 어떤 상응하는 보상도 없이 노동일을 비정상적으로 연장 시킬 수 있다.”
# 성과급제, 자본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임금
맑스는 성과급제는 시간급제 임금의 전환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임금의 기준이 시간이 아니라 생산물의 양일뿐이다. 성과급제 임금의 특징은, 생산물의 질에 문제가 될 경우 임금이 삭감된다. (요즘은 과자나 어묵에도 생산자 이름이 표기된다.) 이는 자본가에 의한 임금 삭감과 속임수의 풍부한 원천이다. 또한 사회적 평균 생산량이 경험에 의해 알려져 있으므로 거기에 미달하는 노동자는 쉽게 해고된다. 그리고 노동의 하청을 양산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끼어 생산계약을 맺는 중개인들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노동강도와 노동일이 늘면 당연히 생산량이 늘기 때문에 노동자는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 노동 강도를 높이고 노동일을 연장하게 된다. 시급제의 경우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차이가 크게 고려되지 않지만, 성과급제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차이가 크게 반영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경쟁이 강화되고, 단결이 저해된다.
“성과급제 임금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임금형태다”
맑스에 따르면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주의 생산의 고유한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그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개별 자본가의 선의와 악의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시급, 일급, 성과급은 자본가들의 잉여노동에 대한 무한한 갈망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