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에 파리에서 공부하는 후배를 만났다. 방학이라 잠시 들른 건데 2년 전에 나왔을 때보다 몸이 더 실해졌다. 유학 전에는 보통 체격이었는데 4년 사이에 10kg 이상이 늘어난 것. 의대생이라 공부가 힘들고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데다가 집에 오면 10시 반인데 동거남이 요리를 너무 잘해서 항상 한상 가득 저녁을 차려 놓는다고 그거 먹고 이렇게 됐다고 했다.
그럼서 서울 여성들이 너무 날씬하다고, “다 모델이야 모델~” 이라면서 심지어 나에게도 “언니는 파리 오면 영양실조 걸린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몸무게 55킬로그램에 허리 27사이즈 입는 영양실조도 있나-_-;) 암튼 파리에서 자기는 아주 평범한데 여기 오니까 너무 자기만 튄다고 멋쩍어한다. 사실 그녀는 누가봐도 애 둘 낳은 구세대 엄마 실루엣으로, 홍대앞에서는 이질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도한 성형과 다이어트, 명품백 등 외모지향적인 풍토는 왜 생겨났나. 왜 여성들은 카드 돌려막기 해가며 명품을 소비하고 노화방지 화장품을 바르면서 몸단장을 하는가.
외모에 관심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비지향적 삶에 예속되고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게 문제다. 밥도 안 넣어주고 굽 높은 킬힐 신어서 발병 나고 피부박피를 주기적으로 해서 점점 피부 망가진다. 오직 남에게 ‘보이기 위해’ 온몸에 대형공사를 벌이는 여성들. 지하철 광고판에는 꽃미남 서울대 출신 성형외과 의사들이 웃는 얼굴로 ‘당신도 달라질 수 있다’고 유혹하고 TV에서도 끊임없이 여성의 욕망을 부추기고 지갑을 공략한다.
자본의 흐름으로 포획되는 여성의 삶. 외려 과거처럼 여성에 대한 직접적 억압보다 여성의 욕망을 부추기는 형태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티가 안 나니까 본인도 타인도 의식하기도 힘들다. 저항의 대상은 또 어딜 향해야 하는 걸까. 무엇이 그녀들에게 이런 삶의 방식을 살도록 할까요. 한 인간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힘의 의지’가 무엇인가. 욕망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며 변하는지, 그 생성의 기원과 운동의 메커니즘을 묻는 질문이 요청된다.
인간은 태어나서 이 세상에 던져진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욕망에 따라 느끼고 활동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다. ‘나’라는 실존을 무한히 지속하려는 힘, 즉 모든 노력, 본능, 충동, 의지작용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주관적인 마음이 아니다. 사회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안 갈 자유가 있던가? 77사이즈 입을 자유가 있는가? 뚱뚱한 사람은 일반 가게에선 옷도 안 팔아서 인터넷 ‘큰옷매장’이 성업을 이룬다고 한다. 만약에 우리나라 여성들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토실토실하고 신체 ‘건장’하다고 해서 비정상의 무리에 속하지도 않았고 아무데서나 옷 못사는 그런 불편 안 겪었을 것이다. 성형중독증에 걸리지 않고, 명품 백을 들어도 아무도 안 쳐다보니까 카드빚 내어가며 사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품백은 누가 보아주는 맛에 드니까.
이렇듯 욕망은 사람 사이에서 관계 안에서 작동한다. 프로이트도 심리현상의 원인은 뇌 속에 있는 뉴런 입자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한다. 가령, 어떤 아이가 딸기 케이크를 먹는 꿈 표상을 일으킨 것은 자기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이다. 며칠 전 딸기 케이크를 먹을 때 부모님이 기뻐하던 것, 그 때처럼 기쁨주고 인정받는 아이가 되고 싶은 ‘인정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해석한다. 같은 원리로, 어떤 아이가 일류대와 의사의 꿈을 갖는 것은 부모에게 기쁨 드리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부모의 욕망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후배에 따르면 프랑스는 공부 젤 잘하는 학생들이 철학과를 택한단다. 고등학교과정에서도 수학과 철학 과목 배점이 같고, 프랑스에서 IT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유능한 인재들이 그 분야를 선호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왜 인생을 그런 일(IT)에 허비하느냐고 생각한다니 놀라웠다. 우리나라는 고3학생 전국1등부터 차례로 전국의 의대정원까지 거의 의대지망이라던데. 아무튼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들이 바라는 건 ‘의대’ ‘명품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내장된 ‘특권과 부’에 대한 욕망, 그 집단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임을 알 수 있다.
욕망은 복합적이다. 결코 개별적이지 않고 충족되지도 않는다. 배고프고 자고 싶은 것은 ‘욕구’는 채워져도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님’처럼, 욕망은 늘 빈자리. 욕망은 어떤 물질적 대상과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욕망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전치되고 응축될 뿐, 그 실재 대상과 만날 수 없다.(라캉) 충동의 관념적 표현인 욕망의 표상은 다른 욕망들로 이동(전치)하며 다른 욕망을 대표(응축)한다. 응축과 전치에 의해 표상의 강도와 가치가 결정되는 방식을 프로이트는 중층적 결정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표상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으며, 그런 만큼 인간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욕망을 어떻게 구성해야하는지 고찰해야하는 문제가 남는다.
혹시... 애벌레의 꿈님?????

그 분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노먼 베쑨을 꿈꾸며 프랑스로 날아가신
네~ 맞아요. 주원이(애벌레)는 의대4학년 재학중이고 열심히 꿈을 키우고 있어요. ^^ 프랑스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성적도 좋고..나중에 큰 일꾼 될 듯..^^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생산하는 욕망,혹은 욕망의 생산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양재역에서 어제는 충무로역에서 메트로 아티스트의 공연이 있더군요.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꺼내드니 여기저기서 디카를 꺼내서 찍게 되는 사람들 ,먼저 가서 돈을 넣으니
뒤따라서 돈을 넣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기했지요,왜 먼저 하지 않는가??
그 이야기를 오늘 모임에서 했더니 선생님, 공부하는 모임이 아니라 피아노나 악기 연습하는 모임을
만들면 아마 우리들보고 거리로 나가서 연주하자고 할 거지요? 라고 묻네요.
그 생각까지는 해보지 않았지만 주엽역에 지하철타러 가는 길에 갑자기 눈에 들어온 베네스토 광고
일반인들의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인데 그 자리에 그 광고가 늘 있었으련만 바이올린 연습을
막 시작하니 그 광고가 눈에 들어오는 일이 신기해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목요일 오전 미리 와서 바이올린의 자세를 보아주겠다고 자청한 신숙씨가
어, 나도 그것이 눈에 띄어서 신기했어요라고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 눈이라고 같은 눈이 아닌 셈인가요?
우리집에서는 아들도 조카도 연습하는 곁에 와서 끽끽 소리 나게 한 번 켜보고 가거나
조카는 시험끝나고 심심하다면서 이모 치는 악보 달라더니 피아노 앞에서 한 손으로 연습을 하네요.
욕망은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명품과의 전쟁과는 다른 의미인데
이런 밖에서 들어오는 좋은 욕망이 잘 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런데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의대 공부한다는 후배, 참 멋지군요. 즐겁게 공부하라고
멀리서 응원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인사 전해주실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배치에 놓이느냐가 중요하죠. 주변의 것들과 공통리듬을 만들어가면서 능력을 확장시키는 욕망이 바로 생산하는 욕망같아요. 글고, 후배는 정말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운 친구에요. 연초록샘의 응원을 꼭 전해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