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은 노동자가 하루 중 노동하는 시간이다. 현재는 8시간으로 법제화 되어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14-16시간인 경우가 흔한 일이었다. 심할 때는 성인남자 18시간, 10세 미만 아이도 15시가 노동을 해야 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아침 8시 반에 출근해 11시에 퇴근으로 하루 14-15시간 일했다. 야간도 허다했고 한 달에 휴일은 이틀이었다.
자본가에게 시간은 금이다. 초침 지나갈 때마다 잉여가치가 쌓인다. 그래서 노동일에 제약이 없을 때는 한없이 늘어났다. 그렇다면 자본은 하루분의 가치를 주고 구매한 노동력을 얼마 동안 소비할 권리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노동일은 불변량이 아니라 가변량이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신이 설정한 24시간을 넘어설 수 없고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맑스는 노동일이란 무엇인가 물음을 반복한다. 대답은? 당파적이다. 위의 사례가 말해주듯 노동일의 정확한 길이는 없다. 그렇게 간주되는 것만 있다. 힘의 결정이 내려지는 영역이다.
“어떤 이론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문제로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편리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가 문제로 되었다.” 입장에서 자유로운 과학은 없다. 더 살펴보자.
자본가의 논리는 이렇다. 상품교환 법칙에 따라 “나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내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이익을 짜내려고 한다.” 내 돈 주고 샀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 반면에 노동자주장은 “상품교환 법칙에 따라 내 하루 노동력의 사용은 당신의 것이다...그러나 반복해서 그것을 팔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합리적 양의 노동을 하면서 살 수 있는 평균 기간이 30년인데 당신이 그것을 10년 만에 없애버린다면, 당신은 내 상품의 가치의 2/3을 강탈한 것이다. 이는 상품교환법칙 위반이다.”
맑스는 이를 권리 대 권리의 충돌로 규정, 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힘’이라고 말한다. “쌍방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된 권리를 주장한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310) 그리하여 총노동과 총자본 사이의 투쟁이 나타난다.
# 잉여노동 갈망 '자본주의 내재적 충동'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노동에 대한 욕망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지배자 내지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위한 잉여노동이나 강제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것은 아니다. 봉건제의 노예처럼 있어왔다. 그런데 과거 사회에서 과도한 노동은 대체로 우연적이거나 자의적이고 예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잉여노동 축적 자체가 생산의 관건도 아니었다. 과거 사회들은 대체로 잉여노동 부분이 독립적이고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취했다. (자기를 위한 노동과 지주를 위한 노동이 구분됐던 소작의 예)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고유한 것이므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선험적 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곳에서, 노동일은 생산이 축소되는 공황의 시기에도 연장되며, 기계가 도입되어 생산성이 대폭 향상되는 경우에도 연장되는 경향이 있다. 즉, 노동일의 확장은 내적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노동일의 확장,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이 오직 외적인 강제(투쟁)에 의해서만 어느 정도 규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맑스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착취의 실태를 고발한다. 맹목적 노동일의 확장은 사실상 살인 행위라는 맑스의 분노의 찬 고발. 영국 철도노동자, 부인복 제조공장의 노동자. 과로로 살해된 사람들.
참고로 ‘교대제’는 신이 부여한 하루 24시간을 모두 활용하고픈 자본가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생산수단이 사용되지 않고 있는 동안 즉, 건물, 기계, 설비, 원료가 야간에 놀고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자본가들.
# 표준노동일, 총자본:총노동 투쟁
잉여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맹목적 충동은 노동일의 도덕적 한계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 버리곤 한다. 그러나 노동인구는 언제나 과잉이다. “죽기를 각오한 지원자들은 언제나 넘친다” 자본가는 경험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361) 이것이 모든 자본가들과 모든 자본주의국들의 표어다.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의 본성이다. <자본론>의 자본가는 자본의 합리적 영혼이다. 즉 개별자본가의 선의나 악의와는 무관한 외부적인 강제법칙, 자본주의적 생산에는 내재하는 그런 외적인 법칙이 작동한다.(361) “그가 모범적 시민이든, 동물학대방지협회의 회원이든, 성인이라는 명성을 누리든 아무 상관이 없다.” 노동일의 확장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기본충동이다.
노동일을 둘러싼 수세기에 걸친 투쟁은 결국 표준노동일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18세기까지 노동법은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시키려 했고, 19세기 노동법은 노동일을 강제로 단축시키려 했다. 그러나 맑스는 맹아기의 야만적인 자본의 노동에 대한 요구가 성년기 자본의 매너 있는 양보에 비해 훨씬 겸손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18세기 이전의 유럽사회는 나태와 방탕을 악의 근원으로 간주했고, 잔인한 노동윤리를 강요했다. 그 와중에 생겨난 노동수용소는 구빈, 즉 빈민의 보호기관이 아니라, 공포의 집이 되었다. 그런 공포의 집도 1770년 하루 노동시간은 12시간이었다. 자본가들이 꿈에서만 갈망하던 그 공포의 집이 몇 해 뒤 ‘공장’으로 나타났다. (371) 이 공장이라는 현실은 자본가가 꿈꾸던 이상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노동일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산업자본가와 지주 사이의 이해 갈등 덕분에 상당히 줄어들었다. 1833년, 1844년, 1847년. 미성년자와 부녀자들의 과도한 노동이 금지되고 남성 성인 노동 역시 일정한 규제를 받았다. 마침내 10시간 노동 법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유럽노동자들의 정치적 운동 패배 1848혁명 패배로 여러 법들을 다시 폐기됐다.
노동일 규제의 역사는 결국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은폐된 내전의 산물이다. 노동자들의 집합적 힘이 없을 때 노동일은 한없이 늘어나고, 집단적으로 단결했을 때 줄어든다.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406)
노동자가 일요일에 금속공장, 제지공장, 유리공장에 출근하지 않으면 그것이 비록 종교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계약위반이란 이유로 처벌받는다. 정교도들이 지배하는 의회도 안식일의 모독이, 자본의 가치증식과정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에는 모른 척 할 것이다. (354)
* 참고기사 한겨레21 기자 위장취업;; 취재기사 <노동OTL> 2009년 11월 13일자
우리 공장은 월요일을 빼고는 화·수·목·금요일에 밤 9시30분까지 야근을 한다. 근무가 오후 1시에 끝나는 토요일에도 5시까지 꼬박꼬박 연장근무를 한다. 계속 서서 일하며 무거운 가구를 날라야 하는 특성상 야근이 끝날 때가 되면 발바닥이 망치로 세게 후려친 듯 얼얼하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나서 라이터로 발바닥을 꾹꾹 눌러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발목도 많이 쑤신다. “야근만 안 해도 좀 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장 안의 어느 누구도 “오늘 야근하려느냐”고 묻지 않는다. 평일엔 오후 6시께 저녁밥이 배달돼오면 “오늘도 야근하는구나” 했고, 토요일에도 낮 12시30분께 점심 밥상이 공장 작업대 위에 차려지면 “오늘도 연장근무구나” 생각했다. 공단에서 그런 거 물어보는 공장은 없다. 다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하면 얘기하고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