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강의>는 프로이트 첫 저작이다. 프로이트가 이 책을 썼을 때만 해도 100년 전이니까 정신분석학 개념이 지금처럼 일반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부에 ‘정신분석’이란 학문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가 나오는데 그간 당연시 했던 부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 말하는 것만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하지?
정신분석은 신경증 치료학이다. 정신분석의 주체는 환자 자신이다. 정신분석 치료는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환자는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소망과 감정충동을 고백한다. 그런데 말하는 것만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언어란 원래 마술이었고 지금도 마술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정신은 언어로 표현되고 형성된다. 언어는 한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거나 저주로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언어의 본질은 단순히 세계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변화의 힘이 있다. 또한 환자가 하는 말에는 사실 왜곡이 있을 수 있다. 그걸 무슨 근거로 믿고 치료를 하는가. 하지만 어떤 말이 환자에 의해 왜곡됐다면 그 ‘왜곡의 형식과 패턴’을 추적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한 사람의 무의식적 진실은 억압된 생각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상호주관적 진리가 과학일까?
정신분석의 진실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상호주관적인 진실이다. 그래서 분석가와 분석자 사이의 신뢰가 전제조건이다. 환자와 의사간의 특별한 감정적 유대가 형성된 조건 속에서만 출현한다. 이것은 의학이 아니라고 의심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객관적 진실이란 게 있을까? 프로이트는 역사가의 진실 역시 객관적인 게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의 문헌이나 자료들은 그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과거 사람들의 믿음을 증명할 뿐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믿으니까 역사로 인정되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없다. 믿음이 진실을 출현시킨다.(지젝) 애초에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앎은 불가능하다.
정신분석에서 진실은 외부의 인정형태를 띠지 않는다. 효과가 차원의 확인만 있을 뿐이다. 즉, 치료가 먹히고 환자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이 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푸코의 말대로, 진실은 진리효과다. 신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세상으로부터 공인받기 위한 진실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한 진실이다. 니체가 진리는 진리에 대한 의지라고 말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진리는 진리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
“학문이란 엄정하게 입증된 명제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류이며 또 그렇게 요구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종교적인 교리를 다른 것으로 보충하려는 욕구를 가진 권위 편집증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그 자체의 교의 속에서 단지 아주 적은 양의 명징한 정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저 일정한 정도까지의 확률로 뒷받침된 주장들일 뿐입니다. 확실성에 대한 이러한 근사치만으로도 만족하고 마지막 확증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건설적인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방식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7쪽)
근대적 진실은 신체로부터 분리된 진실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진실을 환자 주체, 신체의 욕망과 결부시킨다. 내 몸에 맞는 나의 진실을 찾는다는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입장은 혁신적이다. 또한 과학에 대한 태도도 열려있다. 과학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인식이 아니라며 완벽한 인식이 아니더라도 그것에서 출발하여 건설적인 작업을 해나가는 게 과학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이론이 있을 때 한두 가지 예외를 통해 ‘무효’라고 반박하지 말라는 것. 한두 가지 예외로 그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맞는 사실에서 논리를 발전시키는 게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전조들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은, 모든 내용들이 그렇게 다 들어맞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