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합적 신체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해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기계가 맞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자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산업기계의 이지적 기관이다. 인간이 어쩌다가 산업기계의 부속이 됐을까. 자본의 욕망(리비도)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간을 손으로, 화폐를 혈액으로 삼아 생산물을 낳는 신체다.
자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욕망하는 신체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고 기계처럼 작동한다. 욕망의 흐름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물과 동물의 구별없이 모두 접속하여 네트워크 형태의 신체를 구성한다. 즉, 하나의 부분-기관이 항상 다른 부분-기관에 연결되면서 형성되는 리비도적 신체이다. 어떤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고 어떤 흐름을 절단-채취하는지에 따라 신체는 매번 다른 복합체의 기계적 기관이 된다.
이러한 신체구성의 메커니즘을 라캉은 부분충동들의 몽타주라고 규정했다. 즉 충동적 신체는 미리 정해진 목적과 규칙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소재와 우발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소재를 조합하는 콜라주처럼 구성되는 신체이다. 신체는 결코 개체 보존이나 생식과 같은 총괄적인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부분충동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신체라는 것은 이처럼 무수히 많은 곳과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거대한 자본이라는 흐름에 유기적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을 수 있는 보루로 작용할 수 있다.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욕망의 신체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 코드
흔히 코드라고 말할 때, 코드는 충동의 방향과 성질을 결정하는 단항적 기표들의 연쇄다. 그리고 충동의 방향/의미란 곧 충동들의 결합방식과 그 사건적 의미. 코드는 충동기관들의 결합방향에 따라 신체들의 질적 특성을 결정한다. 여기서 방향이란 미분적 변이의 방향으로, 그런 변이의 방향에 따라 욕망하는 신체의 성질이 결정된다. 코드는 “흐름들의 성질 하나하나를 규정하는 것” 코드는 리비도의 양을 결정하며, 그 양에 따라 충동기관들의 가치가 결정된다.
자본주의가 획일적인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이유는 일체의 코드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소유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재화의 코드적 가치가 상실되고 모든 재화는 화폐로 측정되는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부의 정도에 따라 능력이 측정되고, 사는 동네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되고 등등. 이와 같이 양화된 충동기관들의 흐름이 결합되어 자본이라는 충만한 신체가 형성되고, 재화나 사람의 존재이유는 이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결부됨으로써만 확인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는 사람과 사물을 분리시킨다. 전-자본주의적 코드 사회에서 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표시한다. 특정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깃든 코드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유와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와 함께 사물의 가치는 양적인 상품가치(교환가치)로 환원된다. 상품화된 사물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존재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는 의미, 즉 사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탈코드화에 의해 사회적 생산단위였던 친족단위는 해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재편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주된 역할은 탈코드화된 인간의 생산, 즉 원자화된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리비도적 신체는 낱낱이 분리된 유기체, 즉 개체로 재편되고 그 개인들은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는다. 일전에 ‘한겨레’ 김형태 변호사 칼럼에서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노동자’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기현상에 대해 꼬집은 글도 이러한 맥락이다.
# 소외
맑스는 노동을 감성적 인간활동으로 규정한다. 노동의 소외란 감성의 소외다. 우리는 결코 감성적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을 감각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이 자신의 감성적 신체 일부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감성적 실천 속에서 파악된 인간은 유기적 개체가 아니라 자연적, 인공적 대상과 함께 감성적 신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이다. 맑스는 이런 감성적 인간의 집합적 신체성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맑스는 감성적 인간활동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외란 그 주체적 감성활동(실천)이 수동적-관조적 감성으로 전도되는 현상이다. 소외의 결과 실천적 감성의 결과물은 수동적 감성, 즉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이런 소외를 상품의 물신성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감성적 실천의 결과물에 불과한 상품이 마치 독자적인 생명과 가치를 지닌 것처럼 시장을 활보하며 창조자의 운명을 지배하는 물신이 된다.
최근 영어광풍을 보자. 영어의 가치는 세계화 시대의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미국식 회화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 자체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영어는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물신주의적 믿음 속에서, 미국식 회화 능력의 유무로 계층화가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이 은폐되는 것이다.
# 혁명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헐벗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산이 없기 때문에 고유한 정체성도 없는 자들, 안정된 지위가 없기 때문에 정당한 몫이 없는 자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자본의 재생산기관인 국가도 없고 가족도 없고 사적 소유에 의해 정의되는 사적 인간, 즉 개인도 아닌 ‘무리’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감성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간대중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저런 정체성을 지닌 감성적 인식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실천 주체다.
혁명은 인과율의 법칙 속에서 오지 않는다.(지젝) 역사 발전의 법칙 속에서 혁명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혁명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실천이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혁명적이다.(들뢰즈-가타리)
반면에 예속집단은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집단이다. 이해와 목적의 틀 속에서, 인과율의 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집단은 언제나 외부 현실의 지배적 힘에 예속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실천적 감성의 주체를 수동적 감성(인식)의 대상으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바꾸고 사물의 존재조건 자체를 바꾼다. 모든 법의 정초 과정은 폭력적이다. 이런 제헌적 폭력이 없는 혁명은 가짜 혁명이다. 레닌의 혁명이 폭력적인 것은 단지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이라서가 아니라 혁명 자체가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제헌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외부의 어떤 타자에게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는 자기 입법적 실천 행위이다. 그럴 때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저 먹고 자고 자식만 낳는 존재 취급받던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감성의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빼냄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적 감성의 실천 주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