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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맑스

슬픈 자본론

사실, 자본론 서문 읽고 가슴이 먹먹했다. 당황스러웠다. 다 읽기도 전에, 내용이해도 충분치 못한 책에 슬픔으로 반응하는 이 과도함이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았다. 왜 슬프냐고 물어보면 딱히 펼칠 논거도 없다. 막연한 느낌인데, 내 아무리 낭만주의자이지만 어려운 공식 잔뜩 들어있는 자본론 읽으면서 이런 기분이 들줄 몰랐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 발전의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 

서문에 나온 저 문장들을 보고 맑스의 따뜻한 감수성에 감동했다. 맑스가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서 ‘자본론’을 쓴 이유는 고통스러운 세상, 그 고통의 원인을 밝혀내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맘대로 믿어버렸다. 맑스가 치밀하고 과격한 체제전복세력인줄 알았는데 복실복실 털복숭이 온도 그대로, 인정 많은 따듯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긴, 대상이 무엇이 됐든 '사랑'이 아니라면 자본론이라는 대작을 25년에 걸쳐 쓰지도 못했겠지. 자본론에서는 악덕기업주라기보다 최소한의 양심을 갖춘 '자본가와 지주'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맑스는 쿨한 태도로 예를 갖춘다.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6)

맑스는 착취문제를 특정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본가와 지주를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에 대한 호의와 호기심 따라 더듬더듬 작은 봉우리 하나 넘었다. 1편 ‘상품과 화폐’ 지나고 2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에 접어드니까 조금 가슴이 트였다. 2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은 내용이 잘 읽히고 그만큼 감동도 크다. 예수, 석가모니 등 대가가 그러하듯 맑스 또한 비유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문학적인 수사와 실감나는 묘사로 단원을 마무리 짓는다. 드라마 예고편처럼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도록 만든다. 이를 테면 제6장은 인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소비되는 구조를 설명하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부분인데, 엔딩씬이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231)  

맑스는 보았던 것이다. 자기의 몸뚱이를 밑천으로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의 고단한 눈빛을, 축쳐진 어깨를, 비스듬히 닳아진 구두 뒤축을.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왜 사업가는 눈이 반짝이고 왜 노동자는 겁에 질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됐다. 자본가가 시장에서 오븐기계, 밀가루, 노동자 등 100원어치를 사서는 공장에 들어가면 다음날 110원짜리 빵으로 만들어 팔아 이익을 챙겼다. 설비, 원료, 노동력...등 저것들 중에 어떤 요소가 이익을 낳는 걸까? 유심히 살펴보니 기계는 쓰면 닳고, 밀가루도 쓰면 사라진다. 그런데 노동력이란 상품은 소비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했다. 자본가에게 10원어치의 이익을 낳아주는 황금알은 바로 ‘노동력’이었다. 더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맑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공장 속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잉여가치가 생기는 과정을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 다룬다.  

자본론에 감돌았던 묘한 슬픔의 서정이 ‘나의 오버’가 아니었다. 분명 맑스는 비통함에 잠겨 이 책을 썼으리라 사료된다. 다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적인 장면, 노동자의 낙담한 표정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그 열받음으로 사회의 정치경제구조를 낱낱이 해부한 것이다. 세미나 끝나고 고병권 샘에게 말했다. "맑스의 감수성이 놀랍고 자본론이 그래서 더 감동적"이라고. 그랬더니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노동자의 슬픈 눈빛을 읽어낸 맑스가 자본주의를 멈추게 했다” 평했다고 전해줬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의문부호를 던지고 그것의 심연까지 파고들어간 맑스를 통해, 최고의 감성이 최고의 이성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