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도심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을공동체 성미산마을은 이의 좋은 사례다. 15년 전부터 손 맞잡고 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우고, 먹을 것을 나누고, 승용차를 나눠 타더니 이번엔 “모여서 놀아보자”고 의기투합해 판을 짰다. 소통과 창조의 공간, 바로 성미산 마을극장이다.
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스산한 3월 일요일 오후, 성산동 주택가 골목에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들 대여섯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같이 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담벼락에 붙은 노란 포스터의 글귀가 흡사 녀석들의 목소리인양 들려온다. 성미산마을극장 개관기념페스티벌을 알리는 포스터다. 마을극장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혹시나 싶어 아이들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역시나 찰떡같은 대답이 들려온다. “나루 건물에 있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제히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고것 참 신통하다. 아이들이 동네 골목에 나와서 노는 모습도 드문 일인데, 생긴 지 한 달도 채 안 된 마을시설을 꿰뚫고 있는 것도 기특하고, 마을에 극장이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도심 한복판에 마을극장이라니. 아마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가 아닐까.
신나는 마을축제... 매일 놀 수 없을까?
마포구 성미산 일대에는 도심 속에서 드물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성미산마을’이 있다. 동네 한복판에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개발의 이름으로 그 산이 헐리는 것을 온 주민이 2년 동안 애를 써서 막았다. ‘성미산지키기’를 계기로 주민들이 가까워지고 함께 하는 일이 많아졌다. 성미산지키기가 시작된 2001년에 주민들 관심을 끌기 위해 숲속음악회가 열렸다. 김창완, 강산에, 장사익 등 인기가수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주민들이 참가했다. 그 때부터 해마다 아카시아향이 동네 가득 퍼지는 5-6월이면 숲속음악회가 열린다. 기획부터 프로그램 구성, 진행까지 주민들이 만들고 관객도 주민들이다. 재작년부터는 밴드, 연극, 풍물, 살사댄스 등 마을 동아리가 축제의 메인을 장식하는 등 제법 판이 옹골지고 커졌다. 반응이 뜨거웠다.
“제대로 판을 벌이고 놀아보니 재밌더라고요. 마을사람들이 ‘우리 이렇게 재밌는 거 일 년에 한 번만 하지 말고 매일 하자’고 한 말이 씨가 됐죠. 어떻게 하다 보니 마을극장이 생겼습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터뜨리는 극장장 유창복 씨. 그는 ‘마을축제의 상설화’라는 말의 씨앗이 뿌려지고 마을극장이라는 기적의 열매가 열리기까지 과정을 설명했다.
주민들은 1년 전부터 마을극장 개관의 꿈을 구체화시켰다. 가장 중요한 마을극장의 장소문제를 고심하고 공간을 알아보러 다니던 즈음이다. ‘환경정의’ ‘함께하는시민행동’ ‘녹색교통’ ‘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 4곳이 성미산마을에 새 집을 짓겠다고 의사를 알려왔다. 이들 단체는 시민운동의 경계를 뛰어넘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면서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자, 서울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생태공동체라는 평가를 받는 성미산마을을 택한 것이다. 지역 주민들한테 공간을 영구 임대하겠다고 하기에 “딱 마을극장이다!”라고 쾌재를 불렀다고 유 대표는 회상했다. 4개 시민단체는 지난해 가을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지하 2층·지상 5층짜리 건물 ‘시민공간 나루’를 세웠고, 그 건물 지하에 높이 6미터 60여 평 100석 규모의 아담한 마을극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하 2층을 파고 방음, 방습, 조명 등을 설치하느라 시설자금이 약 4억 원 정도 소요됐습니다. 주민들이 숟가락모금이라고 적게는 10만원씩, 많게는 100만원씩 십시일반으로 모금으로 충당했습니다. 나머지는 뜻있는 기업의 후원이 절실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조바심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 되겠지요.”
인적자원은 품앗이, 물적자원은 십시일반
‘성미산마을극장’은 마치 예전 마을의 문중 땅처럼 공공의 자산이다. 극장 운영도 주민들이 함께한다. 유 대표는 “성미산마을의 자원동원 전통이 인적자원은 품앗이, 물적자원은 십시일반”이라고 귀띔했다. 주민이 많아 인적자원은 풍부하다. 모두가 한 가지 재능으로 먹고 사는 프로들이다보니 포스터, 공연연출, 기록 등 필요한 일마다 척척 일손이 붙는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마을축제의 경험과 내공을 쌓은 전문가들 아닌가. 덕분에 성미산마을극장의 첫 작품인 개관기념페스티벌 준비도 수월했다. 마을극장의 키워드는 경계와 소통. 개관페스티벌의 오브제를 ‘담’으로 정했다. 담은 기대고 엿보고 넘고 로망스가 기록되기도 하고 개구멍도 내는 등 삶의 스토리가 녹아있는 곳이다. 담을 통해 남녀간, 가족간, 이웃간, 마을간, 국가간, 인종간, 프로와 아마추어간 등 일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고 소통한다는 극장의 지향점을 표현한 것.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초대해 경계와 소통이라는 콘셉트를 전하고 자문을 구했다. 콘텐츠를 제공받음은 물론 예술단체들이 자기 일처럼 기획에 참여하고 섭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마을주민과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2월7일부터 3월29일까지 진행되는 두 달 치 프로그램이 뚝딱 완성됐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답게 공연내용도 참신하고 알차다. 장필순·윤미진의 전날밤 콘서트, 홍세화·조한혜정·우석훈 등 사회 명사의 토크쇼와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개관 행사로 출발하는 개관 기념 페스티벌에서는 마을극단 무말랭이, 성미산학교 청소년밴드, 극단 드림플레이, 꽃다지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이 꾸미는 공연이 마련됐다. 이외에도 주말영화제, 심야여성영화제, 아이들영화제,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제까지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어르신영화제’에서는 <성춘향><사랑방손님과 어머님>을 선보여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수시로 공연관람, 아빠노릇 쉬워졌죠”
3월 첫째 일요일 오후 5시. ‘고재경의 마임쇼’ 공연을 보기 위해 엄마아빠 손을 잡고 아이들이 들어선다. 금세 까만 극장이 형형색색 아이들 때때옷으로 물들었다.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딸의 친구까지 같이 데려온 여선구 씨는 풍물공연, 아마밴드 공연에 이어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관람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문화행사를 가려면 작정을 해야 했는데 거리가 가까우니까 산책하듯 쉽게 올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이들이 좋은 공연을 많이 보니까 정서적인 교육에도 좋고 가족나들이도 되고요. 아빠노릇이 좀 쉬워졌지요.(웃음)”
역시 아이들과 함께 온 김수진 씨는 성미산마을에 이사 온지 한 달이 채 안 된 새내기 주민이다. 이전부터 성미산마을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는데 ‘성미산마을극장’이 생긴다는 걸 보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마을극장이 아이들에게도 참 좋은 장소이지만 나의 성장에도 어떤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고 터놓는다. 숟가락 모금에도 참여해 ‘프리티켓’을 확보한 그는 가방에 아예 성미산마을극장 리플렛을 갖고 다니면서 홍보에 앞장서는 등 걸어 다니는 홍보위원을 자처하고 있다.
“연세대 어학당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요. 외국인학생들이 문화적인 욕구가 높은데 정보도 없고, 다른 공연은 값이 비싸서 거의 이용을 못해요. 그래서 다음에는 그 친구들을 데려오려고요. 가깝고 싸고 좋은 공연도 보고 공동체 문화도 소개하고요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요.”
주민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극장으로
주민들이 꿈꾸는 대로 성미산마을극장은 진화한다. 대개 소극장이라면 영화, 연극, 라이브콘서트 3가지를 생각하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열린다. 마을주민이 모델이 돼서 패션쇼도 열고, 엄마들 인문학 모임에서 촛불 하나 밝히고 스토리텔링도 한다. 매월 마지막 금요일은 청소년들을 위한 클럽데이로 개방한다. 향후에는 결혼식, 성년식, 회갑연, 돌잔치 등 통과의례의 장으로도 공개할 예정이다. ‘마을’극장답게 주민들 삶의 연장으로서의 공간의 취지를 살릴 참이다. 또한 성미산 주민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동네사람들, 다른 나라사람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아와 어울리고 소통하는 ‘마을 놀이터’가 되길 바란다고 유대표는 덧붙였다.
“사실 공연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물에 잠긴 부분은 ‘소통과 생성의 공간’으로서 기능이지요.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공연 전후의 이야기, 에피소드, 관계맺음 등이 세월과 함께 더께처럼 쌓여서 극장이 나이를 먹는 지혜로운 공간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공동체 교육, 생활, 문화운동의 상징이 된 마을극장을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